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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모인 우리들의 안녕을 위하여

[연극의해] KTS 서울 워크숍

박소연

193호

2020.12.17

언제나 좋아서 하는 일이었음에도 너무나도 자주 괴로웠다. 마음을 놓을 만하면 사건들이 일어났다. 미묘한 불편함과 커다란 충격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무력감에 시달리곤 했다.
공연예술계에 '안전한 창작환경' 과 '보편적 인권'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은 반갑고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웠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난 일들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테니까.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여러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일은 용기가 필요했다.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KTS)' 워크숍이 열린다는 소식을 우연히 인스타그램으로 접하고 신청했다. 부산 워크숍 현장에 가는 그 순간까지 설레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공존했다. 현장에 도착해 몸과 마음의 상태를 1과 10 사이의 숫자로 이야기하며 1분 자기소개를 했다. 지금, 여기에서의 몸과 마음으로 소개를 해나갈 수 있어 편안해졌다. 과거의 경험이나 경력으로 각자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인 상태 그대로를 드러내고 서로 인지하고 존중하며 시작한다는 것이니까. 여기서는 안전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자기소개가 끝난 뒤 돌아가며 자치 규약집 낭독을 시작했다.
우리는 예술가입니다.
우리는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며 예술적 성취를 드높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따돌림과 차별, 성적 괴롭힘 및 폭력 없는 성평등하고 안전한 공연창작 환경조성을 위해 힘씁니다.
우리는 극단, 공연장, 창작자, 예술행정가, 예술교육기관 학생과 교육자, 학부모 모두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창작 과정, 나아가 예술 현장 어디에서든 사용할 수 있는 자율적 규약을 만듭니다.
우리는 공연예술가들이 스스로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위의 선언문을 읽고 부산에서의 지난 10년의 세월 속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10대 후반부터 20대 후반이 된 지금까지 인디음악-공연기획, 연극, 영화의 영역에서 기획자, 연출, 무대감독, 작가, 배우, 가수, 음향감독, 조명감독, 영상편집자의 영역과 역할을 경험해보았다. 다양한 영역에 속해있었지만 단 한 순간도 변함없이 나는 관객이었고 예술을 사랑하는 학생이었다. 그 사실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슬프게도 10년간 변하지 않은 것은 또 있었다. 언제나 일상을 포기하는 기분으로 작업환경에 뛰어들었다는 것. 예술작업에 필연적으로 공존하는 불확실성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자주 일상을 흔들었다. 2018년 #미투운동이 있기 전까지는 미묘한 위계와 차별과 폭력 상황들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늘 막연했다. 작업 현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상황들은 때로는 불편했으며 때로는 위협적이었다.

공연을 만들기 위해 먹고 자고 씻는 시간을 줄여 '가난한 연극쟁이'의 연극을 하던 때도, 노후된 극장 환경과 안전에 대한 불감증으로 머리 위에서 조명기가 떨어졌을 때도, 생활 전반의 안전과 기반을 어디에 요구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몰랐다. 학교 내에서 진행되는 작업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이 책임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 밖을 나와 공연기획을 하던 때에 지인이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가해자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몇 개월간 공연을 올리며 연기를 했지만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급여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는 후배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도대체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몰랐다. 계약서는 어떻게 써야 하고 공연이 끝난 후에 촬영된 영상물은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돈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야 하는 건지, 많은 지점이 불확실하고 애매하게 느껴졌다.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폭력은 명백히 존재한다고 느낄 때 마음이 무너졌다. 동경하던 교수와 선생님, 극단의 대표 등이 오랫동안 성폭력, 위계폭력의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분노와 무력감이 뒤섞였다. 예술이 인간의 삶을 더 낫게 만들지는 못할망정 예술 작업에 참여하는 인간들의 삶을 파괴하고 좀먹고 있다면, 무엇을 위해서 예술이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워크숍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정말 SHOW MUST GO ON 인지 모두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해요. 성취, 성과 위주의 공연을 만들어내는 일이 과연 보편적 인권에 앞설 일인지, 사람보다 공연이 우선인지, 정말 모두가 그것에 동의했는지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어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돌아가며 소리 내서 읽어나갔다. 계약 전, 오디션, 계약, 연습실 리허설, 공연장 리허설, 기획 및 홍보, 공연, 공연 후, 공연 영상을 사용할 때 지켜야 할 규약까지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할 방법들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때때로 공연을 만드는 과정에서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핑계 삼아 수면 아래의 문제들을 굳이 꺼내지 않으려 하거나 나중으로 미루며 현장은 조금씩 안전하지 않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었을 수많은 폭력과 미묘한 불편 상황을 이제는 막아야 한다. 위에서부터가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바깥에서부터가 아닌 안에서부터, 지금, 여기에서 서로가 안전하고 안녕한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몸과 마음 상태에 대해 묻고 이야기 나누며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예술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렇게 모인 소중한 담론을 원동력 삼아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KTS워킹그룹의 워크숍과 같은 예술계 내의 자성의 목소리는 법적인 강제성이나 구속력을 띠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공연예술가들 스스로가 문화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서울 워크숍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마스크를 끼고 있었지만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보며 연대의 힘을 느끼는 듯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고 혼자가 아니다. 현장에 모인 목소리와 눈빛 그리고 규약집은 더 나은 작업 환경이 존재할 수 있다는 희망이자 의지 그리고 믿음이었다. 자치규약으로 문화가 변화하여 용기 내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안전하고 자유롭게 예술과 노동이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란다. 워크숍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던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전달되기를, 견고하고 유연한 연대가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사진 제공: KTS 워킹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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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연

박소연
부산에서 인디-음악공연기획, 연극, 영화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공연예술과 공동창작영역을 경험했습니다. 2017 단편영화 <미경씨>의 각본 제작 연출을 맡았으며 2018 부산-서울을 중심으로 공연했던 BACKSPACE 2018의 공동기획자이자 영상편집가로 활동했습니다.
thdus047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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