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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들려주는 어떤 방법

"움직임의 시" 아쿠 카도고 세미나/워크숍

장지영_드라마터그

제175호

2020.01.23

<무지개가 떴을 때 자살을 생각한 흑인 소녀들을 위하여> 책표지 (출처 : 위키피디아)

지난 1월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신촌문화발전소에서 진행된 <움직임의 시>는 코레오포엠(choreopoem)이라는 낯선 형식을 경험해보는 시간이었다. 코레오포엠은 미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엔토자케 샹게(Ntozake Shange)가 처음 고안한 것으로, 작품<무지개가 떴을 때 자살을 생각한 흑인 소녀들을 위하여>(For Colored Girls Who Have Considered Suicide When Rainbow is Enuf)(1976)을 통해 처음 소개 되었다. 코레오포엠은 전통적인 서사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 시와 춤을 유기적으로 엮어낸 작품의 형태이다. 이번 <움직임의 시>에서는 미국, 호주, 한국 등 전 세계에 걸쳐 연출가이자 안무가, 공연예술 교육가로 활동 중인 아쿠 카도고Aku Kadogo를 초청하여, 엔토자케 샹게의 기념비적인 작품 <무지개가 떴을 때 자살을 생각한 흑인 소녀들을 위하여>(이하 <무지개>)를 중심으로 흑인여성서사의 대안적 흐름과 그 핵심적 창작방식을 나누었다.
첫날인 16일은 아쿠의 작업과 코레오포엠의 맥락을 함께 짚어보는 세미나 시간이었다. 코레오포엠은 어떤 상황에서 등장했으며 그 의의는 무엇인지, 백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흑인 여성들이 어떻게 배제되어 왔고 코레오포엠이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해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극은 언제나 백인/남성의 것이었고, 그들의 서사가 연극의 기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지개>는 전통적인 연극의 언어가 아닌 흑인 여성들만의 방식-그들의 말과 소리와 몸-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 혁신적인 시도였다.
<무지개>는 70년대의 “black arts movement”, 베트남전 시기를 통과한 세대의 정치적 경험, 그리고 로레인 핸스베리 등의 앞선 여성 극작가들의 존재에 빚지고 있다. 아쿠는 이런 시대상과 극작가들의 계보를 언급하면서, 앞선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샹게가 존재할 수 있었고, 또 샹게가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다른 여성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한 참가자는 ‘계보를 상상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다. 흔히 내가 어디에 존재하는가를 말할 때, 동시대적인 맥락 안에서만 이야기하기 쉽다. 그러나 나를 만드는 흐름은 종적이면서 동시에 횡적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가능할 것이고, 우리가 지금 만들고 있는 작업들이 우리의 후손을 만들기도 할 것이다. 미투 이후의 시대를 보면서 성장하는 지금의 십대들이 만들어낼 작품들과 그들의 새로운 감각이 궁금하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또 브로드웨이에서 호주의 사막으로 이어지는 아쿠의 여정을 들으면서,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 하더라도 각자의 경험은 모두가 다르다는 것도 생각하게 되었다. 한 사람 안에서 시간의 흐름, 그 사람의 정체성, 사회의 분위기, 경험 등이 모두 교차한다는 감각은 놀라웠다. 결코 어느 누구의 이야기도 동일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두의 이야기는 가치 있을 수 있다. 70년대에 샹게와 아쿠가 말하고자 했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흑인여성들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그들의 이야기가 가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질의응답 시간에 아쿠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어쨌든 살아있고, 괴로운 날이 있겠지만 결국 살아갈 것이고, 그러므로 도전하고 실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 평생을 그런 태도로 살아온 어떤 열정, 무엇이든 해 볼 수 있다는 감각을, 60대의 나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자주 지치고 부단히 좌절하게 되는 상황을 견디는 힘을 얻은 것 같았다.
다음날 있었던 워크샵에서는 코레오포엠의 작은 부분을 체험해보았다. 코레오포엠의 기본 정신은 음악과 움직임과 언어가 모두 어우러지는 것이므로, 소리와 몸을 통해서 각자의 감각을 표현해보는 작업을 했다. 스물다섯명 정도의 참가자가 둘러서서 각자의 소리와 몸짓을 따라 해 보는 시간을 먼저 갖고, 다섯 명씩 다섯 개의 소그룹을 만들어 그룹마다 짧은 작품을 만들어 보았다. 하나의 움직임을 만들고, 그것에 대한 설명을 붙이고, 거기에 감정을 더하였다. 아쿠는 즉흥을 강조했는데, 즉흥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의미 있음을 말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같은 조가 되어 움직임으로 감정을 표현해보는 것은 대단히 낯선 감각이었고,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몸으로 만든 움직임에 감정을 더하고, 즉흥을 진행하면서 그들의 몸과 내 몸이 만나 생각하지 못한 작품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다섯 개의 조가 만들어내는 장면은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각자의 것이었지만,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의 몸에 집중하고 그들을 감각하는 경험은 공통이었다고 느껴졌다.
이틀간의 워크샵을 통해 코레오포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가 만난 것은 코레오포엠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만남을 통해 새롭고 낯선 형식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코레오포엠이 그 전까지 한 번도 듣지 못했던 흑인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누군가가 만들 어떤 새로운 예술이 이제까지 우리가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기다린다.
[사진제공 : 신촌문화발전소, 촬영 : 유니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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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영

장지영
드라마터그.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많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것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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