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망원동에서 리처드를 찾았어

극단 두 <골목길 느와르-리처드3세를 찾아서 ver0.7>

임승태

194호

2021.01.21

이쯤 되면 마스크를 낀 채 공연을 보는 게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불편하다. 귀가 아프고 안경에는 김이 서리고 숨쉬기는 답답하다. 마스크 덕분에 이 시국에도 공연을 볼 수 있지만, 얇은 막이 때로는 무대와 객석을 가로막는 두꺼운 장벽처럼 느껴진다. 2020년 12월, 나는 망원동에서 리처드 3세를 찾고 있다는 극단 두의 이행성 극장을 찾아갔다. 공연이 시작되었고 배우들이 KF94 마스크를 벗지 않고 출연했다. 낯선 광경이었고 배우의 얼굴을 온전히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컸다. 장벽이 한 겹 더 쌓이는 걸까. 하지만 배우도 사람인 이상 이 시기에 불특정 다수 앞에서 마스크를 쓰는 건 그들의 의무이고 권리다. 어쩌면 우리는 가면극의 시대가 돌아오는 걸 목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를 여러 번 읽고 보았지만 매번 힘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흉한 대상도 정확하게 그려 놓았을 때는 보면서 쾌감을 느낀다 했건만, 중세 도덕극의 캐릭터 악덕(Vice)의 현현이라 해도 좋을, 이 인간을 보면서는 좀처럼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 리처드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듯 차근차근 악행을 저지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악행이 단계마다 더 악랄해지는 것은 아니다. 친형 클라렌스를 런던탑에 보내 죽일 때부터 그는 이미 악행의 정점에 있으며 그 후로도 같은 수준의 악행을 지속한다. 왕관을 쓰기 위해, 쓴 다음에는 지키기 위해 그는 사람들을 속이고 조롱하고 죽인다. 피해자들이 총출동해서 리처드에게 저주를 퍼붓는 5막 3장에 이르러서야 관객은 그나마 숨 쉴 수 있다. ‘절망하고 죽으라(Despair and die).’ 지금까지 리처드에게 목숨을 잃은 인물들이 혼령으로 꿈에 나와 다음날 전투를 앞둔 리처드를 저주하고, 상대인 리치먼드를 축복한다. 앞서 리처드의 악행을 지겹게 봐왔던 독자/관객들은 이 대목에서 혼령과 한마음으로 그들의 소원이 실현되기를 바라게 된다. 비록 리처드가 절망에 빠졌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이어지는 장면에서 작가는 미뤄온 시적 정의를 충족시킨다.
01
이번 공연에서는 5막이 아주 간단하게 처리되면서 ‘절망하고 죽으라’를 듣지는 못했다. 그 대신 리처드가 죽자 그를 ‘못돼 처먹은 인간’이라고 평가하는 코러스의 대사가 비슷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동이향의 각색은 리처드를 추악한 인간으로 치부하고 그를 적대시하는 일반적 독법에 도전한다. 그가 악당인 건 변함없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인간이 있는가.
코러스4
리처드 3세처럼 못돼 처먹은 인간이 되어보고 싶다.
코러스3
그의 마지막은 처참하고 외롭다.
코러스1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인간이 있는가. (공연대본)
마지막이 처참하고 외롭지 않은 인간이 있느냐는 질문 같기도 하고, 못돼먹지 않은 인간이 있냐는 질문 같기도 하다. 전자로 해석하면 누구든 마지막은 처참하고 외로우니 리처드처럼 못돼먹는다고 달라질 건 없다는 뜻이 된다. 후자로 해석하면 우리는 인지하지 못할 뿐 이미 못돼먹은 인간이라는 뜻이다. 내가 <리처드 3세>를 읽을 때마다 느꼈던 어떤 불편함의 실체를 알아버린 느낌이다. 리처드에 대한 거부감과 불편은 기실 내 안에 자리한 못돼먹음을 모른 척하는 데서 비롯했던 것 같다.

<골목길 느와르-리처드3세를 찾아서>는 리처드의 말에 초점을 맞춰 원작을 추리고 장면 사이사이 약간의 코멘트를 덧붙였다. 리처드가 어떻게 악한 일을 저지르고 특히 그가 어떻게 상대를 현란한 말로 제압하는지 보여준다. 배우들은 한 사람씩 돌아가며 ‘리처드’ 이름이 쓰인 마스크를 쓰고 그를 연기했다. 모두가 ‘못돼 처먹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탓인지, 이 장면은 코로나 시대에 대한 풍경으로 먼저 읽힌다. 지난 한 해 우리 주변에도 이런저런 빌런(villain)이 늘었다. 마스크 쓰기를 거부하는 지하철 빌런, 핸드폰까지 끄고 몰래 모이는 빌런 등등. 세상이 어려워지자 악당들이 하나둘 정체를 드러낸 걸까,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더 쉽게 악당이라 부르게 된 걸까. 그런 세상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되묻는다. 너희는 얼마나 착하냐. 너의 마지막은 외롭지 않을 것 같으냐.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얼마든지 빌런일 수 있다. 더 슬픈 건 이미 우리 모두가 피곤하고 지쳤기에 각자의 피치 못할 사정을 이해하기보다 빌런으로 치부하고 분노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사실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던 시절은 이제 없다. 옷깃이 스치면 감염이 의심될 뿐이다. 무대 위 땀과 침이 열정이었던 시절도 없다. 서로에게 바이러스 숙주인 이상, 나는 존재하기에 그러므로 못돼먹었다.
02

