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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시작된 변화를 다시 시작하기

제1회 페미니즘 연극포럼 참관기

김민조_연극평론가

제144호

2018.07.19

한국에서 ‘페미니즘’과 ‘연극제’라는 말이 결합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의 연극을 페미니즘 연극이라 부르는 것을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 창작주체들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서 페스티벌의 가능성을 포착할 수 있는 기획자와 드라마투르그가 등장하고, 무엇보다 페미니즘 연극을 하면 보러 오겠다는 관객층이 형성되었을 때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는 시작되었다. 페미니즘 연극제 참가작들의 면면을 지켜보면서 이 연극제를 ‘이제서야 겨우 첫발을 뗀’ 사건으로 호명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페스티벌의 형태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간 정말 많은 연극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페미니즘 연극에 대해 고민해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연극판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페미니즘 연극은 누구와 어떻게 연대할 수 있나? 페미니즘 연극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고, 또 어떻게 관객과 만나야 하는가? 그렇게 앞 세대의 여성 연극과 페미니즘 연극들의 반향 속에서 차곡차곡 쌓아온 경험치를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이번 연극제는 제1회라는 말을 무색게 할 만큼 성숙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2018년 7월 6일(토)에서 7일(일)까지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의 부대행사로 포럼이 열렸다. 페미니즘 연극제를 기획한 페미씨어터와 연극비평집단 시선이 공동으로 주최한 제1회 페미니즘 연극포럼은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 연극’(6일)과 ‘동시대 해외의 페미니즘 연극’(7일)이라는 주제로 마로니에공원 다목적홀에서 이틀 간 열렸다. 첫날 포럼은 말 그대로 한국 연극계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대해 발언하는 자리였다. 평론가, 연극제 참가팀, 그리고 관객의 발표로 이루어져 있어 페미니즘 연극을 바라보는 다각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첫 발표를 개시한 유연주 평론가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한국 페미니즘 연극>이라는 제목으로 2015년부터 연극계에 불기 시작한 페미니즘 바람이 2018년 현재 어떠한 방식으로 진화해 왔는지에 대해 통시적으로 분석했다. 유연주 평론가는 페미니즘 연극을 ‘여성’ 정체성을 중심으로 규정하는 종래의 방식을 과감하게 탈피하여 계급, 인종, 종족, 능력, 성적 지향, 지리적 위치, 국적 혹은 다른 모든 형태의 사회적 배제와 차별에 저항하는 작품으로 규정했다. 이는 순혈주의를 고집하기보다는 페미니즘이 지닌 연대의 능력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성소수자나 장애인들이 중요한 주체로 등장하는 작품이 많은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의 성격에도 부합하는 실천적 규정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폭넓은 정의를 바탕으로 2015년 이후 우리의 삶과 연극 자체를 다르게 보도록 만든 페미니즘 연극의 다양한 실천들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유연주 평론가는 2015년 한예종 연극원 학생들이 제작·공연한 <클라우드나인>부터 위계적인 제작현장의 문제를 타파하기 위한 노력이 발견된다고 주장했는데, 두 번째 발표를 맡았던 무아미아 팀은 수평적 관계에 의거한 대안적인 창작방식이 훌륭한 공연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실제로 증명해낸 팀이라 할 수 있다.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에 <무례한 미아의 이동좌담회>로 참가한 무아미아 팀은 <그 뒤에 얘기하는 미아의 이동좌담회>라는 제목의 발표를 준비해왔다. 발표는 팀 내에서 진행한 공연 합평회 녹취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포럼 참석자들은 이들이 오랜 시간 토론하고 공부하며 공연을 준비해온 경위를 생생하게 전달받을 수 있었다. 연출가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구조를 탈피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 결과 참여자들이 각자에게 할당된 스팟을 온전히 책임지는 ‘1인 이동형 공연’이라는 독특한 형식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날 무아미아 팀은 포럼에 참석하지 못한 팀원들의 공연소감을 각각 녹음해와 참석자들에게 들려주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는데, 발표의 내용으로나 형식으로나 무아미아 팀은 서로를 독립적인 예술가로서 존중하는 작업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페미니즘 연극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역설하는 듯이 보였다. 