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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염병 중

[특집이슈] 코로나 시대 연극인의 일상 에세이 - 독일

이은서_연출가

제178호

2020.04.16

4월 18일에 있을 연극표를 샀다. 3월 9일의 일이다. 아이들 일정과 남편의 일정을 고려하고 짜 맞춰서, 겨우 혼자 집 밖을 빠져나와 오랜만에 연극을 볼 것이다. 샤우뷔네에서 매년 봄에 열리는 FIND(Festival International New Drama)기간이었고, 세계 각국에서 가장 핫하다는 공연을 베를린에서 쉽게 관람할 수 있는 거라, 매년 꾸준히 방문하던 것이었다. 떨릴 겨를도 없이, FIND 축제가 전면 무산되었다. 3월 12일의 일이다. 아이들이 학교와 유치원에 가지 않기 시작했다. 3월 17일의 일이다. 4월 19일까지 집에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독일 내 모든 극장도 문을 닫는다. 연초 내내 한국의 안부를 묻는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매일 별일이 없는지 질문을 받는다. 별일은 늘 있어왔다.
Festival International New Drama 취소 공지 (이미지 캡처: www.schaubuehne.de)
일상을 늘 전염병이 있던 때와 비슷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당장 내 삶에 큰 변화는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하느라 저녁 약속은 잡지 않았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필요한 일이더라도 온라인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에 주로 참여했으며, 수익이 날 수 없는 공연을 주로 했기 때문에, 지원사업을 찾고 지원서를 쓰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썼다. 그게 아니라면 자투리 시간에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느라, 혹은 그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시간을 썼다. 차분히 뭘 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물건은 최대한 온라인으로 구매를 했고, 마늘 냄새 때문에 무례하게 인종차별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공공장소에서는 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놀이터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날씨가 좋으면 늘 놀이터에서 만나 함께 노는 아이와 엄마 친구 그룹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연극배우, 시각예술 작가인 친구들이라 늘 서로 의지하며 지내왔다. 만나서 열정적으로 자기의 요즘 작업 근황, 아이 키우는 일, 거지같은 독일의 시스템에 대해서 한바탕 수다를 쏟아 내고 나면, 한껏 치유 받는 느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친구들을 못 본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놀이터 친구’들을 못 만나는 사이 나는 요리가 조금 늘었고, 아이들에게 매일 새로운 놀이 프로그램을 제공하느라 창의력을 위시한 잔머리가 늘었으며, 모두가 자유로운 외출을 하지 못하고 나와 비슷하게 생활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공부’를 목적으로 베를린에 왔지만, 그사이 먹고 사는 일에 생긴 크고 작은 위기 때문에 여전히 공부를 주업으로 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보다 늘 부유하고 있는 ‘나’에 대한 혼란에서 비롯된 갈등을 시시때때로 겪고 있다. 비자를 기준으로 하면 나는 이 나라에서 ‘연구’ 활동만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뒤에서 끊임없이 공연을 생각하고, 공연을 조직한다. 그도 시간과 에너지가 여의치 않아 ‘엄마’로서 보내는 절대량이 가장 크며, 틈틈이 돈 버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한 일이다. 말하자면 ‘니가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내가 선택한 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말 뒤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의미를 가끔 나는 견디지 못할 때가 있다. 연극을 하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엄마가 되는 것도, 베를린에 오는 것도, 와서 공부 안하고 돈을 벌고 있는 것도, 그러면서도 계속 작업을 하려고 하는 것도 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내가 선택한 일이다. 이런 나를 보고 엄마는 “염병하고 자빠졌네.”라고 못 견뎌 할 때가 있다.
재택근무 VLOG (출연/제작 이은서, 출처: 유튜브)
‘내 존재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이해해야지 하고 너그럽게 생각하다가도, 그에 담긴 ‘혐오와 배제의 언어’를 떠올리자면 견디기가 힘들다. ‘니가 좋아서 하는 일이면’ 가난쯤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니가 좋아서 떠난 나라면’ 재외국민투표권은 박탈되어도 상관없고(*독일 교민은 코로나로 인해 4.15총선 투표 참여가 불가능해졌다), ‘니가 좋아서 낳은 아이니’ 힘든 건 그냥 감내 하고... 등의 말들. 한 가지 반대의 논리를 펴내는 무리들은 ‘니가 좋아서 독일에 왔겠지만, 넌 그냥 코로나 바이러스니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 정도의 말을 떠들어댄달까.

