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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동

[큐투큐] 시동(始動)

김미란

제245호

2023.11.09

큐투큐(Cue-to-cue)는 극장에서 이뤄지는 리허설의 일종으로, 큐와 큐를 중심으로 연극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맞춰보는 작업입니다. 객석 오픈 시점, 조명 변화, 음향 타이밍, 무대 전환 포인트 등 모든 지점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큐로 존재하며, 공연 한 편은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큐로 구성됩니다. 큐투큐는 연극 제작 과정에서 꼭 거쳐야 하는 작업으로, 여기에는 프로덕션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합니다. 누군가는 큐를 지시하고, 누군가는 고 버튼을 누르며, 누군가는 타이밍에 맞춰 등장하고 흩어집니다. 웹진 연극in에서는 극장 리허설을 넘어, 연극 작업 전 과정에 존재하는 수많은 큐와 큐 속에 흐르는 각자의 관점과 생각을 들어보려 합니다. 하나의 큐가 주제로 던져지고,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필자들이 그 큐에 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예정입니다.

나는 작업에 들어가기 앞서 마주한 단어의 의미를 먼저 찾아본다.
‘시동(始動)’.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함. 또는 그렇게 되게 함.

<엄마배우수업>의 리허설을 촬영한 사진이다. 
      회갈색 벽돌로 둘러싸인 무대 위에 세 사람이 각각 보면대를 앞에 두고 앉아 있다. 
      세 개의 보면대에는 각각 미라니슬랍스키, 헬프미토마토, 크레이지파파봇이라는 배역 이름이 적혀있다. 
      무대의 앞쪽 오른편에는 어린이용 장난감들이 놓여있다. 사진의 왼쪽 구석에 조명콘솔과 모니터가 일부 드러나 있다.
<엄마배우수업> 리허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지난 2023년 9월, 신촌문화발전소 창작과정지원 <배우작가 작가배우 낭독공연: 날 데려가 줘_엄마배우수업>을 쓰고 연기해서였다. 지독한 불안 덕분에 결혼과 출산, 육아의 과정에도 경력단절을 하지 않고 예술노동을 이어왔다. 어떻게 보면 더욱 열심히 다양한 일을 도모해왔던 것 같다. 쉬었던 순간은 임신 7개월 때부터 6개월 정도의 기간이 유일했다. 그 역시 내가 잊힐까 봐, 혹은 일을 하지 못할까 봐 오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그것도 모자라서 주체적으로 일을 벌여왔기에 가능했다.
이런 흐름으로 보았을 때, 두 가지의 시동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첫 번째로는 배우의 역할을 해오다가 의문을 갖게 된 순간이다.

‘나는 왜 연극을 하는 것일까?’

정말 뻔하디뻔한 질문이지만, 이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는 쭉 달려만 왔다. 의심은 나에 대한 배반이었다. 좋은 배우가 되어보겠다며 목표를 세우고 달렸다. 출산과 육아는 한정된 시간이라는 브레이크로 나를 잡아 세웠다. 하지만 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달라진 것은, 나의 삶의 가치 중에서 매 순간을 새롭게 발견하는 ‘아이’가 생겼고, 양육의 자발적이자 강제적인 의무가 생긴 것이다. 하루에 주어진 시간은 24시간.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위해 씻기고, 병원에 가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의 낮잠과 밤잠을 재우고 나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노동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굳이 그 일을 ‘김미란’이라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이유 말이다.
공동창작을 수년간 해오던 중이었고, 개인의 생각이 결합하여 하나의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매 순간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찾아내야만 했다. 아니라면 활동을 멈추게 될 여지는 차고 넘쳤다. 그때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작품 속의 배우로 존재했을 때와 다르게 내가 연극이라는 공연예술로 하고 싶은 것을 찾길 바랐다.
첫 극작 수업은 작품을 읽고, 무조건 작품을 써서 낭독하는 거였다. 막막했다. 그때는 막연히 아이를 출산했던 순간과 세월호 2주기였던 그날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감각들을 쓰고자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머니와 1살짜리 딸과 외할머니댁인 울산에 가게 되었다. 기차를 타고 갔던 3대 모녀의 여행 속에 오래 묵은, 혹은 관계망 안에서 많은 것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특히 미리 찍어두신 외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은 나라는 사람을 배우에서 창작자, 작가, 연출가로 처음 움직이기 시작하게 했다. 어릴 적에 뵙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마주한 외할아버지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사진을 보는 순간 청년 시절의 한 남자가 열심히 뛰면서 인생을 살아가다가 멈춰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는 처음 쓰고, 연출했던 <챠큭, 챠큭챠큭>으로, 2018년 공연되었다. 그 이후부터 ‘죽음’, ‘상실’은 예술가로 살아가는 나의 주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지향하고자 하는 가치는 오히려 반대편에 있었다. 삶을 소중하게 잘 살아가기 위해 마주해야 할 과업을 예술작업으로 풀어나가는 것이다.

