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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스트리밍을 뚫고 ‘연극적’으로 ‘소통’하기

김방옥_연극평론가

제181호

2020.06.18

코로나 사태가 확산과 진정을 거듭하면서 공연예술계도 조금씩 움직이는 듯하다. 그러나 얼마 전에도 이런 글을 썼고 대체로 연극인이라면 누구나 순간순간 이런 아득함에 빠질 것이다.
“오랫동안 연극을 보아왔지만 이런 낭떠러지를 만날 줄은 몰랐다. 남들이 알아주는 고속도로도 아니고 국도일망정 열심히 걸어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눈 앞에서 길이 끊어져 버렸다. 밑은 컴컴한 낭떠러지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피해야 하는 사회라니, 그것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다니.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의 현재와 미래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눈 뜨고 조용한 악몽을 꾸는 것 같다. 미래를 예견하는 어떤 베스트셀러도 2020년 봄 시작된 전 지구적 역병의 창궐과 비대면의 문명 속에서 공연예술이 처한 운명이나 그 갈 길을 예언하거나 알려주지 못했다.”

웹진 ‘연극in’에서 지난 5월 특별기획으로 마련한 ‘코로나 시대, 대체되는 연극에 대하여’라는 좌담을 읽으면서 안쓰럽고 미안했다. 이런 총체적 위기 속에서 그들이 실질적으로 기댈 곳이 거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여러 지면을 통해서 연극인들이 처한 불안과 타개책에 대해 조금씩 의견들이 나오고 있지만, 연극계에 오래 몸담아온 사람들로서도 이렇다 하게 말해줄 것도 뾰족하게 도와줄 것도 없는 게 현실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인데다가 더 이상 묵은 경험이 무슨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는 아니기도 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기민한 실행이 더 요구되는 세상이다.
웹진에서 마련한 좌담회에서는 단편적이나마 현장에서 우러난 좋은 얘기들이 많았다. 연극인으로서의 불안, 객석의 변화, 일차적 대안으로서의 영상화, 그럴 경우의 미학 및 기술적 문제와 배우 등 참여자들의 권리문제 등... 거의 모든 문제가 명민하게 지적되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공감했던 얘기는 지금 이 재난 상황을 오히려 연극이라는 개념을 사유하고 확장하는 기회로 삼자는 긍정적 제안이었다.1) 이것은 긍정적일 뿐 아니라 어쩌면 유일한 현실적인 제안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말한다. 코로나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만일 사라진다고 해도 다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거라고. 21세기는 전염병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얼마 전 연극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연극인이 아니라고 누가 쓴 글을 읽었다. 그의 글은 코로나 시대 연극인의 생존과 관련된 글이었지만 이는 연극적 대처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극은 더이상 한 장르가 아닐 수도 있다. 코로나에 대한 대응만 하더라도 뮤지컬을 비롯한 보수적, 상업적 공연들은 (온라인화를 하든, 관객보호막을 설치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기존의 공연미학을 상당 부분 유지하며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극장의 중소공연은 많은 부분이 지원정책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에 비해 코로나 사태에서 재정뿐 아니라 미학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공연자와 관객의 밀접한 만남과 대면에 대부분을 걸었던 100석 이내의 소극장 공연들이다. 객석의 숫자가 더 줄더라도 연극의 본질이 연기자와 관객이 생생하게 만나는 것이라는 본질은 어떤 경우건 포기될 수 없다. 그렇다면 코로나를 계기로 ‘연극적 만남’의 변형이나 확장을 시도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한쪽으로 어떻게든 현재의 연극을 질기게 고수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연극이라는 컨셉 자체를 재점검하고 부분적으로 변신하고 확장할 수는 있지 않을까? 실제로 몇몇 연극인들은 이런 시도에 발 빠르게 나서고 있는가 하면, 2020년도 ‘화학작용5’의 주제는 ‘예술가의 정의’라고 한다.

