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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순례길, 아이들의 길을 걷다

안산국제거리극축제 <안산순례길>

전강희_연극칼럼니스트

제92호

2016.05.26

안산을 걷는다. 아니 걸었다. 5월 7일 토요일, 안산역 2번 출구에서부터 안산중앙도서관 광장까지 무려 6시간 동안 안산 곳곳을 걸었다. 올해는 작년보다 두 시간 더 걸어야 순례가 끝이 나도록 짜여 있었다. ‘안산’과 ‘순례’, 두 단어만 보아도 무엇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 시간 동안 함께 걷고 또 걸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

안산을 걷는다. 아니 걸었다. 5월 7일 토요일, 안산역 2번 출구에서부터 안산중앙도서관 광장까지 무려 6시간 동안 안산 곳곳을 걸었다. 올해는 작년보다 두 시간 더 걸어야 순례가 끝이 나도록 짜여 있었다. ‘안산’과 ‘순례’, 두 단어만 보아도 무엇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 시간 동안 함께 걷고 또 걸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안산순례길>은 2014년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를 온몸으로 기억하고 사유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길이다. 작년 봄 첫 순례에 참여하지 못해 아쉬워하던 중에, 두 번째 순례는 힘들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려에도 불구하고하고 예술가들은 아예 두 시간을 더 늘려 작년보다 더 길어진 순례길과 행렬을 만들어 냈다. 작년의 기본 뼈대였던 ‘국가비판’에 세월호 참사 이후 달라진 ‘일상과 개인의 삶’을 더했다. 극단 그린피그, 다이애나밴드, 극단 무브먼트당당, 이양구 작가와 배우람 배우, 제로랩, 청개구리제작소, 심보선 시인, 유목연 작가, 일본에서 온 타다 준노스케, 고주영 기획자, 문홍식 감독, 서동석 감독 등이 힘을 내었다.

2015 안산순례길 모습

순례길은 1시에 시작했지만, 나는 이보다 일찍 안산역에 도착했다. 다이애나밴드가 운영하는 시티즌밴드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안산순례길 중 한 꼭지를 차지하는 프로그램으로, 당일 오전에 모여 휴대폰으로 앱을 다운 받아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여 잠시 후 순례 현장에서 연주를 완성하는 것이 순서다. 역에는 나 이외에도 1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안면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안산을 걷기 전부터 먼 길을 걸어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과 함께 안산을 걷기 시작했다. 역에서 원곡시장으로, 체육공원으로, 합동분향소 앞으로, 화정천으로, 재건축지역을 지나, 도로 몇 개를 건너고, 병원 앞을 지나고, 낮은 언덕을 몇 번 오른 후, 단원고등학교로, 안산중앙도서관으로 계속해서 걸어 나아갔다.

걷는 도중에 주민으로 분한 배우들이 행렬 무리에 끼어들어 안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네 산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대해서 알려주었는데, 지명을 제외하면 다른 지역에도 있을 법한 옛날이야기 같았다. 이야기를 들으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의 도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마침 부동산 업자 차림을 한 배우가 건네준 명함을 꺼내 보니, ‘남다른 교육환경, 탁월한 조망가치, 뛰어난 투자가치’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여기저기 공사판이 눈에 띠었다. 안산이 빠른 시간 동안 도시로 변모한 많은 장소들을 대변하는 곳처럼 느껴졌다. 빠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느리게, 그것도 비효율적이게 여럿이 뭉쳐서, 걷고 또 걷는 행렬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2016 안산순례길

