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감각들을 가진 관객들을 좀 만나려고요…”
세상의 모든 극장, 세상의 모든 관객
장재키
제258호
2024.07.25
연극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관객은 극장에서 무엇을 기대할까요? 웹진 연극in에서는 지금 우리의 관극 문화와 극장 규범을 질문합니다. 무대와 객석이 어떻게 서로를 환대하고 함께 충만할 수 있을지, 열린 객석과 편안한 공연이 모두에게 어떤 마음의 준비, 혹은 몸의 태도를 요구하는지, 조금은 다른 질문들을 쌓아보고자 합니다.
2024년 1월은 두 귀, 피부, 손가락과 발가락이 바빴던 달이었다.
폐물류창고의 높은 천장, 그리고 넓은 사각형의 벽들과 바닥은 안전했고 공기 순환에도 적합했다. 벌판에서 천장으로 들어오는 깨끗한 공기는 폐나 피부뿐 아니라 소리 전달에도 큰 역할을 해주었다. 여러 감각들을 느낄 필요가 있던 우리들에게는 최적의 감각 환경이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타악 연주자, 댄서, 배우, 기술직 종사자로 짐작되는 이들과 자신이 공무원, 전업주부, 일 안 하는 사람, 학생이라고 밝힌 전체 마흔두 명의 참가자들과 나, 그리고 두 사람의 수어 통역사들은 서로 다르게 지각되는 감각 환경을 나누느라 많이 바빴다. 스스로 60세가 넘었다고 구태여 밝힌 한 참가자는 자신이 가진 “청각 장애(그분이 선택하신 단어)”와 옆 사람의 “청각 문제(그분이 애써서 구별하신 단어)”가 얼마나 감각적으로 다른지에 대해 열심히 알려주었다. 그때 뭔가 타일랜드 전통 옷을 입은 참가자가 작은 악기를 손에 들고 벌떡 일어나 특정한 연속 동작을 해 보였다. 움직임 때문에 몸과 악기에서 진동이 발생했다. 그는 두 사람에게 그것을 따라 해보라는 턱짓을 보냈다. 그들은 즉시 알아채고 그를 따랐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하는 모방의 초점이 각기 달랐다. 보고 있던 우리들은 그대로 탄성을 내질렀다. 아니 각성의 탄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장애’란 ‘다른 감각’이었다! 깡길렘의 ‘비정상’ 개념을 논거로 제시할 필요도 없다. 예술이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아니 그렇게 구분한 개념이 혹은 그 가치가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장애인’은 ‘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이다.
장애인이 아니라 ‘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용어를 애써서(한자 문화권에서는 이 용어가 너무 낯설거나 길거나 불편하다고 직관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말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같은 ‘동양인’이라도 ‘일본사람’은 절대로 ‘한국사람’과 같지 않다고 주장하는 그런 이유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용어로 다름의 정도를 무차별하게 포섭할 것인가, 아니면 아무리 작아도 그 다름을 각기 구별하여 지각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일 뿐이다.
인간의 지각은 자신이 선택한 의지에 의해서도 몇백분의 일 초 단위로 변화될 수 있다. 지각의 탑-다운 프로세싱이라 불리는 이 과정은 이전 경험이나 지식에 의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지각 작용이 영향을 받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 방식은 인공 지능의 학습 기반이 되기도 한다. 반면 바텀-업 프로세싱도 있다. 감각되는 정보들이 연결되어 지식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간단히 말해 경험에 의한 학습이라고 일단 해 두자.
세상일이 그렇듯 모든 것에는 이로운 점/좋은 점과 이롭지 않은 점/나쁜 점이 있다.1) 이전 경험의 편향성은 이후 학습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한동안 인공 지능 연구자들도 이 편향성 때문에 고생을 했다. 아무리 반대 급부의 케이스를 학습시켜도 이 편향성은 없어지지 않았다. 잊을만하면 툭 튀어나왔다. 그러다 연구자들은 알게 되었다. 각각 다른 케이스들을 엄청나게 많은 양으로 경험할수록 편향성은 줄어들거나 최소한 줄어드는 경향성을 확보했다. 인공 지능이 아닌 자연의 지능 그러니까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 뇌는 생리학적으로 다원적이다.
인간의 뇌는 그렇다 치고 그 경험상 어떤 다원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중심이 되는 커다란 원 하나가 있고 그 주변에 작은 원들이 있도록 인정해 주는 다원의 체계인가, 아니면 각 크기나 무게, 질감 등 가치가 각각 다른 원 혹은 구 혹은 원통형들도 여러 곳에 배치될 수 있는 다원의 체계인가라는 문제다. 전자의 경우는 중심되는 원의 가치가 주변의 작은 원들에 의해 드러나는 다원일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각각 원, 구, 원통형 등의 가치들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동반되는 다원일 것이다. 나는 후자의 다원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관객이건 배우건 감각이 다르게 경험될 수 있는 연극을 하는 데 관심이 많다. 그러다 보니 다른 감각을 가진 관객들과 공연자들을 점점 더 자주 만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한 14년 정도 되어간다.