알다시피 코로나 시대의 연극이 일차적으로 눈을 돌리는 곳은 온라인 중계, 혹은 녹화화면의 방영이나 송출이라는 출구다. 현재도 국내외의 국공립단체나 재정이 비교적 튼튼한 극장들은 안정된 플랫폼을 통해 몇 편씩을 선택해 양질의 생중계 혹은 녹화된 화면으로 스트리밍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성격은 다르지만 이미 얼마 전부터 우리는 NT Live나 SAC on Screen과 같은 공연 생중계(녹화 방영)를 경험해왔다. 국립극장에서 NT Live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잘 찍은 공연의 경우는 실제 극장 못지않게, 때로는 그 이상의 감흥을 준다. 십 수 대의 카메라 장비와, 공연을 잘 아는 영상 전문가의 안목과 기술력, 그리고 대형스크린이 동원되며, 혼자가 아니라 다수의 관중과 함께 대극장이라는 공간에서 감상하기 때문일 것이다.2) 이 경우 원래 보수적인 편인 영국 NT의 레퍼토리에 익숙해서인지 우리는 ‘영상=재현=재현의 기술력’이라는 등식에 익숙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차적 목표는 몰입일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몰입의 극치를 추구하는 이머시브 연극이 막 개화하려는 무렵 터진 코로나바이러스는 비대면의 거리두기를 요구하고 있다.)
2014년 국립극장의 NT Live 상영작 <워호스>의 한 장면 ⓒ국립극장
그런데 이번 코로나 기간 중 집에 갇혀 몇 개의 공연 스트리밍을 보던 중 아주 미세하지만 의외의 경험을 했다. 남산예술센터가 제공한 <그녀를 말해요>,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7번 국도>를 잠시 보았는데 배우들이 관객을 향해 직접 말을 걸듯 얘기하는 모습, 혹은 관객을 의식하며 비재현적으로 연기하는 모습들이 생각보다 생생하고 신선하며 집중력 있게 다가왔던 것이다. 물론 기록용 녹화영상이기는 했지만 얼마 전 보다가 포기했던 다른 재현적(제4의 벽) 공연들의 화면보다 훨씬 더 편하고 그 나름의 ‘연극적 효과’가 있었다. 좌담에서 성수연이 “(<그녀를...>에서) (관객에게) 말을 거는 연기가 많았는데 차라리 그러니까 덜 어색하더라...다른 연극 스트리밍의 경우에는 답답하고 소외되는 느낌을 받았다”라는 지인의 반응을 소개했는데 이에 공감한다. 춤이나 노래도 비슷한 효과를 주는 것 같다. 물론 국내의 경우 상대적으로 재현적 무대가 요구하는 녹화촬영이나 공연중계 기술면에서 아직 부족한 탓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화면을 통한 연극적 소통이 소위 비재현 혹은 실험적 공연들과도 상당히 긍정적인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얼마 전에는 삼일로창고극장이 기획한 ‘Performance for price: 클린룸’ 중 김신록의 ‘<위치와 운동> 워크 데몬스트레이션: 시간의 큐비즘’을 보았다. 삼일로창고극장 클린룸에서 김신록이 실시간으로 시청자를 밀착되게 의식하며 의식과 행동과 시간의 불확실성에 관해 데몬스트레이션하는 사이사이 지난 4월 초 그가 신촌극장에서 했던 <위치와 운동>의 공연 녹화 영상이 엇갈려 편집되며 중계된다. 이로써 여러 가지 시간과 공간과 행위들이 분할되고 재편집되고 겹치면서 메타적 층위를 이루는 과정에서 시청자들의 감각과 지각을 일깨웠으며 그가 공연을 통해 소통하려는 메시지가 결코 쉽지는 않았으나 기존의 무대를 떠난 영상 및 비대면의 상황에서 더 도드라졌다고 느꼈다. 