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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이자 그 누구도 아닌 이름 김공주

허윤_문학연구자

제 162호

2019.06.27

여기 한 여자가 있다. 한겨울 시골 기차역에서 선 그는 역전에 있는 대폿집을 보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천진한 동시에 영악하기도 한 그 미소는 관객들의 마음속에 새겨진다. 시골에 돌아가 동생을 돌보며 농사를 짓겠다던 백화는, 그렇게 읍내에 남았다. 한국형 모더니즘으로 유명한 이만희 감독의 영화 <삼포가는 길>(1975)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영화는 황석영의 소설 <삼포 가는 길>(1972)을 기반으로, 백화, 영달, 정씨 3명이 고향을 찾아 떠나는 로드무비다. 여기서 이만희 감독은 백화가 정씨와 영달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향에 돌아간다는 결말을 바꾼다.
소설 밖 세계에서는 일용직 노동자인 정씨와 영달이 현상금까지 걸려 있는 술집 작부 백화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군부대와 시골 술집을 떠돌던 백화가 울면서 자신의 이름을 고백하는 식의 아름다운 결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황석영은 백화의 귀향을 통해서 고향을 지키는 어머니와 누이라는 노스탤지어를 완성한다. 산업화로 인해 물리적 고향은 파괴될지라도, 마음속 고향과 가족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정씨와 영달은 여동생을 보호하는 남성 주체로 거듭난다. 삼포는 사라지고 없지만, 삼포를 구성하는 망탈리테(mentalite)는 그대로 남는다. 사랑이나 위안은 이럴 때 필요하다.
영화 <삼포가는 길>(감독 이만희, 1975)(사진출처: https://www.kmdb.or.kr)
우리가 지금까지 대중적 텍스트를 통해 만났던 일본군 ‘위안부’ 역시 그런 종류의 위안을 포기하지 않는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2)는 북한군 최대치와 ‘위안부’ 윤여옥의 눈물겨운 사랑으로, 영화 <귀향>(2016)은 생과 사를 넘어선 두 소녀의 우정으로, <아이캔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청년가장 9급 공무원의 가족 만들기를 통해서, 우리는 비정한 현실을 위로받을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래도 사랑이 있고, 우정이 있고, 가족이 있다. 하지만 극단 신세계의 연극 <공주들>은 끝까지 외면당하는 일본군 ‘위안부’ 여성의 삶을 통해 피해생존자의 삶을 들여다본다. 누구도 위로받을 수 없는 세계에서 생존자는 괴물 같은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주들>의 주인공 김공주는 1930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 시집 보내고, 둘째 딸은 입을 덜기 위해 기생으로 보냈다. 셋째딸인 공주는 가시나가 아버지한테 대든다고 혼난 어느 날, 집 밖에 나섰다가 조선인 업자에게 인신매매 당해, 미얀마 전선에서 ‘위안부’가 된다. 이후 김공주의 인생은 국가와 민족이 어떻게 여성을 자원화했는가를 보여준다. 가족들에게 부끄러워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공주는 부산에서 색시 생활을 하고, 사랑하던 남자에게는 버림받는다. 임신한 채 돌아온 고향에서는 빨갱이로 몰려 한국군 ‘위안부’로 끌려간다. 천황의 군대를 위해, 빨갱이를 척결하기 위해, 군대로부터 ‘정숙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1961년 파주에서는 미군 ‘위안부’가 된다. 이후 김공주는 중간관리자인 마마상이 되기도 하고, 단속에 걸려 몽키하우스에도 끌려간다. 하지만 그렇게 키운 아들은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에 시달린다. 김공주는 폭력적인 아들과 웃자란 손녀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성 판매를 계속한다. 용산 집결지에서 업소를 운영하기도 하고 80세가 넘어서는 종로의 여관방에서 ‘박카스 할머니’가 된다. 이 잔인하고 끔찍한 한국 현대사는 한 여성의 몸에 아로새겨진다. 그러나 김공주는 우리가 상상하는 피해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강남 붐을 타고 호스트바를 운영해보기도 하고, 업소의 중간관리자가 되어서는 손님을 상대하는 기술을 젊은 여성들에게 전수하고 그들의 보호자 노릇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했어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더러운 일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손녀의 말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손녀를 달랜다. 무능한 아들과 입바른 손녀 사이에서 가족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을 착취하는 세상에 맞서 생존한 김공주다. 연극 <공주들>은 비천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고, 고통을 낭만화하지 않는 데서 그 미덕이 발휘된다. 노스탤지어의 고향에는 돌아갈 곳을 잃은 남성 노동자보다 더 훼손된 누이와 어머니가 있다. 전쟁으로 상처 입은 군인을 위안하는 것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아들을 보듬는 것도 여성이다. 