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계시고 싶으세요
[큐투큐] 시동(始動)
김현지
제241호
2023.09.07
큐투큐(Cue-to-cue)는 극장에서 이뤄지는 리허설의 일종으로, 큐와 큐를 중심으로 연극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맞춰보는 작업입니다. 객석 오픈 시점, 조명 변화, 음향 타이밍, 무대 전환 포인트 등 모든 지점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큐로 존재하며, 공연 한 편은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큐로 구성됩니다. 큐투큐는 연극 제작 과정에서 꼭 거쳐야 하는 작업으로, 여기에는 프로덕션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합니다. 누군가는 큐를 지시하고, 누군가는 고 버튼을 누르며, 누군가는 타이밍에 맞춰 등장하고 흩어집니다. 웹진 연극in에서는 극장 리허설을 넘어, 연극 작업 전 과정에 존재하는 수많은 큐와 큐 속에 흐르는 각자의 관점과 생각을 들어보려 합니다. 하나의 큐가 주제로 던져지고,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필자들이 그 큐에 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예정입니다.
단번에 설명하기 어려운 일을 한다는 것에는 서글픈 데가 있다. 미국 시트콤 <프렌즈>의 어떤 에피소드에서 친구들은 서로에 대한 퀴즈를 맞추는 게임을 한다.
모니카와 레이첼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쯤 로스가 간단한 문제를 낸다.
“챈들러 빙의 직업은?” 두 사람은 무척 당황하면서 “그러니까 숫자에 대한 건데… 그걸 처리하는… 서류가방 들고 다니고…” 방청객들이 왁자하게 웃는다.
시간이 전부 흐르고, 챈들러는 게임을 이겼는데도 어쩐지 서글퍼진다. 접근성 매니저라는 이름으로 일을 할 때면 이 직무가 어떤 이들에게는 어쩌면 그런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달 극장 사무실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내게로 잘못 걸려온 문의 전화를 받고 한참이나 대답을 하다가 그런데 하시는 일이 정확히 뭐냐는 말을 듣고서는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접근성에 대한 건데… 그걸 처리하는… 명찰 매고 다니고…
다행인 것은 애당초 드라마터그로 일할 적에도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느냐고 묻는 무구한 얼굴들을 곧잘 만나왔기 때문에 대단히 서글프지는 않다는 점이다.
(혹은 서글픔에 익숙해졌을는지도…) 그러므로 자조만을 하려던 것은 아니고, 아마도 누군가의 접근을 고민하는 극장에 가본 일이 없어서 접근성 매니저가
뭘 하는 사람인지 물어야 했던 관객 분처럼, 그런 걸 애써 물어보는 일에서 출발하는 것이 내게도 어느 정도 효용이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일하자는 제안을 받을 적이면 나 역시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부터 묻는다. 정말 몰라서라기보다는 이 일을 두고 물어야 할 것들이 여전히 많아서 그렇다.
하물며 이 일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조차 질문해야 한다. 배리어프리인지, 무장애인지, 접근성인지, 접근가능성인지,
또 그것을 제공할 건지, 지원할 건지, 진행할 건지, 제작할 건지, 향상할 건지 묻는다.
연극이 고른 말이 곧 그 연극의 입장이고 그 극장의 질서다. 그러니 서비스를 해준다는 식의 재수없는 어휘는 삼가고, 아무런 장벽도 없을 것처럼 약속하는 안일한 낙관도 피하고,
하지만 이미 쓰이는 표현의 보편성도 어느 정도 고려하고…
그러느라 목적어와 술어가 희한하게 조응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물론 이 과정의 필요에 동의하지 못하는 기관 담당자와 싸우면서,
이따금 이기고 줄곧 지면서… 아, 역시 단번에 설명하기 어려운 일을 한다는 것에는…
만나고 싶어서 만나기
물론 접근성 매니저의 직무 영역과 작업 방식이 더 논의되고, 그래서 특정한 형태의 과업이 될 만큼 오래도록 시도된다면, 좀 다르게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터그라는 자리가 가르쳐준 게 있다면 많이 묻고 자주 의심하면서 일하는 것도 좋다는 사실 같다.
그러므로 투정만을 하려던 것은 아니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래서 누구와 어떻게 만나길 바라는지 확인하는 게 나는 좋다고 말하려고 했다.
바람의 내용이 소상할수록 해야 할 일도 명료해진다. 그리고 나면 어디서부터 내 일이고 또 아닐지를 의논한다. 그리고 나면 질문을 옮겨서, 또는 세목으로 늘려서, 다른 스태프들께도 묻는다.
물론 불분명한 것들이 대개 답으로 돌아오는데, 그러리란 걸 알면서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대하는지 물으려는 것은 때로는 그 자세한 기대만이 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만나길 원해서 만나는 것과 만나야 해서 만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만나려는 바람이 있어야 접근하려는 이도 있다.
만나고 싶다면 어떻게 만날지도 궁리할 수 있다.
작년 봄에 올라간 〈소극장판-타지〉는 규범과 규격이 허락하지 않아서 자꾸만 어긋나고 탈락되는 ‘결격’의 몸들이 극장 안으로, 연극 안으로 들어오길 바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공연을 시작하고서도 객석 출입구를 잠시간 열어두었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를 두고 돌아가느라, 화장실에 들르느라, 점자블록 없이 미끈한 길을 걷느라,
뒤늦게 배차된 장애인 콜택시를 잡아타느라 공연에 늦을지 모를 이들과도 여전히 만나고 싶어서 그랬다.
