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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을 기다리고 있어

[특집이슈] 코로나 시대 연극인의 일상 에세이

안병식_배우

제177호

2020.03.26

크레이터
2월 1일, ‘크레이터(Crater)’라는 연극의 두 번째 공연을 앞두고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제목 그대로, 구덩이에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나라에도 확진자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첫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소극장이라 무대와 객석 사이는 매우 가까웠다. 관객에게 다가가 열정적으로 독백을 내뱉는데 관객 중 일부가 움찔대는 것이 느껴졌다. 침 때문이었다. 조명 때문에 관객석까지 비산되는 침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다음 날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침을 튀기지 않으면서 열정적인 에너지로 독백을 해낼 수 있을까. 배우로서 이런 고민을 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그때엔 꽤나 진지한 문제로 다가왔다.
두꺼비마트와 선녀보살
침 안 튀는 독백 연기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그 날, 5번 확진자의 동선이 공개되었다. 왕십리에 있는 선녀보살 점집을 들른 뒤, 성신여대입구역 근처의 편의점과 두꺼비 마트 그리고 영화관을 다닌 것으로 보도가 되었는데 나를 비롯한 동료들의 동선과 많은 부분이 겹쳤다. 선녀보살을 빼고 말이다. 극단 연습실도 근처인 데다가, 두꺼비마트는 공연 엠티를 갈 때마다 들르는 곳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동료들과 농담 삼아 5번 확진자가 연극배우 아닐까 하며 웃어넘겼지만 멀리 떨어져 있던 공포의 거리가 훌쩍 바로 앞에까지 다가와 좁아진 느낌이었다. ‘저 선녀보살이, 5번 확진자가 신종코로나 걸린 거 맞췄으면 대박이었을 텐데’ 하는 실없는 생각도 들었다.
코로나인가 감기인가
‘크레이터’ 공연을 마치고 며칠 뒤, 전에 했던 다른 공연의 재공연을 300석 규모의 중극장에서 바로 해야 했다. 공연 직전 많은 관객이 공연을 취소하고 있다는 기획의 전언이 있었다. 아직 확진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니까. 공연 직전에 창을 열어 놓고 자다 찬바람에 콧물감기가 왔다. 기침도 발열도 없었지만, 혹시 ‘코로나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성은 단순한 감기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게 콧물감기가 아니라 코로나라서 후배 배우들에게 죄다 옮기고 관객들까지 전염되면 어떡하지? 그러다 막 뉴스에 나오는 것 아냐?’ 하는 망상이 용솟음쳤다. 하지만 콧물은 금세 그쳤다.
<날아가 버린 새> 포스터(좌), 공연 취소 안내문(우)
날아가 버린 새
드디어 여러 이름으로 불렸던 병의 공식적 이름이 결정되었다. 코로나19. 이즈음 신천지를 비롯한 집단 감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공연 취소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극단 공연이었던 <날아가 버린 새>의 3월 재공연도 결국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천만 원이 넘는 대관료를 돌려받을 수 없었지만, 감염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이때, 관객들이 감염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공연에 운명이라는 게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블랙리스트 때문에 공연이 날아가 버리더니, 이번에는 코로나 때문에 날아가는구나’ 하면서 출연 배우들과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를 나누었다. 같이 출연하기로 했던 후배가 코로나 긴급 예술인 대출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길어질 가뭄에 짧은 단비다.
검은 목요일
4월 공연의 연습은 아직 취소되지 않고 진행 중이다. 연습실에 나오기 전 뉴스를 틀었는데 세계 대공황에 버금가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1987년의 ‘검은 월요일’에 빗대 ‘검은 목요일’이 왔다며 비명 같은 보도를 쏟아낸다. 하지만 연습실에 들어가니 동료들은 차를 마시며 평온한 기색이다. 대공황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다는 듯이. 새삼 우리 연극인들이 경제 위기 같은 것에는 참 둔감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경제 대참사 난다고 난리인데 우리 너무 평온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대공황이든 아니든 우리가 돈 못 버는 건 똑같지 않냐는 현답이 돌아왔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연습실 ⓒ극단 돌파구
관객을 기다리고 있어
작은 희망을 안고 일단 4월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라는 제목인데 요즘은 관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연습을 진행하는 중이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관객을 만나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빨리 이 사태가 진정되어서 더 많은 관객과, 마스크가 아닌 민낯으로 서로 바라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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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식

안병식 연극배우
극단 돌파구 단원. ankko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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