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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들

[특집이슈] 코로나 시대 연극인의 일상 에세이

구자혜_극작가, 연출가

제177호

2020.03.26

결국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서울대학병원에 갔다. 그때 나는 대학로라는 곳에 처음 왔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이었고, 몇 달을 어떤 의사와 함께 책을 읽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것이 언어 치료였다는 사실과 우리집 형편에 비해 꽤 비싼 진료비를 내야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의사와 함께 읽었던 책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페이지의 두께가 꽤 있었다는 것과 활자가 약간 작았던 것만이 기억난다. 그리고 내 등 뒤에 앉아 있던 어머니와 의사의 지속적인, 그러나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던, 가끔 이루어지던 시선의 교환도 기억난다. 나중에 들었는데, 그때 실은 어머니는 꽤나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들은 나를 다그치지 않았고, 말을 입 밖으로 뱉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내 소리에 따라 활자들을 따라가던 의사의 파란 볼펜의 궤적과 활자들에 대한 감각이 좋았다. 받침의 쌍자음이 다음 활자의 모음과 만나며 넘어갈 때의 감각을 의사는 동그라미로 표시해주었다. 나는 그저 읽었다. 한글이 대단하다는 감각을 느낀 것은 아니다. 그저 활자에 대한 매혹을 발견했던 시기라도 해두고 싶다. 그때 나를 사이에 둔 의사와 어머니 사이에서, 나를 위축시키지 않으려 한, 그러나 분명 나를 계속 염두하고 있던 두 사람 사이의 긴장.

올해 공연이 취소되었을 때 어머니와 통화했다. 어머니는 공연 취소 소식을 듣고, 집은 좀 치웠냐고 했다. 내가 갖고 있는 몇 개의 증상들이 있는데, 어머니는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자신의 책임이라고 하지 않아왔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 대해 안심해왔다. 어머니는 종종 나에게, 그것 때문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고만 했다. 이번 공연 취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연극은 언제든 멈춰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호기롭게 살아온 편이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마음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약간의 위로를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위로하지 않아서 마음이 조금은 괜찮아졌다.

꽤 오래 전에 <일회공연>이라는 공연을 했었다. 모든 작가들의 서랍 속에는 공연 화 되지 못 한, 그리고 앞으로도 못 할 희곡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했다. 몇몇 작가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실제로 서랍 속에 있었다. 작가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희곡을 내어주었다. 희곡 속에 분명 존재했지만, 무대에 등장하지 못한 인물도 있었다. 그리고 공연화 되지 못한 사연이 있었다. 그때 우리들의 연기 전략은 그것들을 잘 나르는 것이었다. 각 장면들 사이에는, 작가들이 그것이 왜 관객들을 만나지 못한 채 그리고 앞으로도 못할 채, 서랍 속에 들어가 있는지 이야기했다. 어떤 작가는 프로젝션의 활자들로, 어떤 작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것을 배달하는 것에 주력했다. 형상화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것들을 관객과 만나게 하는 것. 그러나 안쓰러워하거나 깊이 이입하지는 않을 것. 그때 제일 많이 했었던 이야기는, 활자들의 물성에 대한 것이었다. 지면 속의 활자들이 물리적으로 그 지면 속에서 튀어나와 객석 쪽으로 조금씩 걸어가게 하는 것. 이것은 은유 같은 것이 아니었고 실제 연기의 원리가 그러했다.
<일회공연> 포스터
꽤 오래 구상하여, 40페이지 정도의 희곡을 썼다. 꽤 꾸준히 연기론에 대한 공부를 함께 해온 배우들이 있다. 그들도 함께 하기로 했던 공연이었다. 그들은 스터디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그 희곡을 꺼내 소리내어 읽는다. 어제도 그랬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향해 저 활자들을 나르고 있는 것일까. 그 중에 한 명이 이리 배우인데, 반은 희곡에 눈을 두고 반은 어딘가를 보며 희곡을 읽었다. 나는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한다.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희곡을 읽느라, 대답하지 않는 이리 배우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 의해 읽히길 기다렸던, 그러나 이제는 서랍 속에 들어가 있을 활자들이 최근에 증식되었을 것이라고. 언젠가는 그 서랍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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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혜

구자혜
‘여기는 당연히, 극장’에서 글을 쓰고 연출을 한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드랙X남장신사>, <로드킬 인 더 씨어터>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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