무아미아 팀이 창작자의 입장에서 페미니즘 연극의 조건들을 고민했다면, 스스로를 ‘연극 덕후’라고 소개한 ‘팦’ 님은 관객의 입장에서 느끼는 페미니즘 연극의 의의에 대해 매우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여성 관객들, 그리고 여성 관객들의 문화에 대해 공공연하게 ‘후려치기’가 자행되는 연극계의 현실과 여성혐오적 요소들을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미봉책에 불과한 방식을 반복하는 창작자들의 태도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포럼 참석자들의 시선에 살짝 수줍어하는 듯하면서도 “뭔가 시작부터 다른 연극을 보고 싶었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피력하는 팦 님의 모습에서 지금 현재 한국의 페미니즘 연극을 누구보다도 단단하게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관객들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동시대 해외의 페미니즘 연극’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둘째 날 포럼은 페미니즘 연극제의 기획자인 나희경 PD의 개회사로 시작되었다. 나희경 PD는 2016년 이후 수많은 페미니즘 연극이 무대에 올랐음에도 작품을 본 사람은 많지 않은 현실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페미니즘 연극제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이어서 한국의 페미니즘 연극제와 연대하기 위해 대만에서 찾아와준 대만여성연극페스티벌(Taiwan Women Theatre Festival) 팀과 Betsy Lan의 발표가 있었다. 발표는 송이원 연출의 통역으로 진행되었으며 대만여성연극페스티벌의 역사, 기획의도, 구성원들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졌다. 대만여성연극페스티벌은 1996년부터 시작되어 2017년 제6회를 맞이했다. 대만여성연극페스티벌은 대만뿐만 아니라 중국과 홍콩, 더 나아가 유럽과 미국의 공연단체들과 교류하고 있으며, 2021년 개최될 제7회 페스티벌에서는 동아시아 각국의 창작자들을 단순히 초정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공동창작을 적극적으로 매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대만여성연극페스티벌 팀의 발표에 이어 고주영 PD가 동시대 일본의 페미니즘 연극에 대해, 그리고 마정화 번역가 겸 드라마투르그가 영국과 미국의 페미니즘 연극에 대해 발표했다. 고주영 PD는 일본 현장비평의 목소리들을 경유하여 일본 소극장 연극이 문학, 영화, 미술, 애니메이션, 게임 등 인접 장르들은 물론 다카라즈카와 같은 상업연극에 비해서도 젠더에 대한 담론화가 뒤처져 있는 측면이 있음을 지적했다. 한편 마정화 번역가는 영국이나 미국의 연극계가 한국과는 달리 성폭력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외모 품평, 언어폭력에서 강도 높은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2017년 12월 뉴욕의 퍼블릭 시어터에서 개최된 연극계 성폭력에 대한 좌담회에서 어떠한 개선책들이 모색되었는지 소개했다. 성문화된 성폭력 방지 정책들과 피해자-가해자 중재 서비스. 안전한 연기/안무지도를 위한 방안 등 퍼블릭 시어터 좌담회에서 논의된 제도적 개선책들은 한국 연극계에서도 활발하게 논의되어야 할 사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미투 운동 이후에 서서히 그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침묵의 문화’를 어떻게 깨뜨릴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무겁게 다가왔다.

이번 포럼을 통해 성폭력의 문제는 유럽과 미국, 대만과 일본과 한국을 막론하고 어느 연극계에서나 발생하고 있는 ‘동시대적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국가의 사례와 해결책들을 빠르게 공유하고 논의할 수 있는 페미니즘 연극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페미니즘 연극은 무대에 계속해서 올라야 하고, 그 연극들 간의 대화를 주선하는 장으로서 페미니즘 연극포럼 역시 계속해서 추진되어야 한다.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소수자들에게는 지식과 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번 포럼이 연극계 내의 새로운 페미-네트워크를 가동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사진: 연극비평집단 시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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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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