2024년 1월은, 각종 스피커와 진동 도구들을 동원해 각기 다른 청각 경험에 연결되는 진동감각 그리고 평형감각을 경험하는 연극을 만들기 시작했던 달이다. 그래서 택한 장소가 폐물류창고였다. 눈이 보이지 않거나 특정 소리를 못 듣는 관객과 그 동행인들도 나무 바닥의 폐물류창고를 경험하기에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월엔 24개월 미만의 아기 관객들을 위한 인형극 워크숍을 시작했다. 이 인형극은 진동감각과 평형감각이 아기 관객의 청각 경험으로 연결되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대의 바닥 재질과 공연자나 인형의 의상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맞춰 움직임을 짜야 했다. 이것이 결정되어야 오는 8월, 관객들의 시청각 추적능력에 인형의 움직임을 맞추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인간의 오감 중 시각은 출생 이후에야 비로소 발달해 약 3세 정도가 되어야 겨우 성인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2세 미만의 아기들이야말로 진정한 오디언스(Audience)들, 다시 말해 듣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듣는 감각이 성인보다 훨씬 섬세하고 풍부하며 다양하다.2) 배우와 인형의 다양한 움직임을 통해 입력되는 진동감각들은 관객이 신체의 균형을 잡으면서 환경 속에 자신의 위치를 지각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신체 위치 지각은 안정감이라는 감정을 형성하는 기초 감각이 된다. 이를 위해 24개월 미만의 아기들은 성인들보다 더 섬세하게 진동감각과 평형감각을 사용한다. 이는 시각장애나 청각장애를 진단받은 성인들과 비슷하다. 12쌍의 뇌신경 중 제8 신경이 듣기뿐 아니라 진동과 평형감각을 담당할 수 있는 이유는, 태아 때부터 축적된 진동감각과 청각 능력 덕분이다. 태아는 임신 19주면 진동을 감각할 수 있고, 임신 24주면 성인과 동일한 수준의 청각을 갖게 된다.3)
2세 미만 관객들은 이렇게 이미 발달해 있는 감각을 사용해 연극이라는 빅데이터 감각 환경을 지각한다. 인형극 형식을 택한 이유는 매질(양수/공기)을 통해 전달되는 진동, 즉 소리를 파악하는 기초 빅데이터가 구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시각을 동원해 신나게 공연을 즐기던 아기 관객들을 지난 10여 년간 만나보았기 때문이리라.
보통 시끄러운 게 아닌 아프리카 북과 타악기들의 소리, 현란한 문양과 의상, 액세서리들, 엄청나게 빠른 템포의 움직임들도 다른 감각을 가진 관객들의 고유한 감각 과정에 시간과 공간의 타이밍을 맞추면, 그 관객들 또한 얼마든지 공연을 즐길 수 있다. 4월과 5월에는 현악기 클래식 연주자들이 아기 관객들을 만났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는 육아에 지친 양육자들을 먼저 위로하고 싶었다. 이혜령 님의 지난 5월호 웹진 기사4)에서도 공감할 수 있었지만, 문젯거리로 취급될 가능성이 있는 어린 관객의 보호자들은 공연장에 와서도 예술을 즐기기 힘들다. 물론, 공연자들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으로 방문 공연을 갈 수도 있다. 그러니 부모나 조부모뿐 아니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선생님들도 그런 긴장된 양육자의 태도와 감각으로 공연을 대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의 날 선 피로와 피곤을 먼저 풀어주고 위로하는 감각 환경을 먼저 만드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
왜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나는 유엔이 공포한 위의 세계 인권 선언 제27조 1항을 믿는다. 그리고 감각이 다른 관객들이 예술을 감상하며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그 권리를 향유하는 모습이 참 좋다. 그러나 우리가 찾지 않는 한 ‘감각이 다른 관객’이 우리를 발견하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들은 아직도 너무 많아 보인다.
언젠가부터 “관객을 개발해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마케팅의 감각이 모자라는 내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관객이 개발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인 듯하다. 우리에겐 해방된 관객을 발견하는 감각이 아직 충분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각각 6천 개의 낱눈이 모인 두 개의 겹눈을 가진 꿀벌이 사람을 본다고 생각해보자. 이 말은 앞에 있는 사람의 6천 개의 각 부분을 먼저 보고 그것을 합해야 그 사람의 전체를 지각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게다가 꿀벌은 빨간빛을 못 보는 대신 우리는 못 보는 자외선을 본다. 더 재미있는 사실도 있다. 꿀벌이 인간이라면 자다 깨서 창문을 아주 조금만 열어봐도 지금이 몇 시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태양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편광해석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로 30대 어른이 감각하는 세상은 5개월 아기나 80세의 노인이 감각하는 세상과 동일할 수 없다. 우리가 다 다르게 생겼다는 말은 감각기관이 각각 다르게 생겨있다는 뜻이다. 한 사람도 닮은 사람이 없으니 어떤 감각 경험도 같을 수 없다. 관객은 그렇게 다른 한 사람 한 사람이 잠시 잠깐 모여 있는 것일 뿐!
- 이들 역시 입장과 관점에 따라 시시때때로 달라질 수 있다!
- 청각은 진동감각과 연관되기 때문에 은유적으로 말해보면 귀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듣는다고 할 수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도 지각과정은 살아있는 몸의 변화를 통해 일어나는 일이며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신체활동이라고 했다. (Magee, J. M., Unmixing the Intellect: Aristotle on the Cognitive Powers and Bodily Organs., Greenwood Press, 2003, p. 97) 최근 신경학 연구는 이런 지각능력이 생후 5개월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Kouider, Sid et al., “A Neural Marker of Perceptual Consciousness in Infants.” Science Vol. 340 No. 6130, 19 April 2013, pp. 376-380) 추상적 규칙은 7개월부터, (Marcus, G.F. et al., “Rule Learning by Seven-Month-Old Infants.” Science Vol. 283 no. 5398, 1 January 1999, pp. 77-80 ) 경험하지 않은 사건을 예측하는 능력은 12개월이면 갖추게 된다. (Teglas, E. et al., “Pure Reasoning in 12-Month-Old Infants as Probabilistic Inference” Science Vol. 332 no. 6033, 27 May 2011, pp. 1054-1059)
- 이혜령, 「구멍 난 극장 – 세상의 모든 극장, 세상의 모든 관객」, 『연극in』 제254호, 202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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