거지같은 행정시스템으로 유명한 독일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어려움을 겪는 프리랜서, 자영업자, 예술가 등에게 ‘즉시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 줄 설 필요 없이 모든 것을 온라인으로 신청할 수 있고, 기본인적사항, 세금번호, 계좌번호 등을 입력하면, 3일 후 5,000유로(한화 약 680만 원, 1인 프리랜서 기준)를 통장으로 입금해준다. 서류를 들고 줄을 설 필요도 없고, 자신의 피해를 증명할 필요도 없다. 온라인 신청을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하루 정도 필요하지만, 그도 컴퓨터 앞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다. 일단 한번 대기자 명단에 올라가면,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등록하라고 이메일을 발송해주기 때문이다. 지원받을 액수는 따로 적지 않아도 되고, 임의로 약 3개월분의 생활 유지비를 일괄 지급한다. 모든 절차를 간소화하여 일단 시간과 인력 소모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물론 ‘필요한 만큼 쓰고 남은 액수는 반납하게 할 예정이다. 정부에서는 이에 대해 후속 확인 작업을 거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지원금은 소득으로 잡혀 세금 납부의 대상이 된다. 베를린 시에 따르면 4월 1일 기준 신청자 10만 명에게 총 9억 유로(한화 약 1조 2,123억 원)를 지급했다. 베를린 시에서는 "많은 예술 및 창조분야 종사자에게 이 지원금은 생존에 중요할 뿐만 아니라, 베를린의 문화적 기반을 유지하는 데도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프리랜서 및 예술가들이 해당 사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베를린 폭스뷔네 앞 텅빈 거리
방역선진국인 한국의 수도 서울시에서는 협조공문(이라쓰고 협박공문이라 읽는)을 통해 각 문화예술 관련단체, 협회, 시설 등에 '잠시 멈춤' 캠페인에 적극 동참 요청을 했다고 들었다. 잠시 멈추고 싶은 것은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대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전염병 예방에 일조하고, 어서 이 상황이 끝나기를 함께 염원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책은 코로나로 인해 위기에 빠진 예술가의 삶, 국가 문화 기반의 근간을 들여다 볼 생각은 없다. 관객 간 거리 2m를 유지하지 않을 시 300만 원의 구상금을 청구하겠다는 발상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는 ‘함께 협력해서 이 위기를 헤쳐 나가자는 상생의 정책'이 아니다. ‘니가 좋아서 하는 공연이잖아. 이런 전염병 시국에 그걸 꼭 해야겠어?’라고 생각하고 있을 그들의 전제를 떠올리기조차 싫다.

이러니 내가 염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살며 그저 가장 진지하게 몰두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가장 나답게, 나를 지키며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를 위해 예술을 하고, 공부를 하고, 엄마를 하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고 있다. 그래, 좋아서 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짓밟혀도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혐오전염’을 일으킬 위험한 바이러스이다. 전염병이 떠돌기 전이나 후나 여전히 나는 염병을 치르고 있다.

* 이 글의 ‘예술가’라는 단어는 ‘인간’ 또는 ‘국민’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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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서

이은서 연출가, (예술)노동자
<반야삼촌>, <배우의 가치관과 성공가능성에 대한 연구: 30대 여배우 3인의 사례를 중심으로> <아임언아티스트> 등을 연출했다. 현재 베를린에 거주 중이고 여기에서 생기는 경계인으로서의 포지션, 엄마이자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작업의 주요한 테마이다. timeyesspa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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