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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를 위한 사회적응훈련

김원영

제165호

2019.08.08

1999년에 나는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한 장애인복지시설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특수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와 함께 있는 거주시설에서 살았다. 나와 내 친구들은 모두 장애가 있었고, 우리는 외출할 일이 많지 않았다. 당시 경기도 광주시는 지금보다도 훨씬 작았고, 행정단위도 시(市)가 아닌 군(郡)이었다. 우리는 광주군의 번화가로 나가 노래방을 가거나 PC방에 들르고, 약간의 쇼핑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외부로 나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가 이용 가능한 교통수단이 없었다.

그곳에서 평생 지낼 수는 없으므로, 복지시설에서는 '사회적응훈련'이라는 프로그램을 종종 진행했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은 ‘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적응훈련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 이 훈련은 우리가 ‘사회’에 살지 않음을 선명하게 인식하는 계기였다(많은 종류의 훈련은 보통 그 훈련이 목표로 하는 일을 지연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나는 열일곱 살이었지만, 실제로 ‘사회’에서 해본 일이 몇 없었다. 특히 연극이나 가수들의 콘서트, 전시회 등을 가본 경험은 전혀 없었다. 사회적응훈련 기간에 복지시설에서는 약간의 활동비를 지급하고, 우리는 복지사 선생님들의 도움 없이 ‘사회’에 나가 각자가 해보지 않은 일을 기획하고 실행한다. 누군가는 버스를 타고 놀이공원에 가보거나, 영화를 보고, 농구를 관람하고, 마트에서 장을 본다. 나는 당시 보행이 가능한 뇌병변장애인 친구와 대학로에 가서 콘서트를 보겠다고 결정했다. 마로니에 공원은 정말로 90년대 유행했던 음악처럼 사랑스러운 곳인지 궁금했다.
마로니에 공원이 뭔가
경기도 광주군의 시골에서 친구와 나는 우선 택시를 타고 군의 중심지로 이동한 후에, 서울 강변역까지 가는 1113-1번 버스를 탔다. 저상버스는 당연히 없었으므로 아마 승객들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싣고, 양팔로 버스 손잡이를 잡아 공중부양 하듯이 앞자리에 앉았을 것이다(사실 기억이 없다. 그다지 품위 있게 탑승했을 가능성은 없으므로 스스로 기억을 지운 모양이다). 강변역에 도착한 후에는 ‘즐거운 나의집’이 배경음으로 흘러나오는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하고, 2호선을 타고, 어딘가에서 4호선으로 환승하고, 혜화역에 어떻게 도착해서, 엘리베이터가 없었으므로 또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방법으로 대학로로 나왔을 것이다. 내 기억은 혜화역 2번 출구 앞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시작되는 골목길(대학로의 가장 중심 골목일 것이다)로 들어섰을 때의 풍경이다. 지금도 서 있는 삼각형 지붕의 건물이 정면으로 보이고, 치킨을 파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있었던 기억이 있다(왜곡된 기억 같기도 하다).

그 길을 따라 나는 휠체어를 밀고, 친구는 타인이 보기에 불안정한 모습으로 비틀비틀 걸으며 지하에 있는 콘서트장을 찾아다녔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오직 우리 둘인 것 같았다. 1999년을 살던 힙스터들이 다 모인 느낌이었고, 서울의 도심 자체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던 내게는 모든 사람이 너무나 매력적이고, 세련되고, 아름다워 보였다. 저런 사람들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연극을 보고, 미술관도 가고, 인디밴드의 노래도 듣고, 일본 애니메이션을 찾아보는 것일까? 평범한 사람들이 저렇다면, 배우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내가 사회에 적응하기란 글러 먹었다고 생각했다.
휠체어 그네가 있는 대학로
친구와 나는 지하에 있는 콘서트장을 찾아, 어떻게 도움을 받고, 맨 뒷자리에(기억나지 않는 어떤 방법으로) 앉아서, 앞사람들이 일어서 열광하는 동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못한 채 있다 나왔다. 사회가 이런 곳이라면 적응하지 않고 살겠다. 10대 후반의 나는 생각했고, 역시 기억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의 사회로 돌아왔다. 가수 김종서씨를 실제로 본 것으로 만족했다. 마로니에 공원은 인식하지도 못했다.

2019년 나는 대학로를 자주 방문한다. 관심 있는 워크숍이 있으면 가고, 노들장애인야학(노들야학)에 세미나를 하러 간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음센터)에서 하는 회의에 갈 일도 있다. 마로니에가 보이는 이음센터 안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면, 그곳을 지나는 수많은 전동휠체어를 발견한다. 공원에는 휠체어 그네가 있다. 노들야학과 이음센터가(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대학로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제 대학로는 배우들, 무용수들, 기획자들, 마로니에 공원을 거니는 시민들과 함께, 장애를 가지고 야학에 다니는 학생들과 배우들, 무용가들, 화가들이 수없이 교차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 글을 쓰는 하루 전에도 뇌병변 장애가 있는 화가 문승현씨가 마로니에 공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대학로가 이런 공간이 되기까지, 노들야학이 이 자리에 정착하기까지 엄청난 일들이 긴 시간 동안 축적되었음은 물론이다. 사회에 적응하기란 이토록 어려운 것이다.

대학로가 제법 개방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공연은 접근이 아예 불가능하거나, 오퍼레이터 바로 옆에서 보아야 하거나(스태프가 된 기분이다,) 수어통역 서비스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의 날들을 크게 기대한다. ‘연극in’의 이 칼럼코너에서도 하우스 매니저와 어셔분이 장애인 관람객의 공연 접근성을 다루었다. 세부적인 곳까지 파악하고 고민하는 글이었다. 어떠한 몸과 감각을 지니고도 좋은 연극과 무용 공연을 앞자리에서 관람하는 날이 머지않기를, 다양한 신체적, 정신적 특성을 가진 공연자들이 충분한 훈련 기회를 얻고 공정한 시선을 지닌 관객들 앞에서 많은 공연을 올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모든 변화와 기대들은 대학로의 풍경이 이토록 바뀌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대학로가 마침내 사회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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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

김원영 작가, 변호사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희망 대신 욕망>을 쓴 저자이고, ‘법무법인 덕수’에 소속된 변호사다.
연극 프릭쇼(2014년 변방연극제) 등을 기획했다. 장애예술, 그 중에서도 공연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체장애가 있어 휠체어를 탄다. 한겨레신문, 비마이너, 시사인 등에 글을 썼고 쓰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DisabilityTheoryAnd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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