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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배경인 드라마

유선

193호

2020.12.17

*드라마 <위 아 후 위 아(we are who we are)>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위 아 후 위 아(we are who we are)>(2020)는 코로나19로 집 안에만 머물러야 했던 올해 닥치는 대로 봤던 드라마 중 가장 마음에 남는 작품이다. 8개의 에피소드로 된 시즌1은 이탈리아 북부 작은 도시 키오자에 위치한 가상의 미군 기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 국방부는 처음에 비첸차에 주둔해 있는 미군 기지를 통해 드라마 제작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시나리오 내용을 확인하고 약속을 철회했다. 2019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이어진 촬영은 실제 부대처럼 미군 장병 가족을 위한 학교와 집, 편의시설과 훈련시설을 갖추어 새로 지은 세트에서 이루어졌다. 카메라가 비추는 모든 장면에서 햇살이 부서지는 이탈리아의 여름 풍경 때문일까, 아니면 10대 퀴어들의 이야기라서일까?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무겁지 않게 그려진다.
<위 아 후 위 아> 이미지 (출처:imdb.com)

<위 아 후 위 아> 이미지 (출처:imdb.com)

뉴욕에서 키오자 기지로 이주하게 된 14살 프레이저는 엄마가 기지 최초의 여성 지휘관이라는 이유로, 또 레즈비언 부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기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시기는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기 직전인 2016년. 프레이저는 기지 안에 사는 동갑내기 케이틀린을 만난다. 케이틀린은 미군인 아버지와 나이지리아 출신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나이지리아에서 낳은 이부 형제와 함께 산다. 또래 남자친구와 사귀고 있는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는 하퍼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긴 머리가 보이지 않게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헐렁한 옷을 입고 혼자 기지 밖 바에 가면, 또래의 이탈리아 여자아이가 부끄러워하며 전화번호를 적어준다.
프레이저와 케이틀린은 서로의 비밀과 불안을 공유하면서 점점 가까워진다. 프레이저는 부대 안에서 만난 젊고 잘생긴 이성애자 군인을 짝사랑하게 되고, 그와 함께 읽을 시집을 고른다. 케이틀린은 첫 생리를 시작하고,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긴 머리를 삭발하고, 보수적인 아버지에게 혼이 나고, 남성 호르몬 주사 요법을 홀로 고민한다. 얼핏 이 이야기는 정체성을 고민하며 방황하는 평범한 미국 10대의 성장담인 것 같지만, 배경이 미군 기지라는 점이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든다. 미군 부대 안에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라니.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평온하고 눈부신 해변에서 물장난을 치는 아이들이지만, 그들이 사는 곳이 군부대라는 것, 가족과 친구가 군인이며 주변에 널린 죽음이라는 단어를 피할 방법이란 없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다. 얼마 전까지 함께 수영하며 놀던 어린 군인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배치되고 폭탄 테러로 죽는다. 키오자 기지의 아이들 중 누군가는 평택 미군기지에 살았었고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가게 될 것이다. 군인과 그 가족들은 3년마다 주둔지를 옮겨 재배치된다.

반세기가 넘게 주한미군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많은 사건에 익숙한 시청자에게, 미군기지 안 퀴어들이 주인공인 이 드라마는 너무 낯설어서 완전히 다른 세계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아는 주한미군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것 같은 인물들. 옆집 하사의 아내와 바람이 나는 레즈비언 대령의 군의관 아내, 얼굴에 공들여 수염을 붙이고 남장을 하는 딸, 게이 아들, 가장 친한 친구가 IS 폭탄 테러로 죽은 슬픔을 몰래 이슬람식으로 추모하는 아들, 트랜스젠더인지 뭔지 모를 아이와 게이인지 뭔지 모를 아이의 키스. 이 드라마에서 인물들은 정해진 역할을 늘 초과한다. 물론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서 나오는 것처럼 익숙한 미군 기지의 이미지 – 집단 섹스, 마약, 알콜 중독, 폭력, 범죄,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미군과 연애하는 기지 주변의 젊은이들 또한 등장한다.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전쟁에서 죽어 나가거나 스스로 죽거나 하는, 늘 똑같은 이야기. 이 드라마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말 그대로의 전쟁과,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중이며 모두가 홀로 맞서 싸워야 하는 보이지 않는 전쟁 둘 다를 다룬다.

