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극장을 기대하며 가득 찬 무대를 바라보는 일
[큐투큐] 시동(始動)
이지혜
제247호
2023.12.07
큐투큐(Cue-to-cue)는 극장에서 이뤄지는 리허설의 일종으로, 큐와 큐를 중심으로 연극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맞춰보는 작업입니다. 객석 오픈 시점, 조명 변화, 음향 타이밍, 무대 전환 포인트 등 모든 지점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큐로 존재하며, 공연 한 편은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큐로 구성됩니다. 큐투큐는 연극 제작 과정에서 꼭 거쳐야 하는 작업으로, 여기에는 프로덕션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합니다. 누군가는 큐를 지시하고, 누군가는 고 버튼을 누르며, 누군가는 타이밍에 맞춰 등장하고 흩어집니다. 웹진 연극in에서는 극장 리허설을 넘어, 연극 작업 전 과정에 존재하는 수많은 큐와 큐 속에 흐르는 각자의 관점과 생각을 들어보려 합니다. 하나의 큐가 주제로 던져지고,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필자들이 그 큐에 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예정입니다.
시동. 시작하는 움직임. 처음의 행동. 어쨌든 ‘시작’을 말하는 단어 앞에서 나에게 ‘처음’이 무엇인지 고민해본다. 처음 프로덕션 섭외 연락을 받은 순간? 무대감독으로서 처음 연습에 참여하는 날? 연습실에 무대 마킹을 하는 날? 처음 극장에 들어가는 날? 처음으로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오는 날? 생각보다 ‘처음’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시작’에 어울릴만한 처음들은 아니라는 점을 또 한 번 깨닫는다.
‘공연 시작하겠습니다.’
수많은 처음들 사이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시작’을 말한다. 무대감독의 주된 일은 공연의 원활한 진행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대감독의 일이 ‘공연의 시간’에만 한정된다는 말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무대감독의 모든 일은 공연의 무탈함을 향해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잘 시작하고 잘 끝내는 것. 그게 이 일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잘 시작하기, 공연의 첫 순간은 무대감독의 말에서 비롯된다. 관객 입장 후 객석 정리가 끝나면, 하우스 매니저로부터 무전이 도착한다. ‘객석 마감했습니다. 공연 시작 가능합니다.’ 하우스 매니저의 무전이 출발 신호라도 되는 듯, 무대감독은 인터컴을 열고 공연을 준비 중인 모든 스태프에게 말한다. “공연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객석은 점점 어두워지고, 진짜 공연의 첫 순간이 시작된다.
공연 진행 중-위험한 상상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감독은 가장 고요한 시간에 들어간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는데 고요해진다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감독으로서의 나의 태도는 고요하고, 대부분 냉정한 편이다. 그러기 위해 노력한다. 무대감독의 자리(SM DESK)에서는 여러 개의 모니터로 공연을 보게 되는데, 크게 일반 카메라와 적외선 카메라로 나뉜다. 극장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무대 상/하수는 물론 객석에 이르기까지 극장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가 촬영한 화면들로 공연을 보는 것이다. 무대감독의 자리에 적외선 카메라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일차적으로는 공연 진행에 필요한 큐(cue) 포인트들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암전이나 어두운 상황에서의 움직임이 잦은 연극의 특성상 무대 위의 준비상태를 확인하기에는 적외선 카메라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업을 하면서 체감하는 적외선 카메라의 필요는 그 이상이다. 배우들이 안전하게 이동했는지, 무대 위의 상황이 조명을 켜도 괜찮은지, 객석에 누군가 불편한 사람은 없는지 등등. 나열하자면 그 이유가 수십, 수백 가지는 될 것이다. 결국 극장 곳곳의 카메라는 드러난 공간과 드러나지 않은 공간 모두를 무대감독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말한다. 언제 어디서 벌어질지 모를 상황에 대비하라고. 늘 이 모든 장면들을 주시하라고 말이다. 물론 카메라가 없는 극장이라고 해서 상황이 다르지는 않다. 무대 백스테이지. 무대를 볼 수 있지만, 객석에서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늘 공연을 주시하는 것이 무대감독이다. 굳이 일어나지 않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을 상상하면서 눈앞의 장면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
2023년, 변화된 움직임
이번 칼럼을 계기로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돌아보면서 시작부터 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턴가 (적어도 나에게는) 무대감독으로서의 행동이 된 몇 가지를 발견했다. 그중에서도 매번 숙제처럼 하고 있는 것이 ‘응급상황 대처 매뉴얼 작성’이다. 사실 브로드웨이처럼 큰 공연 산업 현장에서는 이미 정착되어 있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새삼스레 말하기도 민망하다. 응급상황 대처 매뉴얼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응급상황에 대한 대처 방식을 문서화하고 프로덕션 내부 인원 모두와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내가 대비한 상황이 100%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괜히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한 불안을 공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속해서 무대감독을 하게 된다면, 더 열심히 해나가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 한 명이라도 함께하는 누군가에게 안전한 감각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한편, 2021년 이후 새롭게 부여받은 과제도 있다. 바로 접근성이다. 무대감독이 왜 접근성을 말할까? 싶을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밀접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여러 창작자 사이에서 다리를 놓는 무대감독이야말로 이제 막 창작의 동료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접근성과 가장 먼저 친해져야 한다. 접근성의 세계는 벌어질 수 있는 응급상황만큼이나 넓고 다양하다. 게다가 매우 섬세하게 다가가야 하며, 이전 공연에서의 경험이 절대적인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모두가 배우고 있는 과정이며, 먼저 알게 된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어야 한다. 우리가 더 좋은 동료와 오래 작업할 수 있도록 말이다.
끝을 기대하며, 과정을 바라보는 사람
사실 ‘시동’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지만, 내가 무대감독으로서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은 연극의 끝, 진짜 끝. ‘빈 극장’ 때문이다. 무대감독의 작업 방식이나 범위 등은 누가 하느냐, 누구와 하느냐, 어떤 작품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공연을 위해 무대, 소품, 조명, 음향, 음악, 배우, 관객까지 극장을 가득 채웠던 것들이 하나하나 비워져 가는 것을 온전히 바라본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사라져 가는 연극’이 좋아서 무대감독으로 작업해 왔다. 한 세계로 가득 찼던 극장이 점점 극장 그 자체로 비워져 가는 것. 말 그대로 끝을 맞으며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 그렇게 극장의 비어 있음 가운데 서 있는 것만큼 짜릿한 일이 없다. 아무도 없는 극장에 1등으로 출근해서 가만히 극장 바닥을 바라보던 시간들을 떠올려본다. 모두가 떠나고 다음 공연을 위해 고요히 나를 밀어내던 극장도 떠올려본다. 그 순간의 적막으로 또 다른 무대를 채워낼 힘을 얻는다. 다시 한번, 가득 찬 무대를 바라볼 힘이 생겨난다.
[사진: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