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유예되는 삶들에 관하여

최유경_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제196호

2021.03.11

청소년일 때 나는 내 나이가 자주 부끄러웠다. 술담배를 사지 못하고, 출입할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제였다. 나는 내가 출입할 수 있는 공간에서도, 불법이 아닌 일에서도 떳떳하지 못했다. 언제쯤 상대방이 나이를 물을지 조마조마했고, 미용실에서 대학생이냐는 물음에 알지도 못하는 학과까지 지어냈으며, 내가 비청소년인 것으로 어림짐작하는 타인의 착각을 즐길 때도 있었다. 척 봐도 나이가 있어 보이는 이들이 많은 공간에 갈 때면 최대한 짙은 화장과 어른스러운 옷차림을 갑옷처럼 둘렀다.

나는 왜 그랬을까? 그저 살아온 세월을 헤는 것은 불과한 나이는 왜 부끄럽고, 심지어, ‘언제 들킬지 모르는’ 것이 되었을까?
그러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회는 아동청소년을 어떤 존재로 대우하고 있는가? 아동청소년은 성인과 동등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부분의 독자는 생각할 것이다. 판단능력이 없고, 미숙한데다가, 덜 자란 아동청소년이 성인과 동등한 존재일 수는 없다고. 그리고 그 대부분의 독자 역시 청소년기를 거치며 한 번쯤 “어른이 되면, 커서, 대학에 가서 하면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아동청소년은 당장 무언가를 할 수 없을까? 그들 역시 각자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을텐데 말이다. 왜 ‘성년’의 현재와 ‘미성년’의 현재는 다른 취급을 받을까? 왜 삶에서 맞닥뜨린 위협과 차별에, 부당한 대우에 맞서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을까? 실제로 아동청소년의 삶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은 때로는 너무나 사소하고, 혹은 ‘어른이 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유예되고는 한다. 오로지 대학에 가기 위한 잔인한 경쟁 위주의 입시 과정은 물론이고, 생활패턴, 개인의 욕구, 마음과 감정까지 쉽게 무시되거나 천편일률적으로 부모나 교사, 보호자에 의해 통제된다. 아직 성년이 되지 못했다는 뜻의 ‘미성년자’라는 단어가 상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사실, 아동청소년은 사회에서 보호가 아닌 차별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혹자는 뭘 그렇게까지 말하냐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차별이 아니라 미성숙한 존재를 보호하는 것뿐이라고. 그렇다면 SNS에 나올법한 예쁜 가게와 카페들에 ‘노키즈존’이라는 명패는 왜 붙게 되었을까. 너무 시끄럽고, 통제할 수 없어서? 그런 곳에 아이를 데려오는 여성 보호자가 맘충이라서? 그렇다기보다는.. 아동이 사회에서 가장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존재여서가 아닐까? 아무리 가게에서 진상을 부리는 아저씨들이 많아도 ‘노아재존’이라는 명패는 붙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노키즈존은 그 자체로 사회에 만연한 어린 나이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다.
게다가 어린 사람을 추방하는 사회에서 추구하는 가치인 ‘어른다움’이 늘 어린 사람에게만 요구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른’에게 ‘어른답게 행동하지 못했다는’ 비난은 더욱 쉽게 날아들고는 한다. 페미니즘이 ‘여성다움’에 대한 강요가 남성에게 끼치는 영향인 ‘맨박스’에 대해 논의하듯, 아동청소년 인권 역시 ‘어른다움’이 어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장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서로에게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는 비난을 쉽게 주고받는다. 이러한 비난은 어린애처럼 감정적이고, 미성숙하고, 책임감 없이 굴지 말라는 뜻을 함의한다. 하지만 어느 사람이 언제나 이성적이고, 모든 것을 책임지며, 성숙하기만 할까? 이것은 “어린애”만의 특징이라기보단 우리 모두가 언제나 가질 수 있는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속성들을 타자화하는 것에 가깝다. 이러한 타자화에서 자유로워진다면 비청소년 역시 ‘어른다움’이라는 박스 안에서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어린사람은 아래 사람이 아니다
청소년 인권운동연대 캠페인 “어린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다”(사진_화면캡쳐)
https://yhrjieum.kr/ageismcampaign
실제로 나는 시간이 흘러 비청소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이를 밝히는 일이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20대 초반의 여성인 내게 ‘어린 사람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여전히, 그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금 서툴고, 비이성적이고, 미숙하면 좀 어떤가? 우리 모두는 언제나 그러한 순간들 사이 삐끗삐끗하며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 읽고도, 아동청소년에 대한 일상 속 차별에 대해 여전히 모르겠다면 사소한 실천부터 이어가보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이를 묻지 말자. 나이로 상대를 판단하고자 하는 습관일 수 있다. 그리고 나이를 알게 되었다면, 상대가 나보다 어리더라도 상호 동의 전에는 반말을 사용하지 말자. 나이가 어린 것이 곧 내가 편하게, 혹은 쉽게 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아동청소년에게 쉽게 귀엽다거나, 기특하다고 말하지 말자. 단순한 감정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손윗사람에게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금방 표현의 어색함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일상 속에서 이 정도만 지켜도 어린 이에 대한 ‘존중’을 차차 넓혀나갈 수 있을 것이다.
동료이자 청소년 운동 단체인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은 어린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자는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다' 캠페인을 활발하게 펼쳐나가고 있다. 명쾌한 캠페인의 구호처럼, 어린 사람을 아랫사람처럼 대하고 있는 일상 속 우리의 당연한 태도를 점검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최유경

최유경
안녕하세요,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의 유경입니다. 위티는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스쿨미투 운동을 기점으로 창립하게 된 청소년 페미니즘 운동 단체입니다. 저는 위티의 창립과 함께 공동대표와 상근 활동가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비상근 활동가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dbrud_06@naver.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