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극장
세상의 모든 극장, 세상의 모든 관객
이혜령
제254호
2024.05.30
연극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관객은 극장에서 무엇을 기대할까요? 웹진 연극in에서는 지금 우리의 관극 문화와 극장 규범을 질문합니다. 무대와 객석이 어떻게 서로를 환대하고 함께 충만할 수 있을지, 열린 객석과 편안한 공연이 모두에게 어떤 마음의 준비, 혹은 몸의 태도를 요구하는지, 조금은 다른 질문들을 쌓아보고자 합니다.
이곳은 타슈켄트. 우즈베키스탄의 수도다. 중앙아시아로 묶이는 나라 중의 하나. 여기에도 물론, 극장이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곳은 나보이 극장. 거의 매일 공연이 있다. 나는 낯선 이 땅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여자. 일곱 살 여자아이, 네 살 남자아이. 매일 매일 정신이 없다.
오늘도 늦었다. 공연 시작은 오후 6시. 얘들아, 우리가 조금 늦은 것 같아, 차에서 내리면 극장까지 뛰어갈 거야. 알겠지? 5시 53분에 “극장 앞”에서 내렸다. 그러나 진짜 “극장 앞”에 가려면 작은 광장, 잔디밭, 주차장, 계단, 다른 계단을 거쳐야 한다. 양손에 아이 손을 하나씩 잡고 뛰었다. 초조했지만 막상 뛰기 시작하자 신이 났다. 우리는 관리가 잘 안 된 비스듬한 잔디를 가로질러, 물이 흐르는 배수로를 홀짝 건너뛰었다. 극장의 측면이 보였다. 주차된 차와 주차할 자리를 찾는 차를 경계하며 뛰었다. 백 년이 넘은 극장 벽을 따라 붉은 조명이 연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극장 벽이 끝나는 앞쪽으로 멀리 분수대가 보였다. 저기가 입구야, 뛰어! 측면 벽이 끝나는 자리의 계단을 오르며 고개를 돌렸다. 극장 입구에는 30여 명의 사람들이 웅성대며 줄을 서 있다.
아무래도 이상하지만, 우리는 늦지 않았다. 표를 확인하고 코트를 맡기고 나니 6시 5분. 곧장 객석에 가서 앉았다.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조율하는 악기들의 소리가 하우스 음악을 대신해 객석을 채우고 있다. 자리를 잡고 앉았으나 사람들은 계속해서 들어왔다. 얘들아, 오늘은 어린이를 위한 공연이 아니야. 너희가 저번처럼 공연 중에 말을 하고 자리를 옮겨 다니면 절대 안 돼. 나는 주의를 시켰다. 힘들 것 같다면, 지금이라도 나가도 괜찮아. 아이들은 자신 있게 “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무서웠다. 한번 해보겠다. 고맙고 정확한 대답이지만, 뭔가를 망치게 될 것 같은 여지가 남은 말.
극장에서 난장을 친 어린애를 데려온 무개념 한국인으로 찍히고 싶지는 않아. 긴장되었다. 한국에서라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긴장이다. 아이 둘 다 보편적인 한국 극장 기준으로는 극장 출입 금지인 나이니까. … 여기서는 좀 애매했다. 예매처에는 3세 이상이라고 되어 있었다. 극장 웹사이트에는 저녁 공연은 5세 이상 관람이 허가된다고 쓰여 있다. 둘 다 한국의 8세 기준에 비하면 낮은 나이 기준이고, 한국의 단호한 기준에 비하면 부정확하다. 나는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5세 이상이라는 답을 들을까 봐 무서워 전화는 걸지 않았다.
