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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즐겁게 함께

변재원

210호

2021.11.25

2년 전 예상치 않았던 계기로 장애인권운동에 입문한 뒤 가장 놀랍게 느껴졌던 장면이 있다. 장애인 당사자보다 더 장애인 차별에 민감하게 저항하는 여러 비장애인 활동가들을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아니 대체 왜, 당장 장애가 없는 이들이 장애인 차별과 불의에 대해 더 열정적으로 저항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앞섰다. 당장 나조차 전 생애에 걸쳐 장애인으로 살아가고, 모든 영역에서의 차별과 모욕을 겪었음에도 그들만큼의 분노나 세상을 바꿀 열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직접적인 차별 대상인 나 자신이 무감각한데, 간접적으로 차별을 마주하는 이들이 훨씬 예민하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 생경한 느낌은 나만 느꼈던 감정이 아니다. 인권운동에 몰입한 비장애인 활동가들의 모습을 오랜 시간 마주하며 익숙해진 활동가들 외에, 이제 막 활동에 입문하거나 직접 장애인권운동 등을 하지 않지만, 주변에서 차별에 저항하는 비장애인의 모습을 목격하는 장애 당사자들 역시 “장애인인 자신보다 장애해방에 더 적극적인 비장애인”을 보고 당황하는 경우가 적잖다.

당장 엊그제에 우연히 한 장애인을 만났다. 그 또한 나와 같이 전 생애에 걸쳐 장애를 갖고 있었음에도, 최근에야 장애인권운동과 관련한 캠페인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자신보다 더 적극적인 비장애인을 보며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내게 털어놓았다. 자신과 함께 활동하는 비장애인 친구가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과정을 체력적으로 따라가기가 어렵고, 동시에 자신은 평생 장애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때때로 장애인권운동 뿐만 아니라 다른 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도 갖고 있는데, 자신보다 더 열성적으로 몰입하는 동료를 보면 알 수 없는 감정과 왠지 모를 부끄러움 등 복잡한 심경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진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그것은 장애인인 자기 자신보다 더 열정적으로 자신이 처한 문제에 저항하는 비장애인 동료를 마주하며 발생하는 고민이었다.

나는 고민하는 이에게 ‘그는 그게 좋아서 하는 것이니, 당신도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게 맞다’라고 말했다. 적어도 장판에서 지켜본 바, 비장애인 활동가들은 정말 그게 좋아서 하는 거다. ‘장애인-되기’에 몰입한 것일지, ‘투쟁의 성취’에 몰입한 것일지, 제3의 어떤 요인에 몰입한 것일지 정확하게 내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당신을 비롯한 260만 장애인의 미래를 지키겠다는 국가적 책임감을 갖고 그 활동을 수행한다기보다는(한 끗 차이로 장애인에 대한 시혜와 동정이겠지), 그냥 지하철 연착 투쟁 속에서 시민들에게 욕을 먹고 머리도 뜯길지언정 왜인지 그 자체가 좋아서, 행복해서 한다고 보아야 동료에 대한 존중과 나에 대한 존중이 함께 이루어진다. 장애인 돕는 비장애인이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는 왜 그러지 못하는가, 라는 생각에 빠지면 장애 당사자들은 장애인의 삶 밖의 영역을 상상할 수 없게 되고, 스스로도 비장애인의 보폭을 쫓지 못해 크게 움츠러들기도 한다.

자신보다 더 적극적이고 열심히 연대하는 이들을 보며, 부끄러워하거나 방향과 속도 조절 자체를 고민하는 복잡한 문제 앞에서, 쉬운 해답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다. 문화예술노동자인 고(故) 황현 동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현장에서 신나게 불렀던 <천천히 즐겁게 함께>라는 노래 제목이다. 누군가는 해답이라고 느끼기에 너무 뻔하고, 전혀 도움 되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저 노래 가사일 뿐이라며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천천히 즐겁게 함께> 노랫말에 사회 변화를 꿈꾸는 이들이 고민하는 삶의 모순과 나아가야 할 방향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의 나를 누군가와 비교하지 말고, 그저 천천히 즐겁게 함께 가는 길을 모색하자. 비장애인이 누리는 일상에 참여하기를 꿈꾸는 장애인도, 장애인이 처한 차별을 격렬히 마주하는 비장애인도 둘 다 모두 “천천히, 즐겁게, 함께” 가자. 필요 이상의 죄책감이나 부채의식을 느끼지 말자. 마음을 너무 짓누르다 보면 아예 떠나게 되니까.

3년 넘는 암투병 끝에 지난 10월, 세상을 떠난 고(故) 황현 동지를 추모하며, 또 자신의 정체성과 가야 할 길의 방향과 속도를 망설이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늘 “천천히, 즐겁게, 함께” 가자고 다짐하며, 노래 가사와 함께 이야기를 마친다.


<천천히 즐겁게 함께>

앞만 쳐다보고 너무 서둘러서 왔나봐
지쳐진 사람 혹시나 없는지 살펴보고
잠깐 쉬었다 가 또랑 냇가에 발 담그며
말 없던 친구 함께 불러 얘기도 들어보자
천천히 즐겁게 함께 힘들고 지칠수록 그렇게
세상이 우리를 거세게 떠밀어도 우린 절대 밀려나지 마
천천히 즐겁게 함께 마음이 급할수록 그렇게
새벽의 태양은 빨갛게 뜬다 천천히 즐겁게 함께

천천히 즐겁게 함께 힘들고 지칠수록 그렇게
세상이 우리를 거세게 떠밀어도 우린 절대 밀려나지 마
천천히 즐겁게 함께 마음이 급할수록 그렇게
새벽의 태양은 빨갛게 뜬다 천천히 즐겁게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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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원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활동하는 초보 활동가. 투쟁의 현장에서는 활동가들에게 먹물 같다고, 인터뷰 현장에서는 시민들에게 말이 험하다고 놀림당하기 일쑤. 뒤틀린 몸과 말을 끝까지 지키는 활동가가 되기를 소박한 목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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