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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인육을 먹는다

유선

195호

2021.02.18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제정신이냐, 그럼 다들 연쇄살인마에 한니발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형제 부모 친구 다 범죄자로 모냐’ 날 선 반응이 쏟아지겠지만 용기를 내서 이야기해보자면 사실이 그렇다. 2011년에 월스트리트에서 했던 것처럼 99%와 1%로 세상 사람들을 구분해 보자면 위아래 가리지 않고 99.9999% 정도가 아마. 자신이 먹는 고기가 무엇인지 모르고도 먹고, 알고도 먹고, 아는데 모르는 척하면서도 먹고. 양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대부분이 먹는다. 거기에는 당연히 나도 포함된다. 이 글은 절망과 죄책감 속에서, 그렇지만 마음속에서 자조 아닌 다른 감각을 어떻게든 지켜내 보려고 쓴다. 인육 먹는다는 것을 공격하거나 가르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고기를 먹으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어쨌든 먹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디서 온 고기인지 사람들이 몰라서 먹는 거지, 알고는 못 먹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이들도 더러 있지만, 알다시피 세상일이 그렇게 굴러가지는 않는다.
모두가 사람 고기를 먹을 정도로 세계가 엉망진창이고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된 다음, 내가 처음 배운 건 위악이다. 다들 조금씩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거니까 그렇게 살아야지 어쩌겠냐고.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고, 때로 더 심한 것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태어난 이래 매일이 위기이고 재난인 세계를 힘내서 견디는 방법을 배워왔다. 뒤쳐져선 안 되고 늘 새로워야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주식도 한 주 없고 유행한다는 클럽하우스도 아직 못 깔았는데 이를 어쩌나 늘 조금씩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삶. 그러니 죄책감은 뒤로 미뤄두고 일단 남들 하는 것처럼 살 필요도 있다고. 이거 먹는 정도는 그렇게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자기를 속이고 주변 사람들을 다독이는 방법부터 배웠다.
안다고 당장에 뭘 바꿔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기가 맛있었다) 변화라는 건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야 가능한 것처럼 보여서, 혼자서는 뭘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이 고기를 먹지 않고 살 수 있을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이렇게는 살 수가 없다고 자신의 2층 방에서 창문으로 가진 모든 물건을 던져버리고 당일 비행기 표를 끊어 외국으로 떠났다는 친구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아니 TV를 길에다 던지면 그건 누가 치워? 인생을 다 던져 버릴 자신도 없었지만, 인육 먹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어딘가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그 친구도 그랬는지 몇 년을 떠돌다 다시 돌아왔고. 냉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참 쉬운 일이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몸도 망치고 정신도 망치고 죽느니만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즈음에는(가공육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지정한 1급 발암물질, 적색육은 2A급 발암물질이다) 대안적인 삶에 대해 가르쳐주는 데 귀를 기울여보기도 했다. 인육이 어떻게 전 지구적으로 퍼져있는지, 여기에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 그래서 새로운 대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열심히 읽어서 배웠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다들 사는 것에 지쳐서 믿고 의지할 대안을 찾고 있었다. 인육을 먹는다는 건 분명히 좋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줄이거나 참거나 아예 끊어야 한다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르게 살려고 나름의 노력을 했으나... 그때는 몰랐다. 아무리 좋은 일이고 훌륭한 대안이더라도 누가 가르쳐줘서 머리로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나는 어느 순간 좋은 삶을 알고 실천하는 훌륭한 젊은이가 되어서 윗사람에게 가르침을 받고, 또 남에게 그걸 잘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많이 알면 아는 만큼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남도 속이는 이중 삼중의 기만. 돌이켜보면 정말 변했던 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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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VEGAN 초록의 동산과 나무가 자리한 가운데, 왼쪽부터 오리, 돼지, 사람, 소의 머리가 나란히 한곳을 보고 있다. 사람 머리 위에 앉은 닭 또한 같은 곳을 바라본다. ⓒ다이애나랩
