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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극장을 만져보기

마지막 남산예술센터 백스테이지 투어

원지영

194호

2021.01.21

남산예술센터 마지막 백스테이지 투어
늘 극장에 허둥지둥 골인하는 나는 이 날도 역시 어김없이 극장을 향해 전력질주 하고 있었다. 명동역 1번 출구 언덕부터 빠른 걸음으로 올라 숨이 차오를 때쯤 고지에 모습을 드러내는 남산예술센터로의 진입로는 그 어느 극장행보다 체력소모가 컸으나, 오직 내가 선택한 공연을 하나의 봉우리 삼아 오르막을 걸어 오르는 일은 꽤 강력한 동기였고, 이 역시 객석으로 착석하기 직전의 짧은 예열, 준비운동의 시간이라 생각하면서 역시나 극장 마당을 질주했다. 이 달리기의 끝에는 곧바로 이어지는 극장산책이 예정되어 있었다.

2020년 11월 8일, 남산예술센터의 마지막 ‘백스테이지 투어’에 신청한 날이었다. 백스테이지 투어는 한 달에 한 번 진행되는 극장 투어 프로그램으로 관객 10명가량이 모여 로비에 대기한 후, 무대감독의 진행으로 당일 세팅된 무대에 대한 소개와 함께 극장 곳곳을 돌아보며 함께 걷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함께 모인 열 명의 관객들은 지금부터 투어의 동행자가 되어 1시간 동안 작은 그룹을 이루면서 어둠 속에서 서로 문을 잡아주거나 핸드폰 후레쉬로 앞길을 밝혀주고, 신기한 곳을 보면 함께 눈을 맞추며 웃기도 하며 마지막에는 서로 기념사진을 주고받기도 하는, 소그룹의 작은 여행을 떠나게 된다.

나는 종종 천장을 올려다보는 일을 좋아하는데, 남산예술센터 로비의 붉은 천장은 곧 우리가 진입하게 될 객석의 이면이기도 하다. 언젠가 평일 공연 시간이 일괄 7시 30분으로 앞당겨진 것을 모른 채 착각을 해 입장이 불가했던 날, 계단식으로 비스듬하게 내려가는 산등성이 같은 천장 아래에서 혼자 로비 구석에 있는 공연 서적을 보면서 관객들이 다시 쏟아져 나오기를 기다렸던 것이 떠올랐다. 극장 문 앞에서 어색해진 시간을 달래며 이곳에서 올려졌던 공연의 옛날 리뷰나, 지금은 이미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들의 초기 시절 인터뷰를 읽을 수 있는 구석진 도서관과 같은 자리. 투어가 시작되면 이 로비를 지나 극장 안으로 진입한다.

이 극장은 오르내리는 일이 참 흥미로운 장소이다. 로비에서 계단을 오르면 객석으로 가기 위해 다시 내려가고, 극장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로비는 평범한 1층이지만 입장로는 2층이 되고, 눈 앞에 펼쳐진 극장 무대는 다시 지층과 같은 곳으로 걸어 내려가야 하는, 위 아래를 알 수 없는 계단들이 연결된 마우리츠 에셔의 판화와도 같은 구조를 떠올리게 된다.

남산예술센터를 1962년 처음 지은 건축가 김중업의 설계는 무대, 분장실, 복도, 화장실, 로비 등 극장의 필수적인 단독 공간들을 이상하리마치 연결성 있게 구현해냈다. 무대에서 로비로 연결되는 객석 아래의 지하통로는 숨겨진 무대로서 배우들이 예고 없이 중앙무대로 등,퇴장 할 수 있는 효과를 만들었고, 리프트와 분장실 사이의 비좁은 구멍은 서로를 연결하는 두 장소의 관문이 되며, 플랫폼 바닥의 문을 열어도 분장실로 통하는 계단이 나오게 되고, 화장실과 객석 바닥 사이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창고가 있는가 하면, 극장 벽면을 열면 바로 뻥 뚫린 바깥세계가 등장하기도 한다.

뒷무대에 마련된 트랩 (지하실)의 뚜껑을 열면 갑자기 바닥으로 구멍이 생기는데, 근래에는 무대 창고로 기능하여 무대 물품을 내릴 때에 사용하곤 하였으나 과거에 실제 트랩도어라는 것을 상상한다면 한국 최초의 현대식 극장으로 지어졌던 무대기술의 효과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더불어 혈관처럼 연결된 이 극장 지하세계 어딘가에 실로 살림을 차렸던 설립자 유치진 가족의 집으로서 주거의 기능까지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바, 평소에 관객에게는 오픈되지 않은 비밀스러운 미로들이 간직된 극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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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스테이지 투어’의 진행자이자 남산예술센터에서 지난 2011년 말부터 약 9년가량 근무한 정태환 무대감독은 남산예술센터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이곳이 하나의 ‘유기체’와도 같은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극장이 마치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라는 생각을 했어요. 작은 개별 장소들이 섬세하게 연결되어있는 점이 무대감독으로서는 구조적인 면에서 유일무이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금껏 그런 극장을 본 적이 없거든요. 마당에서 보면 위협적이지 않은 높이가 있는 건물인데 지상을 기준으로 또는 주차장을 기준으로 이 극장을 바라보면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지하의 개념조차 모호하고, 여기에서 입체감이 표현되며 깊이감이 남다른 건물이라는 것. 극장 곳곳을 활용하여 연극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극장 자체가 매우 연극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남산예술센터에는 과거의 오래된 무대기술 장치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요즘은 버튼 하나면 자동으로 해결되는 무대 장치의 전환이지만 이 극장의 배튼 와이어는 손수 도르래를 이용하여 오르락내리락하도록 여전히 밧줄이 매달려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손맛으로(!) 더 섬세하게 조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건축가 김중업의 초기 설계 당시부터 객석 천장의 하중을 담당하던 목조 트러스는 30년 뒤 정기용 건축가의 리모델링 작업으로 넘어가면서도 보존되었는데, 철골보를 걸어 천장의 하중을 해결하면서도 서까래와 같은 나무들이 천장에 빼곡히 남겨진 점은 내가 이 극장에서 가장 애정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가장 낮은 곳에 남아있는 옛날 학교식의 나무 마루와 가장 높은 곳의 나무 천장이 마치 하나의 테두리처럼 이어지는 연결과도 같기 때문이다.