그런 점에서 연극 <공주들>은 고통을 직시하는 힘을 가진 작품이 된다. 이 과정에서 연극은 우리는 모두 김공주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군 ‘위안부’, 집결지 성매매 여성, 마마상 등 다양한 장소에 존재하는 복수의 여성들을 김공주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연극의 첫 장면에서 열 명의 배우는 모두 무대에 올라와 자기소개를 한다. 김공주부터 왕공주까지 이 ‘십 공주’들은 저마다 다른 이름과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국가와 민족에 의해 교환되고 자본으로 환원된다는 점에서 다 ‘김공주’다. 여기에 할머니처럼 살지 않겠다며 열심히 공부한 손녀의 사연이 더해진다. 반성매매 운동을 하던 손녀 공주는 집결지를 철거하겠다는 정치인의 비서가 된다. 집결지는 이제 지역의 재개발을 막는 흉물이 되었고, 미군 ‘위안부’를 격려하고 기생관광을 독려했던 군수와 시장은 이제 지역 주민을 위해서 집결지를 허물고 뉴타운을 건설하겠다고 한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여성들은 언제 어떻게 쫓겨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손녀는 믿고 따르던 그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상처받은 채로, 할머니의 삶과 자신의 삶이 다르지 않았다고 토로한다. 이는 지식, 경제력, 삶의 태도와 상관없이 어떤 여성이든 언제나 ‘성적인 존재’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 모두는 또 하나의 ‘김공주’인 것이다.
하지만 이 촘촘한 역사적 배치는 연극의 형상화를 방해하기도 한다. 실제 사건들을 중심으로 세심하게 세공된 김공주는 일종의 초역사적 전형과 만나게 될 위험이 있다. 관객이 김공주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현대사와 만날 때, 일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 각각이 가진 차이는 성별화된 국가와 민족으로만 통합된다. 집결지에 화재가 나서 안에 갇힌 성판매 여성들이 탈출하지 못하고 죽은 사건과 2015년의 불가역적 합의가 뉴스 클립으로 삽입될 때, 역사적 시공간과 특수성을 뛰어넘어 김공주는 모두의 이름이 된다. 하지만 이 전형적 대표/재현(representation)은 언제나 상징을 초과하는 이야기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거대서사를 통해 배운, 잘 짜여진 서사를 벗어나는 지점을 어떻게 상상하게 만드는가는 극의 역할이기도 하다.
암 환자로 진단받은 김공주가 종로의 여관방에서 싼값에 성을 판매할 때, 구매자인 대학생은 그의 늙은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며 검은 비닐봉지를 씌운다. 봉지를 쓴 김공주는 연극의 제목이 표상하는 구멍 그 자체다. <공주들>은 입장할 때부터 관객들에게 ‘구멍’을 선택하라고 한다. 중의적 의미를 가진 이 ‘구멍’은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기도 하고, 공식 역사가 말하지 않은 구멍을 의미하기도 하며, 촘촘히 짜여진 상징계를 찢고 튀어나오는 실재계의 자리(void)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주들>은 이 구멍을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로 메우려고 시도한다. 한국 현대사와 겹쳐 읽는 김공주의 삶은 빽빽한 문자들로 가득 찬다. 연극이 끝나고 나올 때, 극단원들은 <공주들>에 사용된 참고문헌이 빼곡히 적힌 유인물을 나누어준다. 이 참고문헌은 일종의 각주로 기능한다. 각주로 사실임을 증명하고 김공주들의 삶을 논증하려고 할 때, 이 사실의 무게는 연극 <공주들>이 가진 힘이자 한계지점이 된다. <공주들>이 일본군 ‘위안부’에서 출발하여 한국의 현대사를 완전체로 재현했다면, 관객은 김공주를 통해 무엇을 상상하고 기억할 것인가.
<공주들>(2019)(사진제공: 서울연극협회)
그 구멍의 자리에 한 여자가 있다. 늙고 병든 그는 극장의 무대 한가운데서 말을 이어간다. 사회자는 황급히 그녀의 마이크를 뺏고, 김공주 할머니의 건강과 안녕을 빌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관객은 서둘러 자리를 뜨고 무대에는 할머니만 남는다. 2시간 동안 김공주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사회자도 관객도 결국은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공주는 백화처럼 웃지 못한다. 백화의 환하고 서늘한 미소로 드러나는 재현을 초과하는 자리를, 너의 예상과 의도를 배신하는 구멍의 자리를, 연극 <공주들>의 관객이 찾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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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

허윤 문학연구자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50년대 전후 남성성의 탈구축과 젠더의 비수행」, 「냉전아시아적 질서와 1950년대 한국의 여성혐오」, 「1950년대 퀴어 장과 법의 접속」 등의 논문과 『그런 남자는 없다』(오월의봄, 2017),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민음사, 2018) 등의 공저, 『일탈』(현실문화, 2015) 등의 역서가 있다.
yunheo@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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