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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나 무엇인

제19회 서울프린지페스티벌

권혜린

제97호

2016.08.04

무심히 지나쳤던 장소에 머무르게 되면, 주변의 풍경부터 달라 보인다. 2016년 7월 23일부터 30일까지 8일 동안 열린 제19회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장소인 서울월드컵경기장도 돌연 머무르게 된 장소였다. 경기장 안에 들어가 정해진 좌석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좌석으로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공연들은 여백이었던 장...

무심히 지나쳤던 장소에 머무르게 되면, 주변의 풍경부터 달라 보인다. 2016년 7월 23일부터 30일까지 8일 동안 열린 제19회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장소인 서울월드컵경기장도 돌연 머무르게 된 장소였다. 경기장 안에 들어가 정해진 좌석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좌석으로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공연들은 여백이었던 장소가 사실은 꽉 찬 그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이동하는 관객들은 방랑자 혹은 여행자처럼 유랑하면서 광장뿐 아니라 계단, 복도, 검표소, 터널, 의무실, 전광판 아래, 여자 화장실에서 이루어지는 공연들을 자유롭게 찾아다닌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았던 장소들에서 하는 공연들은 그만큼 그 장소의 특색을 잘 활용하고 있었다.

또한 머리도, 꼬리도 없는 원형 경기장답게 순서를 정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공연에 서서히 깃들 수 있었다. 개방된 장소에서 하기 때문에 다른 공연들 역시 지나가면서 살짝 엿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장소가 넓어 프린지 깃발을 꽂은 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경기장을 돈다는 것만으로도 여행 기분이 절로 난다. 후진이 안 되는 자전거는 경기장을 뱅글뱅글 돌면서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물론, 두 다리로 여행하는 것도 괜찮다. 중간중간 힘들면 프린지 클럽에서 마실 것을 사서 목을 축이기도 하고, 조금 힘들다 싶을 때 곳곳에 스탬프(프린지 패스포트(Fringe Passport))를 찍는 장소가 나타나서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처음으로 여행한 공연은 <잠 못 드는 밤 : 브라보 청춘 그 뒷이야기>(극단 물음표)였다. 뒷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후속작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지만 전작을 보지 않아도 공연을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브라보 청춘’이라는 말에서는 희망이 느껴지지만 ‘뒷이야기’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브라보’를 ‘해야만 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날 것으로 발화되는 언어들은 연극에서 상징과 은유를 찾는 데 익숙했던 평소의 관극 경험과 비교했을 때 다소 거칠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만큼 모두 20대인 배우들의 고민을 여과하지 않고 생생하게 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저 느꼈다. 특히 경기장을 누비고 다닌 탓에 새카맣게 된 배우들의 발에서 열정을 느꼈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배우들의 등장과 퇴장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배우가 멀리에서부터 달려와서 역동적으로 무대에 튀어 오르는 등 경계 없는 무대를 잘 보여주었다. 특히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장소인, 기울어진 계단 밑에서 이루어진 공연은 그대로 기울어진 청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여행한 공연은 <망명바다>(창작집단 3355)였다. ‘다원예술 퍼포먼스’답게 영상, 시 낭독, 춤 등으로 공연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핵발전소가 세워질 예정인 영덕 바다의 영상이 바닥에 깔리면서 일상에서의 망명을 경험하는 시와 춤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관객들이 무대에 등장에서 공연을 함께 마무리했다. 관객들의 참여 방식은 매번 바뀌는데 이번에는 부서지는 것들이 적힌 쪽지를 관객들이 읽으면서 한 명씩 앉았다. 나의 목소리로 읽은 망명을 통해 망명은 수동적으로 보는 ‘남의 일’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겪는 ‘나의 일’이 된다. 없어질 장소를 경험하는 것은 현시대에서 빈번하며, 그러한 점에서 누구나 망명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공연 장소도 높은 곳에 위치한데다가, 배경에 있는 가로등이 갈매기 모양을 하고 있어서 ‘망명 바다’라는 제목과도 잘 어울렸다.

마지막으로 창작집단 살판의 <혀>를 관람하고자 했으나, 공연 장소인 터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자리가 꽉 차 들어갈 수 없었다. 더운 날씨에도 관객들의 반응은 열정적이었다. 이 역시 즉흥적인 자유여행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쉬웠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었다. 입구에서 싱어송라이터 박창근의 공연이 이날의 마지막을 장식했기 때문이다. 기타와 하모니카, 목소리의 삼박자가 잘 어우러진 공연은 앙코르를 거듭하면서 한 시간이나 이어졌다. 벌써 가을을 듣는 듯한 감성적인 음색이 귀를 적셨다.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미리 다가온 가을을 겪었다.

공연이 끝난 뒤, 자유롭게 뒤풀이를 하고 있는 인디스트들을 뒤로하고 여행을 마무리했다.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축제이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아무에게나, 무엇도 될 수 있는 축제’라고나 할까. 그 안에 어떠한 단어를 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간혹 사전 예약을 해야 하는 공연들도 있으니 보고 싶은 공연을 정해서 찾아와도 좋고, 아니면 즉흥적으로 공연을 찾으러 다녀도 좋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은 늘 열려 있을 테니. 그 열린 장소에는 예술가들의 고민에서부터 시작해서 관객들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예술가가 관객도 되고 관객도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자유도 담겨 있다. 이렇게 다채로운 색을 입힌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가고 싶어진다.

[사진: 축제 사무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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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린

권혜린
문학 연구자, 강사,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더 자유롭게 읽고 쓰기를 꿈꿉니다.
lingi3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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