2018년 가을과 겨울에 나는 갑자기 어쩌다 동두천 캠프 호비 앞에 가 있었다. 경기북부 마을 아카이빙 프로젝트 참여작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는데, 평생 그렇게 무력감을 느꼈던 적이 없다. (사실은 아직도 트라우마가 있다) 미군 공여지가 시 면적의 43%를 차지하는 지역의 사정은 알면 알수록 도저히 나 따위가 건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갑자기 미군기지가 들어서는 바람에 집과 땅을 잃은 사람들이 주변으로 밀려나 판잣집을 세워 살기 시작하고, 기지 주변으로 실향민들이 모이고, 유흥가가 생기고, 마을에 달러가 돌면서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 업소가 생기고, 각지에서 잠깐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이 북적대고, 그러다 시간이 한참 흘러 미군의 축소와 재배치, 미군 범죄에 대한 미군 내의 불관용 원칙, 한국 경제의 성장 등으로 빈집과 빈 가게가 즐비한 유령마을로 변해버린 자리에 이주노동자들과 난민들이 모여들고, 망하지 않은 클럽들은 러시아, 필리핀 여성들을 고용해 한국인 남성들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그 길고 무거운 이야기 사이사이에 너무 많은 죽음과 폭력의 기억이 있었다. 기지 밖의 누군가가 기지 안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기지 안 누군가가 알몸으로 달리는 트럭 앞에 뛰어들고, 기지 밖 누군가가 목을 매고, 일하던 업소 삼층에서 뛰어내리고, 핏물이 웅덩이로 골목마다 고여 있는 사이로 새로운 군인이 오고 새로운 군인이 다시 전쟁터로 배치된다. 새로운 이주민과 난민들이 들어오고 다시 어디론가 사라진다. 기지 근처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나는 원래 여기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원래는 아닌데 잠깐, 떠날 예정이었는데 조금 더, 어쩌다 보니 여태까지 버티고 있는 중이라고.
018 경기문화재단 <턱걸이마을 공동체 아카이브 프로젝트> 캠프 호비 근처 간판들 ⓒ우에타지로
2018 경기문화재단 <턱걸이마을 공동체 아카이브 프로젝트> 캠프 호비 근처 간판들 ⓒ우에타지로
사실은 버틸 때까지 버텨보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 청년들의 이야기다. 변기가 꽁꽁 얼어붙을 만큼 추웠던 한겨울 곧 폐쇄될 동두천 미군기지 앞에서, 어느 순간 나는 엄청난 전쟁, 국가폭력, 커다란 사건에 휘말렸던 그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내 주변 친구들과 겹쳐 보였다. 큰 사고도 비명도 없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는 젊은이들, 살아있는 매 순간이 총알이 날아드는 전장에 맨발로 서서 걷는 것 같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 매달 죽음을 선택하는 이가 1천 명1), 10세에서 39세의 사망원인 부동의 1위는 자살. 이런 통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은 어떻게 버텨보지만 버텨지지 않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언제나 온다는 것, 이대로라면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위 아 후 위 아>에서 프레이저와 케이틀린이 너무도 놀랍게 느껴지는 이유는 본인을 평생 옭아맬 사회의 기준들을 맞닥뜨린 두 사람이 절망에 빠지는 것 대신 가볍게 함정 사이를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저게 가능한 일인가 싶게. 드라마에서는 두 캐릭터의 해석 불가능한 지점이 계속해서 불쑥 튀어나온다. 케이틀린은 여성일까 남성일까 트랜스젠더일까. 프레이저는 게이일까 이성애자일까 양성애자일까. 두 사람은 데브 하인스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2) 이분법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답할 수 없는 지점 그 자체가 자신임을 드러낸다. 세상이 무엇이라 불러도 좋으니 감정이 가는 대로 하겠다는 선언. 그들은 의미 없는 질문들을 뒤로 하고 규정되지 않고 규정될 수 없는 미래의 세계로 진입한다. 언젠가 읽었던 인터뷰에서 데브 하인스는 볼 컬쳐(ball culture)에 대해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영국의 에섹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자랐어요. 이상한 옷을 입고 다니고 게이 친구들이 있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침을 뱉거나 때리기도 하고, 호모새끼(fag)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30년 전 뉴욕에서 흑인에 게이, 흑인에 트랜스젠더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지를 생각해보세요. 너무 많은 것들이 그들을 반대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주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어냈어요. 그 용맹함, 정말 인상적이에요.” 3)
정체성을 규정짓고 차별의 도구로 사용하는 세계에서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일. 나는,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던 트랜스와 크로스 드레서들의 용감한 상상력과, 비첸차 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했던 사람들,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 기지에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함께 떠올려본다. 지난 30년 동안 자신들을 둘러싼 크고 작은 전쟁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무엇을 만들어냈나. 기지를 둘러싼 여러 질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아마도 퀴어, 이분법에 저항하는 존재일 것이다.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에는 이 대답이 좀 더 다양하게 변주되기를.
  1. <여성 자살율, 2008년과 닮았다> 2020. 12. 13. 한겨레21
  2. <We Are Who We Are: Time Will Tell> https://www.youtube.com/watch?v=LcjlcmPViQw
  3. <DEV HYNES: SEX, COMICS AND VOGUING> 2013. 2. 10.https://slutever.com/dev-hynes-apart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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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

유선
노들장애인야학 낮수업 교사이지만 한 번도 교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치기도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비장애인 교사의 권위에 대해 생각한다. 인포숍카페별꼴의 매니저 7인 중 1명이며, 3명으로 구성된 다이애나랩에서 33.3%의 일을 맡고 있다. 아기를 낳고 커밍아웃이 어려워진 팬섹슈얼, 비건, 고양이 추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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