<공유 벙커로 가는 길>의 커튼콜 사진. 
      골판지 상자 재질의 바닥이 대문자 T 모양으로 놓여있고, T의 가로획에 해당하는 부분에 여섯 명의 배우가 서로 손을 맞잡아 머리 위로 한껏 올리고 관객들에게 인사한다. 
      왼쪽에서 세 번째에 핑크색 옷을 입은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있다. 
      가장 왼편에 선 인물의 뒤로 유아차가 하나 보이고, T자형 무대 뒤편 오른쪽 한 단 높은 곳에는 나무로 된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의자의 다리 네 개 중 하나가 반쯤 잘린 채 세워져 있는 모습이다.
아이와 함께했던 <공유 벙커로 가는 길>

두 번째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이다. 나는 배우, 연출, 작가, 기획, 강사 등 다양한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것은 엄마예술가이다. 유일하게 미뤄두었던 것은 나에게 가장 익숙했던 배우의 역할이었다. 예술가로 생존하기 위해, 가정의 불화를 최소화하기 위해 나는 스스로 판을 짜기 시작했다. 즉, 내가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배우라는 역할로 다시 그 속에 들어가는 일은 버겁기 때문에 항상 포기하거나 미루는 방향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많은 것들이 버거워지는 시기에 다시 한번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예술노동을 지속할 것인가? 왜? 무엇 때문에? 그럴 가치와 의미가 나와 타인에게 있는가?’

그렇게 또다시 시작된 고민과 사유의 칼날은 나를 향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모든 것이 멈춰도 괜찮을 것 같은 무기력 속에서 참여하게 된 배우들을 위한 글쓰기 워크숍. 고유한 나의 글들이 배우인 나를 통해 발화될 기회였다. 정진새 작가님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배우들을 이끌어갔고, 각자의 개성이 담겨있는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글쓰기를 위해 주어진 여러 가지의 과제 중에서 ‘배우수업’을 모방하여 자신의 연기 메소드를 쓰는 것이 있었다. 고민하다가 엄마배우, 엄마예술가로서 내가 처한 환경과 고민, 지속을 위한 방법을 담은 내용으로 써보았다. 6명의 아이를 길러내면서도 최고의 자리에 있는 미라니슬랍스키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지향하고 싶은 예술가이며, 극 중 헬프미 토마토는 영유아 시절에 육아를 담당하며 지속을 고민하는 나의 모습이었다. 결국엔 재밌게 썼지만, 쓰기로 결정하고 시동을 걸기까지는 많은 고민이 있었다.
“사실 저는 이 일을 그만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잘 쓸 수 있을지 고민이 돼요.”
많은 부분에서 지쳐있었던 상태라 극작을 위한 개별 멘토링을 할 때, 솔직한 심정과 상태를 공유했다. ‘그만두더라도 쓰고 그만두라’는 지지가 담긴 말에 용기가 생겼다. 그냥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 소설이 50페이지로 완성되었다. 신나게 써놓고 보니 내친김에 낭독공연을 해보자고 겁도 없이 덤벼들었고, 낭독을 위해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을 하며, 직접 배우로 낭독까지 했다. 결국에는 내가 쓴 글을 내가 발화하는 데 얼떨결에 성공한 셈이다. 그리고 낭독공연 말미에 2023년 12월 12일 12시 낭독파티를 진행하여 사람들과 만날 약속까지 잡아버렸다. 나에게 얼마 없는 재주 중에서 일을 만들고, 확장하는 부분이 있다. 시동이 한 번 딱! 걸리면 미친 듯이 달려간다. 나에게 그 시동의 조건은, 예술가인 나에게 의미가 있고, 타인과 공유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느낄 때이다.
내가 창작자로 시동이 걸리는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복잡다단한 하루를 마치고 잠시 공백의 시간에 들려오는 소리와 사유, 아이가 불시에 건네 오는 순수한 질문, 사회 구성원으로서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의문을 마주하는 순간, 인상적인 것을 담아두려고 사진을 찍는 순간 등 나에게 감응을 일으킬 때 옅은 시동이 부릉부릉 걸린다. 나를 나로 살게 하는 순간들, 지속을 고민하는 매 순간.