공연이 한참 지연되었다. 안내도 없고, 불평도 없었다. 6시 20분이 돼서야 조명이 어두워지고 본격적인 연주가 시작되었다. 완벽한 암전은 아니었으므로 아이들은 긴장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태 늦는 관객들이 있었다. 웅성웅성. 붉은색 재킷을 입은 남자와 갈색 니트를 입은 여자가 공연 중간에 일어나 서로 자리를 바꿔 앉았다. 내 앞쪽에 앉은 관객은 휴대폰을 켜고 지젤의 등장을 비디오로 녹화했다. 내 뒤에 앉은 사람은 그걸 보고 자신도 따라 하려 하다가 실수를 했는지 플래시를 터트렸다. 제지하러 허리를 숙이고 뛰어나오는 객석 안내원은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말소리도 어디선가 흘러들었다. 도무지 극장 예절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혀를 찰 법한 순간들. 오히려 아이들은 집중해서 잘 보고 있었다. 무용수들이 뛰어오를 때마다 두 아이의 어깨가 들썩였다. 무용수가 발끝으로 서서 움직이는 걸 본 일곱 살 아이는 흠칫 놀라 내 팔을 붙들고 동그랗게 눈을 키웠다. 아이들은 공연에 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양쪽에서 아이들이 내 귀를 잡아당겼다. 별 탈은 없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생생하고 악기들의 소리 하나하나가 객석을 가득 채워서인지, 아이들의 작은 말들이 극장을 가로지르는 소음이 되지는 않았다.
문득 미리 극장 웹사이트에서 확인한 안내사항이 떠올랐다. 사전에 허가된 것 외에 촬영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물이 아니면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공연이 시작되면 예약한 자리에 가 앉을 수 없다. 기타 등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들. 하지만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공연의 맥락과 상관없이 실소가 났다.
“이렇게 구멍투성인 엉터리 극장은 아무래도 처음인 것 같아.”
어이없어하며 속으로 웃다가 깨달았다. 공연이 시작될 때 어떤 금지도 안내되지 않았구나.
한국에서 공연은 금지로부터 시작된다. 휴대폰을 끄라는, 사진 찍으면 안 된다는, 뚜껑이 있는 물만 가져올 수 있다는 안내. 그게 아니면, 주차 정산을 미리 받으라는 안내. 여기서는 그냥 조율하던 악기들의 울음과 약간의 어둠, 객석을 채우는 관객들과 그들의 기대감이 전부였다. 그러네. 그 깨달음과 함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객석에 앉을 때 자연스럽게 내 몸을 지배하던 긴장감 때문이 아니다. 그 긴장감이 여기 없다는 걸 인식한 직후의 설렘 때문이었다.
나는 공연을 봤다. 어느새 내 무릎에 와 앉은 둘째 아이를 꼭 껴안고 지젤이 꽃잎을 뜯는 것, 귀족들을 위해 춤추는 것, 바틸드의 존재를 알고 충격을 받는 것을 지켜봤다. 무용수들은 자주 틀리는 것 같았고, 숨이 차는 것 같았다. 관객들은 손뼉을 자주 쳤다. 지금 박수 타이밍 맞아? 내가 그런 의심을 하는 사이에 두 번 세 번 더 박수를 보냈다. 엉터리이고 너그러운 관객들이었다.
*
1막이 곧 끝날 것 같았지만 네 살 아이는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속삭이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예상했던 일이다. 나는 아이에게 참거나 버티라고 강요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아이를 다그치거나 달래는 대신 가방을 챙겨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바짝 숙이고 걸어 나가는데, 문 옆에 서 있던 객석 안내원이 나를 향해 뛰어오지 않았다. 그의 눈은 무대를 향해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우리를 빨리 조용히 나가게 하려고, 혹은 극장 안으로 빛이 드는 것을 막는 무거운 문을 통제하려고 뛰어왔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로비로 나가는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로비에는 낮은 조도의 조명 몇 개만 켜져 있었다. 형광등이 눈부시던 익숙한 로비와는 사뭇 다른, 그래서 객석의 연장으로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아이는 자유로워진 듯 방금 본 발레를 흉내 냈다. 짧은 두 팔을 머리 위로 뻗으며 빙글 돌아 보였다.
