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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사이, 혹은 다른 어디

공연예술 스트리밍 서비스 ‘플레이슈터(PlayShooter)’

송이원_연출가

제177호

2020.03.26

코로나19에 대한 위기경보단계가 심각으로 격상되며 지역사회 감염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물리적 거리두기’가 전사회적으로 권고되고 있는 요즘이다. 이에 SNS에 공유되고 있는 상사와의 지난한 회의가 메일 몇 줄로 대체되었다는 미담들, 강의자의 고양이가 화면에 등장하였다는 화상강의 해프닝들을 접하며, 재난 가운데에도 소소한 일상은 이어지는구나 하는 씁쓸하고도 묘한 안도감을 느끼고는 한다. 아무튼, 이 같은 재난상황 중에 대면(對面) 그 자체를 장르의 형식으로 삼는 연극과 제반 공연예술계 또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가는 중이다. 연이은 공연 취소로 생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창작자가 적지 않은 것은 물론이며, 무엇보다 오랜 기간 공들여 준비한 작품이 끝내 객석-무대에서 ‘작품화’되지 못하였다는 소식들을 접하며 아쉬움과 더불어 연극이라는 매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이번 지면을 통해 소개할 공연예술 스트리밍 서비스 ‘플레이슈터’ 강경호 대표와의 인터뷰에서는 유독 매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던 것 같다. 플레이슈터는 2018년 여름부터 약 1년 반에 달하는 준비기간을 거쳐 올 2020년 1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매체로, 본 서비스는 연극 매체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비롯된 연극 생태계 실험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몇 천만 단위의 제작비와 더불어 여러 역할의 창작자들이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여 제작한 공연은 필연적으로 시공간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공연이 끝나는 그 순간 바로 사라져버리기에 공연예술이란 장르는 매체 그 자체에 ‘기억’이라는 아름다운 속성을 지니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어쨌든 사람인지라 아름답고 아련하게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다.
때와 장소가 맞지 않아 공연을 놓친 관객, 공연을 이미 관람하였지만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고픈 관객, 해당 창작자나 창작진의 작품을 직접 관람할 기회는 없었지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관객, (다소 낙관적인 전망일 수도 있지만)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생경하여 관람의 계기가 없었던 잠재적인 관객, 그리고 어쩌면, 관련 학습을 하여야 하거나 연구보고서를 작성하여야 하는 학생 및 연구자, 또는 텍스트 대본과 기억이 아닌 장면으로 작품의 디테일을 다시 확인하고픈 평론가 등. 무대에서 상연되는 공연 그 자체는 아니지만, 공연이 더 이상 상연되지 않는 기간 중에도 영상의 방식으로 창작물에 대한 접근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는 점에서 플레이슈터 플랫폼은 상당히 반가운 시도로 보인다(소위 ‘성수기’에 공연기간이 겹쳐 놓칠 수밖에 없었던 작품들을 영상으로나마 접할 수 있다면 필자는 쌍수를 번쩍 들게 될 것 같다).

