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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날리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유선_인포숍 카페별꼴 매니저

188호

2020.10.22

한때는 선생님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다. 누군가의 농담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리는데, 혼자 알아듣지 못해 웃을 수 없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면 아, 나도 공부란 걸 좀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나는 똑똑한 선생님들의 대화에 진입하기 위해 밤새 도서관에서 온갖 책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초저녁에 학교 도서관에 들어갔다가 아침 첫차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새벽 세 시의 도서관은 새벽 세 시의 맥도날드와 아주 비슷했는데 모두가 혼자였고 모두가 그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걸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랬다. 웅크리고 자는 사람, 소주를 마시는 사람, 여장을 한 여성 패싱의 사람, 여장을 한 남성 패싱의 사람, 밤새 우는 사람,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사람, 종교 팸플릿을 나눠주는 사람 등등. 그 사이에서는 철학책을 산처럼 쌓아놓고 읽는 내가 제일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걸 이해하는 사람이 과연 전 세계에 몇 명이나 될까 싶은 이상한 표를 따라 그리다 보면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라깡이 다 뭐며 헤겔이 다 뭔가 현타가 오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한 일 년 만에 꽤 많은 개념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농담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내가 이해할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세계로의 진입을 위해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계속해서 받아쓰는 일은 쓸데없고도 까다로웠다. 그렇지만 마침내, 나는 몇몇 농담들을 알아듣기 시작했고, 제법 따라 웃을 수도 있게 되었고, 심지어 가끔 농담을 구사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농담이 재미가 없다. 이해한다고 해서 애초에 내가 웃을 수 있는 농담이 아니었다. 나 같은 존재를 고려해서 만들어졌을 리 없는 세계였다. 어리고 무지한 여성이 그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아도 모자란 어떤 노력, 혹은 수정란 상태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노력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알 수가 없다.

뭔가 늘 모자라고, 여기에 내가 속한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든다면, 역할이 주어질 때마다 그것을 잘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늘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왠지 사기를 치고 있는 것처럼, 심지어 주어진 일을 10년, 20년 반복해서 전문가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뭔가 어긋나 있는 느낌이 들고, 잘못 박음질되어 한쪽이 자꾸 기어 올라가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게 맞다. 세계는 그렇게 이루어져 있으니까. 아무리 노력을 해도 100%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같은 농담에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에도, 우리는 그 농담이 원래 재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 누구에게만 재미가 있는지, 왜 재미가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함께 웃고 있는 이들 중 누군가는 그냥 따라 웃거나, 억지로 웃거나, 습관적으로 웃거나, 그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웃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농담이 어떤 농담인지, 때로 그게 누군가에게 얼마나 권위적일 수 있는지, 어느 방향을 향해 있는지, 왜 나온 것인지를 늘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에 서서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대화를 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는 것. 서로 아주 다른 존재 하나하나를 존중하며 이루어지는 대화란 어떤 것일지 상상해보는 것.

지난주 목요일에는 농담이 별로 나오지 않는 연극을 봤다.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 지체장애가 있는 사람, 수어를 쓰는 사람, 휠체어를 탄 사람, 몸이 많이 아픈 사람, 아팠던 사람, 그런 특성들을 두 개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 한 가지만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관객과 배우로 모인 극장에 함께 있었다. 수어를 쓰는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수어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수어 단어 다섯 가지를 배웠다. “코끼리, 족쇄, 시간이 흐른다, 힘이 세진다, 불가능하다.” 족쇄가 채워진 코끼리는 자유를 잃었지만 시간이 지나 몸이 커지고, 힘이 세진다. 그러나 여전히 족쇄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이야기.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덤덤하게, 각자 다른 소통방식과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전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대에서는 끝도 없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옮김이 일어나고 있었다.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겨 문장을 만들어 프로젝션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관객들은 화면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문장이 실시간으로 띄워졌다가 다시 지워졌다가 다시 수정되는 과정을 본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잠시 후 다른 한 사람이 그 과정을 음성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다시 수어를 하는 사람이 그 장면과 말을 수어로 옮긴다. 그들은 계속해서 서로의 무언가를 쿵, 들어서 옮긴다.