인육은 정육점에서 파는 고깃덩어리만 아니라 감자칩 양념에도, 냉면 육수에도, 미국산 유기농 토마토 케첩에도, 슈퍼마켓마다 산처럼 쌓인 저탄소 딸기와 한겨울에도 초록인 상추에도 조금씩 들어있어서 완벽하게 피해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동네 가장 싼 빵집에서 하나에 이천원 하는, 얇은 고기 패티가 든 버거를 사려고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유일한 하루 한 끼인 사람도 있는데, 그 고기가 어떤 고기인지 아느냐고 비닐하우스에서 살던 외국인이- 라고 가까이 가서 속삭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나쁜 거니까 먹지 말고 오천 원짜리 샐러드를 사 먹으라고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나. 그리고 샐러드라고 인육이 들어있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빠져나갈 틈 없이 촘촘한 자본주의의 그물 안에서는 뭘 하기만 해도 인육과 관련된 일이었다. 완벽하게 인육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 그럼 어떡하지.
어느 날 결혼식 피로연에 갔다가 갈비찜 앞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다. “고기 안 드시죠?” 묻는 사람의 접시에는 갈비찜 두어 개가 이미 올라 있었다. 그때 나는 무슨 마음이었는지, 아니라고 잘 먹는다고 답했다. 고개를 갸웃하는 상대방 앞에서 갈비찜을 접시에 올렸다. 그리고 먹었다. 그게 어떤 고기인지 알면서도, 뭐랄까 나는 전쟁터에서 자기 발을 잘라 먹어가며 버텼다는 어느 군인 이야기를 떠올렸던 것 같다. 살려면 이 정도는 할 수 있고, 먹든 아니든 결과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그게 사실은 생존과 아무 상관이 없고, 오히려 생을 갉아먹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복잡한 마음으로 피로연장을 나오던 길에 만난 다른 하객이 나에게 인사를 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기는 고기 딱 한 조각에 맥주 한 병밖에 먹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장애인 시설에서 아주 오래 살다가 자립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신랑신부가 음식값을 많이 낼까 봐 일부러 조금밖에 먹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도 뷔페가 뭔지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아니라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내야 할 값은 정해져 있는 시스템이라고 열심히 그가 모르는 사회의 룰에 대해 또 열심히 설명을 하다가 말문이 막혔다. “그런 게 있었어? 나는 몰랐네. 그럼 그 값은 누가 내?” 그러게, 누가 내지? 누군가 죽어서 나온 걸, 누가 먹고 누가 갚지? 갚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나는 그 뒤로도 한동안 인육 든 걸 먹으면서 지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걸 할 수 없게 되었다. 의지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게 되었다. 길을 걷다 넘어졌는데 다시는 걸을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이유는 잘 모른다. 할 수 있었던 일을 갑자기 할 수 없게 되는 경험은 너무 드문 것이라서. 온갖 우주의 우연이 겹치고 쌓이던 중에 어쩌다가 그런 일이 일어난 것 같다. 언제까지 버틸지 알 수 없게 금이 간 유리컵이 한순간에 스스로 부서진 것처럼. 무수히 많은 관계들의 순간적인 교차점이 어느 순간 휙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튕겨져 나간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무언가 일어났다.
인육 든 걸 100% 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알고는 못 먹는다. 이미 많이 먹어왔고, 지금도 알게 모르게 먹고 있으니까, 열심히 노력하면 지금보다 좀 더 먹어볼 수도 있을 것도 같지만... 웬만해서는 피하고 싶다. 할 수 없게 되어서 기쁘다기보다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다. 아직 먹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어제 너무 배가 고파서 우동을 한 그릇 먹었다) 왜 여태 이걸 할 수 있는 것인지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복싱을 배우러 갔다가 자기를 있는 힘껏 쳐보라는 코치의 말에 뒤돌아 나오기도 했다. 가득 차서 넘칠 것 같던 감정이 어느 순간 없던 게 되어버렸다.
도래할 일을 미리 기획하거나 만들어낼 수는 없으니까, 누구에게 이렇게 하라고 권할 수도 가르쳐 줄 수도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뭔가를 할 수 없게 되는 경험이 가끔은 일어나기도 한다는 거다. 인육을 완벽히 먹지 않으며 살기가 불가능한 세계에서, 그렇지만 절망에 빠지지 않고 희망에 기대지도 않고,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일들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상상해보는 것. 혼돈 속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실히 가리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99.9999%의 사람들이 우우 몰려가는 저 방향만은 아니라고 믿어보는 것.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일이 언젠가는 더 많아질 것이라고 기대해 보는 것. 인육을 완전히 먹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새해는 소의 해라고 하니까 소를 먹지 못하는 몸이 되는 순간이 오기를 기대해보는 것은 어떨까. 올해는 모두에게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이 생기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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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

유선
노들장애인야학 낮수업 교사이지만 한 번도 교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치기도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비장애인 교사의 권위에 대해 생각한다. 인포숍카페별꼴의 매니저 7인 중 1명이며, 3명으로 구성된 다이애나랩에서 33.3%의 일을 맡고 있다. 아기를 낳고 커밍아웃이 어려워진 팬섹슈얼, 비건, 고양이 추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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