이처럼 플레이슈터의 시도는, 한정적인 기간에 걸쳐 공연이 상연된 후 기억되거나 회자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창작물과 관해, 재공연이나 레퍼토리화를 마음처럼 계획할 수 없는 생태계의 여건 및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마주하는 상상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극장을 형식으로 삼는 연극작품이 영상과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스트리밍 된다면 극장을 찾는 관객이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 또한 있다. 소개를 맡은 필자이자 창작자로서 또 관객으로서 나의 의견을 덧붙여보자면, 재공연에 임하는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작품에 대한 달리보기와 다시보기를 다양한 각도로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고,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존재를 몰랐던 작품들에 대해 접하게 되는 계기가 열리는 것이자, 동시에 영상을 통해 관람한 작품의 태도와 감성이 맞을 경우, 극장에서의 관람을 더욱 기대하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극장 공간에서 작품의 의도와 계획 하에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아닌 이상, 단순한 실망은 창작자에게도 관객에게도 달갑지 않은 것일 수 있으니 말이다) 더불어 텍스트로 수행되는 작품의 비평 역시 ‘사라진’ 작품에 대한 기록의 의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기에, 다양한 형식과 결의 글쓰기가 시도될 수 있지 않을까.
플레이슈터 웹페이지 메인화면 (캡처_playshooter.com)
덧붙여 상연되었던 작품의 영상이 유료 스트리밍 서비스의 형태를 띠게 된다는 점 또한 흥미로운 실험으로 보인다. 갓 시작된 서비스의 시장규모를 예측하기가 어렵기에 현재로서는 그 범위를 가늠할 수 없지만, 제작하였던 작품에 대해 티켓 수익금 이외의 수익이 창작자 측에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장기적으로는 어떤 순환을 만들어낼 수 있지도 않을지, 그 추이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물론 그 수익의 규모가 유의미할지, 창작자의 창작활동도 플랫폼의 서비스도 ‘그 만큼’ 장기적일 수 있을지가 관건이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편당 4,000원의 가격으로 서비스되는 영화의 경우 그 영상 자체가 완성도를 지닌 작품 자체인 반면, 영상화된 연극작품의 경우 그것이 이차적이거나 다르다는 점에서 편당 2,000원의 가격을 책정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예술자료원 방문에 드는 왕복 차비에 비해 500원 저렴하여 가성비라는 시대정신에 맞닿게 되기도 하였다. 물론, 가격의 측면을 제하더라도 예술자료원에 비해 창작자와 관객 모두에게 여러 의미에서의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높기에, 플레이슈터 플랫폼은 아카이브 이외의 가능성에도 열린 플랫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매체는 투명한 것이 아니기에, 극장 중심의 생태계에 스트리밍 서비스가 도입되는 것이 마냥 선물 같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극장과 영상이라는 두 매체는 호흡과 감각이 다를 수밖에 없기에 넷플릭스의 감각이 지배적인 오늘날의 환경에서, 연극작품을 촬영한 영상이 2,000원 만큼의 가치 즉, 상품성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여야 하는지, 또 공연의 창작자로서 그 영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촬영 및 편집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기존의 극장환경에서 떠오르지 않았던 여러 사항들이 새로운 결정 과제로 나타날 것이다. 또한, 매체의 다름으로부터 비롯된 차이라는 간격은 또한 투입하여야 할 노동과 시간 그리고 비용으로 직결되기도 할 것이다. 다만 한 예술장르이자 생태계이기도 하며, 동시에 분명 제도이자 시장이기도 한 연극계와 그 작품에 대해 이는 한 번 해봄직한 시도로, 어쩌면 동시대(?)적인 자극이자 시도일 수 있지 않을까.
플레이슈터 영상화면 <구보씨와 경성사람들>(2018)(캡처_playshooter.com)
글을 쓰며 어쩐지 이따금씩, 강경호 대표가 인터뷰 말미에 하였던 말이 떠올랐기에 이를 공유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예산과 장비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 공연예술 관련 국공립기관에서 이 같은 사업을 할 능력이 없어 지금껏 시도되지 않았다기보다는, 수익사업을 운영할 수 없는 공공기관의 원칙과 더불어 기관-극장-창작자 간 협의의 어려움 등 현실적인 동시에 서류적인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고, 그렇기에 이는 오히려 개개인의 ‘욕구’가 모여 이루어져야 하는 일일 수도 있겠다고, 이에 플랫폼 오픈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언젠가 주워들었던 것 같은 수요와 공급공선 같은 경제의 원리가 떠올랐는데, 이 같은 플랫폼의 시도 또한 동시대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또 달성되기 어렵겠지만 꾸준히 논의하고 상상하여야 할 ‘국가지원금 외의 창작기반’에 대한 시도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뭐 물론, 다소 거대하고 낙관적인 전망일 수도 있지만, 많은 창작지원 사업에서도 요구되고 있듯, 실험은 권장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또 실험은 개인의 몫인 만큼 또 개인의 몫이 아니니까.
플레이슈터 http://playshooter.com
스트리밍 등록 및 촬영 제휴 안내 http://playshooter.com/shop/company.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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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원

송이원 연출가
‘丙 소사이어티’에서 글 쓰고 연출하는 사람.
eewon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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