영상의 기여가 큰 공연이었다. 지하 소극장 벽면에 망원동 일대를 담은 영상이 차례로 비취자 목욕탕 굴뚝이 런던탑을, 교회 십자가가 리처드가 기도하는 (척하는) 장소를 연상시킨다.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던 것들의 결합이 기묘한 설득력을 지닌다. 다른 결의 영상도 있었다. ‘라이브 카메라’가 배우들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공연장 벽면에 비춰준다. 망원동의 이미지와 리처드의 이미지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고, 벽면에서 이뤄지는 영상 몽타주는 망원동에 리처드의 무덤이 있다는 프롤로그의 선언을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혹시 대면이 불가능할 경우를 대비해서 비대면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언택트’ 연극에 대한 패러디일까? 단순히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 아니라 촬영 감독이 미리 준비한 앵글에 맞춰 찍는 영상이었다. 덕분에 관객은 현존하는 배우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도, 카메라 프레임에 담긴 다른 각도의 영상을 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선택해야 한다. 어렵게 방문한 공연장에서 배우들의 모습을 아무런 매개 없이 직접 볼 것인가, 아니면 내 위치에서는 볼 수 없는 다른 각도의 모습을 볼 것인가. 작은 극장에서 바로 내 앞에 있는 배우의 현존을 두고 스크린 속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심리는 무엇일까? 영상 세대가 현존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악마의 유혹인가, 아니면 영상 역시 현존만큼이나 중요한, 어쩌면 함께 있기에 서로의 가치를 드높이는 공연의 새로운 요소인가.
KF94 마스크로도 배우들의 목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또한 간간이 코믹 릴리프로 사용된 배우들의 제스처 사용이 돋보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안면 근육을 이용한 표정 연기가 여의치 않자 배우들은 손이나 몸을 중요한 의사 전달 도구로 사용했다. 메이어홀드는 무대 환경을 제한하고 최소화할 때 배우의 독창성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평소처럼 배우의 입이 보였다면 그들이 턱으로도 연기를 잘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03
리처드는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의 ‘콰지모도’와 더불어 서양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척추 장애를 가진 인물이다. 셰익스피어는 리처드의 굽은 척추를 그의 더 비틀어진 성품의 가시적 기호로 사용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역사적으로 리처드에게 그러한 장애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작가가 자신의 안티히어로를 비호감으로 만들기 위해 장애를 더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장애인을 타자화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의 비정상적 신체에 실망한 리처드가 악당이 되어 세상에 복수를 감행한다는 동기마저 마련되는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체 건강한 배우들이 악을 형상화하기 위해 신체장애를 재현하는 것을 그때처럼 지금도 묵인해야 할까?

다수는 의도하지 않아도 소수자에게 늘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는 모든 다수는 못돼먹었다. 또한 어떤 소수자는 다른 사안에서는 다수로서 역시 못돼먹었다. 그렇지 않은 인간은 있는가. 어디에도 없음을 인정하자. 극단 두는 리처드 3세를 찾을 수 있는 아주 간단하고도 영리한 방식을 제시했다. 그의 이름을 쓴 마스크를 쓰기만 하면 누구나 리처드가 될 수 있다. 같은 마스크를 관객도 쓰고 있었고,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쓰고 있다. 펜을 꺼내 마스크에 ‘리처드’라고 쓰고 마스크를 써 보자. 차마 밖에는 못 나가더라도 거울을 보며 리처드 3세의 말들을, 아니 아무 말이라도 중얼거려보자.

[사진촬영_김솔]

골목길 느와르-리처드3세를 찾아서 ver0.7
일자
2020.12.17.(목)~2020.12.20.(일)
장소
이행성 극장
각색,연출
동이향
출연
이은정 하치성 김석기 임윤진 하동국 김중엽
원작
윌리엄 셰익스피어
번역
신정옥
드라마터지
손원정
시노그라퍼
손호성
의상디자인
김우성
분장디자인
장경숙
기술감독
김석기
조연출
손나현
라이브카메라
김강민
오페레이터
박지연, 손나현
진행
노희석, 노연주
디자인,사진
싹컴퍼니
공연사진
김솔
주최
극단 두
후원
서울문화재단
관련정보
http://www.playdb.co.kr/playdb/PlaydbDetail.asp?sReqPlayno=162201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임승태

임승태
평론과 드라마터지 작업을 오가며 말과 몸이 만나는 특별한 시공간을 탐구한다.
www.facebook.com/im.seungta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