안산순례길에는 앞서 언급한 장소마다 퍼포먼스가 하나씩 있었다. 개별 공연들이 위계 없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모든 것들이 하나로 모아지는 순간이 생겼다. 대동서점에서 있었던 플래쉬몹 퍼포먼스 때이다. 지하에 있는 서점으로 내려가면 포스트잇이 붙여진 책이 서가에 꽂혀 있다. 책을 들어 읽다보면, 배우들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들도 같은 책을 읽고 있다. 시인이 나에게 책 한 권을 권하며 “읽으세요.”라고 말한다. 천천히 읽고 있는데, 배우들의 음성이 갑자기 커지면서 빨라지는 것이 아닌가. 울부짖듯이 점점 커지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속도를 맞추게 되었다. 정점을 치는 순간, 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소리 하나 없이, 모든 소리가 최고조에 이르러 동시에 끊겼고, 잠시 후 원래 호흡으로 돌아왔다. 이전까지의 경험은 무리지어 이동했을지라도 사적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개개인에게 친밀하게 말을 건네는 배우들, 동네 주민인 듯 무리에 합류하는 배우들, 교복을 입고 급하게 뛰어가는 배우들, 호숫가 바위 위에서 미동도 없이 서있던 배우들의 모습은 참여자/관객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놓칠 수 도, 다양하게 해석할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이에 비해, 서점 장면만큼은 모두에게 동일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듣기만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공간을 채우는 소리의 진동이 모두에게 골고루 가 닿았을 것이다. 물론 앞서 느낀 개별적인 감정들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동시에 같은 지점에서 소리를 멈추는 합이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안산순례길에 다녀오고 시간이 또 무심히도 흘러버린 지금, 그때를 떠올리면 기억에 남는 것들은 장소 자체보다는 어떤 감각들이다. 서점에서 느꼈던 소리의 진동, 시장에서 들었던 여러 나라의 말이 주는 낯선 질감, 화정천 근처 터널 아래의 침침함 같은 것이다. 특히나 아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배우가 연기를 한 것이지만, 학교 가던 아이들, 여행 가방을 들고 신나하며 떠들던 아이들, 도서관 광장에서 잡담을 나누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기억난다. 흔적을 덮어버리듯이 덮치는 공사장 소리, 수군거리던 동네 어르신 몇 명의 소리와 대비되어 더 강하게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원고등학교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슬픔을 기억한다. 녹초가 되도록 걷는 동안, 나에게 들어왔던 모든 감각들이 장소보다도 먼저 떠오르곤 한다.

안산순례길 프로그램북을 읽다보면, 파란 색지로 되어 있는 부분부터 ‘이 페이지는 순례가 끝난 후 열어주세요.’라는 문구가 있다. 최근에야, 접힌 부분을 펼쳐보았다. ‘아이들의 길’이라는 소제목이 보인다. 이영만, 임세희, 허다윤, 박성호, 오준영, 김시연의 길이다. 각 페이지마다 지도가 그려져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안산순례길에서 걸었던 길이다. 그 길 위에, 아이의 장례를 치룬 곳, 살던 집이 재개발로 사라진 동네, 누나와 걷던 길, 엄마를 마중 나갔던 길, 친구와 수다를 떨던 정자가 있었다. 순례 중 보았던 곰 인형과 클레이 액자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평상시 내 삶으로 돌아온 지금 이 길을 다시 마주하고 있다. 이제 마음속으로 안산을 걷는다.

2016 안산국제거리극 축제 전경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다.”라는 카프카의 말을 자주 떠올린다. 세월호 참사 이전이라면, ‘일상’이 지금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제는 나의 일상 속에 타인의 일상이 같이 쌓인다. 그들의 시간이 나의 시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안산을 걸으며, 옆 사람을 보며 새기게 되었다. 프로그램북에 있는 심보선 시인의 말을 전하며 이 글을 맺는다.

"지치고 우울한 우리는 일상의 평온으로 돌아가고 싶은 만큼 또한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 대신에 우리는 끊임없이 웅성거린다. 이 웅성임에는 흐느낌과 연설의 차이가 없다. 이 웅성임에는 예술과 비예술의 차이가 없다. 이 웅성임에는 삶과 죽음의 차이가 없다. 이 웅성임에는 일상과 비일상의 차이가 없다. 이 웅성임에는 공과 사의 차이가 없다. 이 웅성임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차이가 없다. <안산순례길2016>은 이 웅성임이 흩어지고 모이는 갈림길과 교차로, 멈춤과 움직임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진: 안산국제거리극축제 사무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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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희

전강희 연극칼럼리스트
영문학과 연극학을 전공했고, 공연관련 글을 쓰면서, 드라마터그로 활동하고 있다.
페이스북 www.facebook.com/kanghee.jeon.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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