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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칼럼] 극장의 배경에 서서 배리어 프리를 바라보다

윤소희_남산예술센터 하우스 어셔

제159호

2019.05.15

웹진 연극in에서는 극장의 하우스 업무를 담당하는 매니저와 어셔가 필자가 되어, 무대와 객석의 경험을 통해, 연극과 관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칼럼을 진행합니다. 여러 극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 연극in 편집부
2015-2016년도 남산예술센터 시즌프로그램 <햇빛샤워>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제가 그 여자를 어떻게 기억해요? 다 유니폼도 똑같고 그런데… 백화점에 사람 보러 오는 사람이 어딨어요. 다 물건 보러 오는 거지. 아니 왜 한 번 들른 백화점 아가씨를 저한테 묻는 건데요? 기가 막히네. 자본주의 사회 아니에요? 감정노동자요? (……)”
<햇빛샤워>는 2016년 4월 29일부터 남산예술센터 하우스 어셔로 근무하기 시작한, 나의 첫 시즌프로그램 근무 공연이기도 하다. 해당 공연의 수많은 대사 중 아직도 이 장면이 잊히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와 그 노동의 속성에 대한 고민도 좋지만, 그것은 잠시 미뤄두고 하우스 어셔의 업무와 관련한 이야기를 잠시 하고 넘어갈까 한다. 하우스 어셔는 언제나 극장에 존재하고 있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중 하우스 어셔의 얼굴이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관객과 하우스 어셔가 접점이 되는 순간은 ‘어떠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이며, 대개 다섯 마디를 주고받기도 전에 그 접점은 다시 흩어지게 된다. 어떠한 상황이란 극장에 관련된 안내를 해야 하거나 안전 및 편의와 관련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일 것이다. 하우스 어셔는 대개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전에 미리 안내를 제공하고, 피치 못하게 어떠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신속하고 친절하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즉 모습을 드러냈다가도 몇십초 내에 다시 배경이 되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겠다.
지난 4월 17일부터 28일까지 남산예술센터에서 상연된 <7번국도>는 첫 번째 회차와 마지막 회차에 장애인 관객을 위한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공연을 준비했다. 동시대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장벽을 없애는 것’을 당위의 문제로 인식하고 공공극장에서 이러한 공연을 진행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가 당위의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짚어야 한다. 언제나 관객을 면 대 면으로 만나왔던 동시에 배경처럼 근무했던 상황에서, 이번에는 특히나 하우스 어셔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극장 측의 이야기는 배리어 프리 공연을 막중한 임무처럼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3년이 넘는 근무 기간 동안 명동역 1번 출구로부터 이어지는 언덕과 극장 외·내부의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남산예술센터라는 극장이 배리어 프리에 적합하지 않은 공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는 상상력을 발휘해 보았다. 비장애인 관객들조차 계단에서 넘어졌던 순간들이 떠올랐고, 극장 내부 계단의 개수와 단차, 부재하는 난간 등과 같은 조건이 꼬리를 물고 생각났다. 장애인 관객은 어떻게 극장에 도착하게 되는가? 티켓은 어떻게 찾는가? 공연에 대한 안내 멘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리에 어떻게 착석하는가? 공연 중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안내해야 하는가? 등등. 배리어 프리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하우스 팀의 업무만 상기해봐도 질문은 끝이 없었다. 나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극장문화가 장애인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게 되는 동시에 비장애인 관객만을 대상으로 했을 때 관습적으로 행해오던 모든 지점을 다시 생각해봐야만 했다.
남산예술센터 객석
공연이 끝난 이 시점에서, 결과적으로 어땠느냐 묻는다면 배리어 프리 공연은 ‘큰 문제’ 없이 잘 진행되었다. ‘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다르게 말하면 하우스 어셔들이 해왔던 업무의 기본 속성을 유지하면서도 관객들이 컴플레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우스 팀은 <7번국도> 배리어 프리 공연 회차의 관객들이 다른 공연과 다름없이 안전하고 즐겁게 관람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 배경처럼 존재하기 위해 더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사전 준비를 거듭했다.
그러나 다른 공연들과 비슷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관객들―장애인과 비장애인 관객 모두―이 불편을 느낄만한 상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장애인 관객들을 매우 의식하였으며, 사전배려를 위해 일방적으로 관객들의 상황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장애인 관객들은 다시 한번 특수한 존재로 타자화되었다. 이것은 결국 배리어 프리 공연의 본질과 굉장히 모순되는 지점일 것이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7번국도> 담당 제작 PD는 “우리의 극장문화가 반쪽짜리였다는 것을 깨달았고 앞으로 이 반쪽에 새로운 서비스를 추가하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쳐다보지 않았던 세계를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번의 경험은 다음 배리어 프리 공연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러나 표층에서 기존의 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어쩌면 빛 좋은 개살구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는 ‘반쪽에 새로운 서비스를 추가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본질적으로 ‘우리가 쳐다보지 않았던 세계’를 완성시켜 나갈 수 있을까? 그것은 몇몇 특수 파트만의 고민과 걱정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이를테면 하우스 팀의 사전준비나 친절한 언어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우스 어셔들은 언제나 그래왔듯 극장의 배경에 서서 묵묵히 극장과 관객의 만남을 서포트할 뿐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배리어 프리 공연 회차의 특이사항들이 아니라 배리어 프리 공연이 ‘아직’ 특이사항인 우리 사회의 환경 그 자체일 것이다.
장벽의 역사는 길고, 단단한 장벽은 단순히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다. 배리어 프리 공연이 이벤트성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제작문화의 전반적인 인식개선, 더 나아가 관객들의 관극문화 개선을 비롯한 사회 전반적인 차원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은 잠시의 불편을 초래할 수 있지만, 달리 보면 문제 인식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문제의 인식은 토론을 낳고 그것은 더 깊은 논의로 이어질 것이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말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시즌프로그램 <명왕성에서> 역시 2회의 배리어 프리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부디 극장을 찾아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디, 배리어 프리 공연이 특수한 공연으로만 끝나지 않게 다양한 층위에서 논의되기를, 가시화되기를, 담론화되기를 바란다.

[사진제공: 남산예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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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희

윤소희
2016년부터 남산예술센터에서 하우스 어셔로 근무하고 있다. 2018년부터 삼일로창고극장에서도 함께 근무하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sohee.youn.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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