성수연의 1인극 <연극의 연습, 연습의 전시-탈인간편>은 인사미술공간에서 이루어진 퍼포먼스를 온라인으로 스트리밍한 것이지만 블루투스 스피커, 로봇청소기와 함께 몇 가지 공연의 연습과정을 통해 다양한 탈인간적 관계성을 구성한 작품으로, 공연적으로나 의미면에서 기대 이상으로 흥미롭고 풍요로웠다. 둘 다 아주 작은 스튜디오에서 최소한의 장비로 수행한 작업이었으나 커뮤니케이션의 채널이 다원화되고 열려있다는 점에서 온라인 공연으로 더 적극적으로 전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연극의 연습, 연습의 전시-탈인간편> 온라인 스트리밍 영상 캡처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bth5FiVo6E4)
공연영상 속에서의 관객을 향한 이런 비재현적 접근은 우리가 이미 익숙한 유튜브의 소통방식과 비슷해서일 수 있다. 유튜브의 화면구성 방식은 무한하지만 대부분 시청하는 상대방을 향한 직접적 커뮤니케이션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연극이 결코 유튜브의 아류로 위축될 수는 없으나 이는 최근 포스트드라마와 함께 주목받은 디에게시스(diegesis)3)의 개념을 떠올리게도 한다. 아무튼 이제 코로나로 인해 디지털 사회가 갑자기 앞당겨짐에 따라 연극의 본질과 범주를 확장할 필요가 있으며 아예 처음부터 디지털로 기획된 방탄소년단의 콘서트를 즐기는 미래의 세대에게는 어쩌면 그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함께 모여서 어떤 행위를 하고 그것을 보는 집단적 행위로서의 연극 못지않게 미디어의 다양한 개입을 통해 공연자와 다수의 개인 시청자들과 무한히 열린 방식으로 동시적, 혹은 시차를 두고 쌍방향 의사소통하는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다. 스트리밍이 데이터를 저장하지 않고 물 흐르듯 계속 흘려보내주는 개념이라면-좀 비과학적 연상이지만-연극은 그 스트리밍에 몸을 맡기지 않고 잠시 정지시키기도 하고 거꾸로 가기도 하고 시공을 재편집, 재맥락화해서 반항하면서도 무한한 개인적 다수에게 접속하는 그런 상상을 해본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영상이나 매체(미디어)의 존재가 20세기 중반 이후 21세기의 포스트드라마의 열풍과 함께 부쩍 사랑받아온 현존(presence), 혹은 라이브니스(liveness)의 중요성을 저해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여기, 강한 접촉에너지, 다 함께...’ 등이 방해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존의 감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매체공연학자 필립 아우스랜더(Philip Auslander)는 미디어화된(영상화된) 공연과 라이브 공연 사이의 경계는 불분명하다고 말했다. 피나 바우쉬나 카스텔루치의 잘 찍은 영상도 그렇지만 전광판 앞에 모여 축구를 응원하는 경우도 그 예다. 미디어를 통해 강렬한 감각을 공유하는 디지털 현존을 얘기하기도 한다. 다양한 세월호 관련 공연이나 장소특정적 연극들은 ‘부재의 현존’, ‘기억의 현존’들이 얼마나 강하고, 호소력 있는가를 보여줬다.