규칙을 따라 제때 시작하는 것보다 규칙에 자기를 맞춰야 하는 이들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해서. 결국 기대의 내용이 연극의 모습을 결정한다.
그러니 이 일은 “누가 어디까지 얼마큼 접근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가늠하려는 정치”인 만큼, 동시에 “누가 왜 어디로 얼마큼 접근하길 원하는지 그 염원의 표정을 되묻는 질문”이다1) .
접근하려는 사람의 기대와 만나려는 사람의 바람을 단지 연결하는 일이다.
만나야 해서 만나기
한편으로, 바라는 마음을 갖는 만큼 의무와 필요를 생각하는 것 역시 여전히 긴급하다. 한 번은 새로 문을 연 극장에서 개관 페스티벌을 하는 동안 접근성 매니저로 일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여러 장르의 여러 단체가 함께하는 행사였지만, 정작 장애인 관객을 모시려고 준비한 공연은 하나뿐이어서 무슨 일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 좀 의문스럽기도 했다.
만나야 할 의무를 감지했던 제작 주체와 만나길 기대하지 않은 예술 단체들 사이에서 무척 엉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만나길 바라든지 말든지 장애인은 있고, 극장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런데 장애를 경험하는 사람과 같이 일하면 그런 필요들을 내가 애써 논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 역시 장애 당사자와 일하면서 그의 접근을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같이 있으면 자연히 엘리베이터가 있는 연습실을 구하고(드물고 비싸다…),
거기 경사로를 놓고, 누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설명하고,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통역하게 된다.
그 사람의 있음이 우리가 있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출연진 중에 두 명의 휠체어 이용자가 있었던 <틴에이지 딕>을 만들면서는 일일이 요청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일을 나눠 가졌다. 연습이 끝날 쯤이면 누군가 장콜을 부른다.
누군가 식사를 덜고 포크와 빨대를 꺼내고, 누군가 연습실 문 앞에 놓인 신발들을 옆으로 치운다.
연습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대 안팎으로도 경사로가 놓인다. 그렇게 있어야 하니까, 그렇게 있을 수 있게 된다.
그래도 모르겠으니까 다시 묻기
그리고 나면 이제 관객의 있음을 상상한다. 어떤 몸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들어와 어떻게 듣고 말해서 표를 찾고 싶을지 예상하기.
어떻게 화장실을 다녀와서 객석 어디에 앉아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싶을지 궁금해하기. 극장을 나가야 한다면 그 이유와 방법을 어떻게 전해 듣고 싶을지, 어떻게 떠나고 싶을지 예측하기.
그런 말들을 나와 동료들께 건네며 답처럼 보이는 것, 적어도 답이라고 믿자고 동의한 것을 약속해나간다.
리허설을 지켜보면서 약속된 번역과 해설이 적절한지, 더 부연되어야 하는지, 덜 설명되어야 하는지, 다르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놓친 구석이 없는지, 특정 좌석에서 들리지 않거나 가려지지는 않는지 묻는다.
그걸 전부 동시에 질문하기도 한다(지독한 멀티태스킹이다…). 대본을 넘기며 고민의 종류에 따라 음영을 더한다.
가령 배우가 자막과 다르게 말한 부분을 노란색으로, 수어통역사를 비추는 조명이 어두운 것 같으면 분홍색으로, 소리만 듣고서는 관객들이 왜 웃는지 불분명한 상황이 만들어지면 초록색으로,
그 밖의 의심이나 염려는 밑줄과 메모로… 그리고서는 무지개처럼 색칠된 대본을 들고 연출부, 배우, 디자이너, 오퍼레이터, 해설사, 통역사, 프로듀서 들을 만나기 위해
순회하듯이 고민을 나누고, 제안을 듣고, 또 건넨다.
당사자를 모시고 의견을 구하는 리허설이라면 그들과도 의논한다. 모르겠다면 다시 질문하고, 막막하다면 방법까지 여쭌다.
잘 묻는 것이 의미 있다는 확신은 지난여름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며 얻었다. 거기서 나는 접근성 매니저는 아니었지만, 매니저를 고용하는 대신 모두가 그 일을 나눠 가지며 일했다.
장면을 만드는 동시에 그 장면을 어떻게 번역할지도 서로에게 물었다. 농인 배우의 말이 청인 수어통역사의 말을 거쳐 오가야 했기 때문에 뜻이 잘 전달되었는지 자주 확인했다.
모니터링을 위해서도 모쪼록 여러 의견을 물었다. 그날 저녁 미아리고개예술극장 계단 여기저기에 쪼그려 앉아 건넨 질문들로 연극을 했다.
자꾸 물으려는 것은 답을 찾기 위함보다도 답이 없다는 게 민망하고 불안해서 같다.
다른 이들이 다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할 때면 그런 게 어디 있느냐며 편을 들게 되는데, 실은 다 하지 못해서 늘 멋쩍고 조급하다.
여전히 극장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이들이 있으리라는 확신과, 더 많이 알고 더 잘해온 이들이 있을 텐데도 내가 담당해야 할 몫을 마주할 때의 무서움,
매번 같은 싸움을 해야 하나 싶다가도 그 싸움을 매일 그것도 오랜 시간 겪어온 이들에 대한 존경과, 그러니 더 잘 만나고 싶다는 기대… 그런 마음들 사이에서 피로하지만 무척 떨리는 채로 서 있다.
그 진동이 말해줄 것들을 바라고 기다리면서.
[사진: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