이제 연극이 벌어지던 무대로 진입하면 극장 투어의 내용은 기원전 고대 그리스 극장과의 닮은 점으로 연결된다. 그 시절의 극장이 신과의 대화를 넘어 시민 사회의 토론의 장, 인간사의 해결과제와 정치적 논의를 쏟아내던 광장으로서의 ‘아고라’의 극장이 되었음을 상기하면 남산예술센터라는 장(場)이 그동안 만들어 온 정체성, 그리고 치열하게 확장을 시도했던 극장성이 궁극적으로 닮아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극장 역사의 여러 시절을 포개어보면서 무대를 바라보면, 곧 프로시니엄 테두리를 뚫고 나온 반달의 모양의 아레나 스테이지를 두고 흥미로운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그리다가 멈춘 원의 바깥에는 무대를 직시하는 관객들이 살고, 나머지 미완성의 동그라미 안에는 남겨진 상상의 영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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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유독 잡생각을 많이 하는 나에게 연출자로서 이곳은 여러 이야기를 감싼 깊은 협곡이기도, 한창 준비하고 있는 공연의 소재인 서커스의 어원이자 기원이기도 한 ‘원형(circle)’의 밑바닥과 가장 닮은 장소였으며, 검은 커튼의 막이 열릴 때면 멀리 액자 너머 어둠 속으로 마치 그 다음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불안이, 무엇보다 그 세계로 미끄러지는 비탈의 어디쯤에 앉아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가끔은 웃음이나 졸음을 목격하던 유대감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암실이었다.

이 날은 예외적으로 남산예술센터의 폐관 전 마지막 창작 초연작인 <왕서개 이야기>의 무대효과를 체험해 볼 수 있었다. 극장 조명감독 피율서 감독은 공연에 사용되었던 빛과 소리를 기술적으로 발췌, 편집하여 재현하면서 무대의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객석으로 도착한 우리는 마치 여유 있게 이곳을 전세 낸 것처럼 좋아하는 자리에 각자 앉아 극장의 천공으로 매가 날아다니는 소리를, 오로지 빛과 소리만 남은 극장의 물성을, 벌판의 말 떼들이 모래먼지를 내며 좌에서 우로 우리를 통과하여 달리고 사라지는 환영을 실감나게 감각하면서, 디자인과 극장 기술시스템이 만들어 낸 환상의 한가운데에 온전히 남겨지는 3분 남짓의 시간을 체험했다.

모든 연극이 그러하듯 사라지는 순간이 있어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나, 그 날 백스테이지 투어의 종착지에서 나는 눈앞의 환상이 모두 사라지고 난 후 우리가 돌아간 다음 우두커니 남아있는(을) 건물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초보 창작자로서 괜히 열망하던 극장이었고, 그 끝자락에 서툴게나마 상상한 바를 시도해 볼 수 있었던 작은 운의 수혜자였으나, 마치 주고받지 못한 우정처럼 나는 이기적인 친구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른다. 오늘의 산책에서도 모두 둘러보지 못할 정도로 극장이라는 세계는 아름답고 복잡하며, 견고했지만 의외로 허약했고, 진입로는 높았으며, 우리의 통장보다 값비쌌고, 가끔은 나에게서 멀었다. 다가올 날에 이 문장을 뒤집는다면 누구에게나 가까운, 투박하지만 튼튼한, 문턱도 낮고 개구멍도 많은, 소풍처럼 과일을 싸 들고 연극을 기다리던 그 옛날 뚜껑 없는 산기슭의 극장처럼 쌓아 올린 우리들의 집을 다른 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지켜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사진_원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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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지영

원지영
공연에 자주 늦는 불량관객. 암전이 오면 빛나는 야광별을 보는 것을 사랑합니다.
객석에 파묻혀서 은둔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주 가는 극장 앞이라면 이삿짐을 싸서 살기도 하는 편이지만(?) 어쩐지 자신은 극장 밖으로 나가는 연극을 계속 만들어가는 알 수 없는 행보를 걷는 중. ‘원의 안과 밖’을 오가며 연극을 만듭니다.
onejooyoo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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