전달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해석에는 빈틈과 함께 우주만큼 큰 크기의 왜곡이 생긴다. 위에서 누군가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는 중에도, 틈은 계속 생긴다. 번역의 번역, 통역의 통역, 재현의 재현이 이루어지는 사이에, 배우와 관객들은 화면에 나왔던 똑같은 거리를 따라 걷고, 종이에 인쇄된 글씨를 연필로 위에다 따라 쓴다.
공연 중 글씨가 프린트 된 종이에 따라 쓴 문장들
공연 중 글씨가 프린트 된 종이에 따라 쓴 문장들
“거기 누구 있나요? 여기 계신 분 중 누군가 제 말을 읽어주시겠어요?” 화면에 한글로 타이핑되고 있는 말이 있다. 관객 중 누군가가 그것에 응답해 음성으로 문장을 읽는다. 수어로 말하는 사람이 통역한다. 동시에 음성을 쓰는 사람이 해설한다. 그러다 돌연, 음성해설을 하는 사람은 과거에 아팠던 자신의 기록을 읽는다. 손글씨와 음성 두 가지로 기록되었던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안에 말이 고여 있는데, 다른 말에 목소리만 얹는 것도 내게 맞는 일은 아니었다.” 개인의 고유성, 존재 자체를 이야기하면서 끊임없이 통역하고 해석하고 보여주고 전달하는 일은 어느 때에만 맡는 특정 역할이 아니라, 그냥 모두가 타고난 운명 같은 것이 아닐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을 배우려고 하는 움직임.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돌아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지 않고 그것에 실망하지 않는다. 재현의 실패, 소통의 실패, 대화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의 불가능성일까. 언젠가 나는 의미가 고정되어 있고 확실하며 수준 높은 농담으로 만들어진 세계에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그것이 다른 작고 무수한 개별 세계 중 하나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100%는 불가능하다. 항상 무언가 모자라게 옮겨놓는 자신만이 있다. 상대방의 세계를 해석하는 동시에도 나는 나의 세계를 만들고 있고, 항상 이것들이 동시에 일어난다. 항상 시차가 있고 실패가 있다.

저녁 어스름에 혜화동 길 걷는 영상과 똑같은 길을, 관객과 배우들은 다시 걷는다. 이미 프린트된 종이 위의 문장을 연필로 똑같이 옮겨 쓴다. 그렇지만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는 않으니까, 차이 나는 것들만이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족쇄가 채워진 코끼리가 시간이 지나 힘이 세질 때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자랄 수 있었는지, 그 모든 순간에 대한 생략이 있다. 전달하지 못했고 전달하기가 불가능했던 부분에서 각자가 상상한다. 코끼리를 흉내 내는 표정, 몸짓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동시에 넘어가는 다른 언어가 있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 세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말을 옮기는 과정을 집중해서 보여준다. 수어로 하는 이야기를 문자로, 그리고 다시 음성으로. 문자로 한 말을 음성으로, 그리고 다시 수어로. 음성으로 한 말을 수어로, 그리고 문자로. 기다려, 기다려, 기다려.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차가 필요하다. 조금 기다려야 한다. 조금의 빈틈이 있다. 말이 온전히 옮겨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배우들은 서로 마주 보며 웃고 있고, 관객도 웃고 있다. 전달되지 않는 어떤 부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텅 빈 구멍 같은 것이 우리를 웃게 하는 순간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체념하거나 없애려고 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실패할 것이 확실한 시도를 할 때만. 동시에 웃는 것이 가능해진다.

어떤 이들은 다르지만 대립하지 않는다. 다르지만 서로 위계를 만들지 않는다. 하나의 농담에 모두가 똑같이 웃지 않는다. 서로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차이에 가 닿으려고 무용한 시도를 되풀이한다. 늘 똑같아 보이는 실패의 한 종류를 보여주는 것, 실패에 끌어들이는 것, 어찌할 수 없음에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맞닥뜨려보는 것, 그러한 모습을 재현하고 또 재현해보는 것. 그러나 어느 하나도 같은 방식으로는 아닌, 각각이 너무도 다르고 대체 불가능한, 0set 프로젝트의 연극이라는 시도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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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

유선
노들장애인야학 낮수업 교사이지만 한 번도 교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치기도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비장애인 교사의 권위에 대해 생각한다. 인포숍카페별꼴의 매니저 7인 중 1명이며, 3명으로 구성된 다이애나랩에서 33.3%의 일을 맡고 있다. 아기를 낳고 커밍아웃이 어려워진 팬섹슈얼, 비건, 고양이 추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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