우리는 2층에 있다는 카페로 갔다. 불이 꺼져 있어서, 문을 닫은 줄 알았다. 하지만 영업 중이라는 안내를 받고 소시지 빵과 초콜릿 케이크, 별 모양 쿠키와 홍차 한 잔을 주문했다. 자리를 잡으려는데 너무 어두웠다. 불을 켤 수 없나요? 1막이 끝나면 켤 거예요. 우리는 어둠 속에서 신나게 쿠키를 씹었다. 곧 조명이 켜졌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첫째는 2막을 보고 싶다고 했고, 둘째는 그만 보고 싶다고 했다. 첫째는 객석으로 돌아갔고, 나와 둘째는 다시 어두워진 카페에 더 앉아 있다가 2층 복도에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는 집에서 가져온 미니 체스에 빠졌고 나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이 극장의 로비에는 모니터용 TV 같은 게 없었다. 공연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대신 음악 소리만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가 보니, 객석 문은 2층도 마찬가지로 모두 열려 있었다. 검고 두꺼운 커튼이 있었지만, 그것도 반쯤 열려 있었다. 커튼 사이로 죽은 지젤과 윌리들이 춤추는 게 보였다. 그건 1층 객석에 앉아 있을 때보다 더 생생했다. 지젤과 윌리들을 숨어서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그렇게 서서 보는데, 어느새 공연이 끝났다. 커튼을 엄지와 검지로 쥐고, 너무 열리거나 너무 닫히지 않은 사이에 서서 공연을 보던 여자를 쫓아내는 사람은 없었다.
*
예정보다 늦게 시작되는 공연, 턱을 괴고 공연을 보고 있는 자주색 유니폼의 객석 안내원, 줄을 맞춰 서지 못하는 무용수, 공연 중간에 자리를 바꾸는 관객들, 영상을 찍는 휴대폰의 빛, 제지하는 사람도 안내하는 사람도 없음, 혼잡한 코트룸, 중학교 매점 같은 카페, 공연 중 터지는 플래시, 외풍이 새어드는 복도, 문을 닫지 않은 객석, 발코니에 기대선 관객, 입장 연령도 확인하지 않는 허술함. 여긴 아무래도 엉터리다.
나는 누구보다 좋은 극장을 많이 알고 있다. 완벽하게 통제된 극장이 주는 안정감도 잘 안다. 그런데 이렇게 허점투성인, 이렇게나 구멍이 많은 극장이 이 나라 최고의 극장이라니… 그래도 되나? 열린 문, 커튼 사이에 서서 그런 생각을 하는데, 눈물이 났다. 왜인지, 눈물이 줄줄 흘렀다. 뭐랄까, 진짜 엉터리가 뭔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진짜 허술하고 한심한 것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깨끗한 객석과 그걸 깨끗하게 하려고 금지된 것들, 그저 깔끔하게 금지된 사람들. 완벽한 공연, 그걸 완벽하게 하려고 금지된 것들의 목록, 그래서 완벽하게 금지된 사람들. 철저한 금지만이 유효해진, 금지로부터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잊힌 극장. 그런 게 진짜 허술한 거지, 그런 게 진짜 한심한 거지.
빈틈없이 완벽하게 보이기 위해 하나씩 추가된 규범들이 무엇인가를 금지해가는 사이에, 구멍이나 이음새 없이 매끈해진 극장에는 숨 쉴 틈이나 빛이 들 구멍도 함께 없어졌다. 이 극장에서 나는 고른 숨을 쉴 수 있었다. 숨을 참지 않고도 관객이 될 수 있었다. 그 허술한 틈새와 허점들, 구멍들 사이에서는 빛이 반짝이며 새어 나왔다. 한심하고 안전하고 우습고 또 즐거웠다. 누덕누덕 기운 자리, 덜 기운 자리가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그런 구멍이라면 수천 개도 뚫고 싶었다.
홀을 가득 채우는 박수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너그러운 관객들은 박수를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환대에 흥이 난 무용수들이 커튼콜을 반복했다. 어느 정도냐면, 커튼이 닫혔는데도 커튼 앞으로 나와서 인사했다. 지젤은 우아하게 커튼 뒤로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붉은 커튼 그 앞에, 무대 끝에 서서 관객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인사했다. 박수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라고 말하려는 듯이.
관객이 모두 나간 후에야 객석의 문이 닫혔다.
공연 내내 열려 있던 그 문.
[사진: 필자 제공]
- 이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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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쿤스트에서 글을 쓰고 공연을 만든다. 관객의 몸과 감정, 관객을 관객으로 만드는 조건에 관심이 많다. 극장의 종말을 목격한 이들의 선언에서 출발한 프로젝트 〈극장종말론: 입문편〉(2021), 가장 연약하고 얇고 부드러운 것들로 이뤄진 객석 만들기를 시도하는 렉쳐 퍼포먼스 〈대극장 짓기〉(2022) 등을 쓰고 만들었다.
@hyeryunglee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