검은 벽에 검은 커튼이 걸려 있는 극장에 붉은 조명을 배경으로 김미란 배우와 그의 아이가 있다. 
      검은색 반소매 재킷과 반바지를 입은 김미란 배우가 카메라를 보며 웃음 짓고, 그의 허리에 손을 감고 다리에 두 다리를 감아 매달린 아이가 그를 바라본다. 
      그들의 뒤편으로 등받이가 있는 빈 좌식 의자와 입식 의자 여럿이 있고, 의자에 앉은 스태프와 서 있는 스태프가 있다.
엄마예술가와 아이

작년부터 나라는 사람을 ‘예술노동과 가사노동 사이에 있는 예술가’라고 표현한다. 아주 단순한 한 줄이지만 불안정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고,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으면서도 집안일과 아이를 돌보는 것을 잘 해내야 하는 의무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이 가능했던 것은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수 있었고, 가족들의 이해가 어느 정도 있었으며, 아이를 데리고 작업을 하거나 예술인 자녀 돌봄 센터인 반디 돌봄 센터에서 아이를 함께 돌봐주었기 때문이었다.
11월 1일. 그나마 비빌 언덕이었던 반디 돌봄 센터의 위탁운영 기관이었던 서울아가야 사회적 협동조합에서 연락이 왔다.
“2023년 12월 31일 자로 예술인 자녀 돌봄 지원사업의 위탁기간이 종료되어 예봄 센터와 반디 센터의 운영이 종료됩니다. 궁금하신 사항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문의 바랍니다.”
예술노동을 하면서 자괴감이 드는 순간은 꽤나 빈번하다.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그나마 지속을 위해 지원받고 있다고 느끼는 유일한 것이 아이를 반디 돌봄 센터에 보내고 작업할 시간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순간에 사라져버린다고 하더라도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절망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를 되묻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보면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시작할 때 자주 쓰던 말이었지만 요즘에는 잔혹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누군가의 엄마로,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배우로, 누군가의 연출로 작업을 위한 시동을 걸기 전에 꼭 확인한다.
‘내가 이 작업을 할 의미가, 가치가 충분한가?’
마지막으로 나를 창작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시간과 지지를 보내주는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예술가 동료들에게 이 기회를 빌려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또한 배우에서 예술가로 성장하고 지속해왔던 프로젝트 챠큭, 극단 작은신화, 월장석친구들, 배우의 정체성을 즐겁게 고민하는 굴러라동동에게 나의 시동의 윤활유가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언제 멈출지 모르는 시동을 걸어본다. 부릉부릉~

신촌문화발전소의 입구를 배경으로 어른 넷과 아이 하나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웃음 짓는 셀프카메라 사진이다. 
      이들의 뒤편으로 <배우작가 작가배우 낭독공연: 날 데려가 줘>의 포스터가 살짝 드러나 있다.
<엄마배우수업>의 출연진과 가족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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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란

김미란
예술노동과 가사노동 사이에서 육아하며 배우, 연출, 작가, 기획 등의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언제 멈출지 모른다는 불안을 원동력으로 끊임없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상실 #죽음 #사진 #전쟁 등 떠오르는 키워드를 동료들과 나누고 공연을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2010년 극단 작은신화 입단. 2013년 창작집단 너다워서 아름답다 창단, 2020년 프로젝트 챠큭 창단. 현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콘텐츠 개발사업 쇼케이스를 준비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miran777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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