1980년대 이후 독일을 중심으로 연극학에서도 미디어 혹은 매체이론이 활성화되면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미디어가 개입된 공연, 혹은 미디어 퍼포먼스가 반드시 무대 위에 첨단기자재와 영상이 들어오거나 증강현실(AR)이나 가상현실(VR), 혹은 설치미술에 가까운 난해하고 추상적인 컨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연극이라는 장르, 배우, 조명도 미디어이고 매체일 수 있다. 전통적인 연극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반드시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기계들의 퍼포먼스가 중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디어 퍼포먼스는 열려있다. 디지털 시대의 뉴미디어는 그간 연극 고유의 매체적 특징이라고 생각되어왔던 배우의 현존, 재현성, 시공간적 동시성, 시공간적 제한성 등을 재매개할 수 있으며4) 매체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미디어는 그 자체가 생성이며 과정이라고 했다.5)

좌담에서 고주영이 코로나 격리 중 유튜브로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보여준 자발적 퍼포먼스를 보며 연극개념의 확장을 떠올렸듯이, 그 개념이나 명칭이 무엇이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연극)행위와 다수의 개인 관객과의 만남의 방식을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미디어를 배제한 소수의 느슨한 연극 공동체나 관객과 배우를 자연 속에 흩트려 놓는 야외극 같은 것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길게 볼 때 비대면과 디지털은 벗어날 수 없는 키워드가 될 것이다. 그날 좌담회에서는 보다 쉽고 구체적인 예로 온라인상의 낭독회나 연기 데몬스트레이션이 얘기되었는데 이뿐 아니라 일반인을 참여시키는 영상 오디션, 연기에 대한 토크, 기존 연극에 대한 다양한 재해석과 재맥락화, ‘줌(화상회의 어플리케이션)’을 통한 시청자들과의 쌍방향 참여, 짧은 연극을 만드는 과정의 공개와 이를 활용한 새로운 개념의 공연 만들기, 장소특정적 공연과의 접합, 오디오 워크의 확장 등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선희와 진아가’ 프로젝트가 시도하는 영상 편지는 주로 영상에 의존하지만 연기자들의 대중적 소통이라는 면에서 재미있는 시도라고 본다.
선희와 진아가 보내는 [ 기이한 시대의 사랑 : 만날 수 없는 너에게 ] Opening Song 영상캡처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XC_HNgwbGHA)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미 얼마 전부터 그런 현상이 왔지만- 배우, 작가, 연출가는 공동작업의 구성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독립적 크리에이터라는 보다 적극적인 스탠스에서 활동할 수 있다고 본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연극인의 플랜B는 더 적극적으로 매체를 오가며 연기, 연출, 극작을 모색하거나,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독립적 크리에이터들 사이의 협업 등을 생각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고주영도 말했듯이 공동의 플랫폼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이런 영상들이 과연 유료 콘텐츠화되고 참여자 모두에게 공정하게 이익이 돌아갈 수 있느냐 하는 매우 어려운 관문들이 남아있지만 말이다. 덧붙여 예술지원기관의 사업은 비대면의 방식만을 강요하거나 그 결과를 급히 요구하지 말고 예술가에게 더 긴 사유와 시도의 여유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하며 국가는 이와는 별개로 공연예술인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 솔직히 바라는 게 뭐냐고 한다면 이 악몽이 거짓말처럼 걷히고, 코로나로 인한 약간의 깨달음을 얻은 상태로, 서로 민낯을 드러내며 침방울을 공유하고 엉덩이를 좁혀 앉으며 체온과 열기로 텁텁한 극장 공기를 덥히다가 시원한 저녁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바로 얼마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분간, 아니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한국연극계는 2010년대 중반 이후 극의 형식적 가능성이 이미 무한대로 열린 것을 경험했다. 물론 버바텀이나 장소특정적 연극, 뉴다큐멘터리 연극 등이 외국으로부터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세월호나 미투 운동은 젊은 연극인들이 세계를 향해 연극과 공연을 여는 범주를 놀랍도록 넓혀 놓았다. 절실하면 새로운 것은 생성된다.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은 비대면이라는 삶의 공포가 비대면적인 연극적 의사소통을 통해서 정면 돌파될 때 연극적으로도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언젠가 ‘대면 연극’이 상당 부분 정상화된 후에도 반드시 연극의 힘이 될 것이다.  
  1. 최근 송인현 연출가가 「코로나19 이후의 연극은?」, 『한국연극』, 2020, 6월호에서 비슷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2. 김방옥, 「예매창의 열기와 커튼콜의 침묵, NT Live」, 『연극평론』, 2016, 여름호
  3. 플라톤은 작중상황의 전달을 행동을 통한 미메시스와, 서술자가 말로 전달하는 방식인 디에게시스로 구분해서 설명했다.
  4. 이진아, 「뉴미디어와 연극언어의 재매개-로베르 르파주의 <안데르센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드라마연구』 39호, 2013, 173쪽.
  5. 디터 메르쉬, 『매체이론』, 문화학연구회,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9, 237-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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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옥

김방옥 연극평론가
 bangoc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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