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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삶을 살아갈 ‘우리’를 위하여

개죠니의 “안전장치 만들기” 스터디

임정서

195호

2021.02.18

개죠니의 “안전장치 만들기” 스터디는 안전한 삶과 업무 환경에 대해 고민하는 4회차 프로그램이자 모임이에요. 여기서 ‘안전’은 주로 업무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 문제, 차별 등으로부터의 안전을 말해요.

이 주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건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에요. 작년엔 어떤 분에게 성희롱을 당했어요. 기획자의 역할을 먼저 생각해서 문제 제기하는 대신 덮고 가는 쪽을 택했어요. 제 스스로 기준점이 없어서 미숙한 대처를 했어요. 당시 아는 독립 프로듀서와 상황을 나눴는데 저의 고충을 바로 이해하시면서 “프리랜서 기획자로 일할 때 안전장치가 없을뿐더러, 다른 이들의 상황을 안전하게 하는 역할을 하다 보니 스스로를 지키기가 매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했어요.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 몇 주 동안 매일 악몽에 시달리며 지냈어요. 아차 싶었어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말이 그간 이런 일이 덮어지고 용인되는 현재를 만들었구나! 비슷한 상황을 다시 마주해도 흔들리지 않을 내 기준점과 안전장치를 스스로 만들어야겠다!’ 싶었죠.

저에겐 예술가, 디자이너, 기획자 등 여러 정체성이 있어요. 유난히 기획자나 연출자로 일할 땐 문제 해결사가 되어야 하거나 책임이 아예 업무 영역이 되더라고요. 때마침 ‘청년 기획자 플랫폼 11111’에서 공모가 있었고, 안전장치 탐구를 제안했어요. ‘기획자로 나도 지키면서, 프로젝트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하고 있나?’ 궁금했고, 머리를 모아보면 지금보다 나은 미래로 함께 나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프로그램을 스터디와 워크숍을 결합한 형태로 기획했는데요. 우선 함께 어떤 주제에 대해 탐구해보자고 모이는 스터디를 마련했어요. 차별, 부당, 불합리한 문제와 대응, 위기관리 전문가가 아니라서 아직 답을 모르니까요. KTS 워킹그룹이 초기 스터디 모임에서 시작했다는 것도 참고했어요. 집단 지성이 가진 힘이 좋아요. 누군가는 잘 모르는 게 누군가에겐 기초 지식일 수 있잖아요. 머리 맞대면 쉽게 풀리는 일들이 있고, 다르고 다양한 방법을 만나게 되어 좋아요. 물론 서로의 기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기본인 곳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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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엔 각자 경험했던 갈등 상황을 나누고 함께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퍼실리테이터 깨깨 님이 진행자로 참여해 주셨어요. 각자의 경험을 그림으로 그리고 나누는 과정이 흡사 미술 치료 시간 같기도 했어요. 이성이 재단할 수 없는 감정을 함께 살피고 공감하는 시간이 됐는데, 각자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많이 부족했어요. 그날 참여자분들이 그간 “내가 이상한가?” 싶었던 문제에 다른 분들이 공감해 주셔서 그게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하셨어요. 문제 상황에서 이성적인 해결도 필요하지만 갈등으로 받은 상처를 감정적으로 풀고 가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화를 누그러뜨리거나 기름 붓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어요. 어쩌면 태도가 갈등 문제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라는 생각도 들어요. 초등학교 때 학급규칙으로 지겹도록 들은 배려와 존중을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못하나 싶어요.

2-3회차엔 비슷한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의 시도를 선행한 사람들을 초대해 워크숍 형식으로 세션을 열었어요. “안전장치 만들기” 스터디를 기획하기 전에 비슷한 주제를 다룬 워크숍이나 글을 찾아봤어요. 각각 진행 방식, 갈등을 바라보는 관점 등 주목하는 부분들이 다 달랐어요. 대표적으로 2020 서울예술교육 아카데미 ‘질문의 진화’에서 최태윤 작가님의 반인종차별 워크숍도 인종 문제와 국제사회, 범인류적 갈등 문제를 한국인의 시점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큰 배움이 되었어요. (스터디 활동을 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차용한 부분도 있어요)

리서치 기간에는 KTS 서울 워크숍에도 참여했어요. 규약을 강독하는데 ‘2차 괴롭힘’ 부분에서 울컥했어요. 당시 제 프로젝트마다 크고 작게 있는 갈등 문제에 스트레스가 꽤 심했거든요. 워크숍 시작 전에 몸과 마음의 점수를 나누는 게 있는데요. 그날 시작할 땐 마음과 몸의 점수 1이였는데 이런 움직임을 만드는 사람들의 존재와 활동에 큰 힘과 용기를 얻어 집에 올 땐 10점으로 기운차서 돌아왔던 걸 기억해요. “꼭 내 주변 사람들과 이런 얘기를 안전하게 나누고 더 나은 미래를 같이 꾸려볼 거야. KTS의 방법과 도움이라면 가능할 거야!”생각하며 섭외 문의를 드렸어요. 최종적으론 KTS 워킹그룹과 민주주의 활동가들의 협동조합 빠띠 카누팀을 섭외했어요.

“안전장치 스터디” 3회차에선 KTS에 참여하신 분들과 다양한 분야 현장 예술가, 기획자가 얘기 나눌 수 있었는데요. 되레 미술계는 공연계보다 개인 작업 위주다 보니 협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해결 절차나 방법이 더 적다는 얘기도 나왔어요. “KTS가 예술 현장뿐만 아니라 예술 학교에서부터 사용되면 좋겠다, 4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 줄 몰랐다, 주변에 KTS를 많이 소개하고 나누고 싶다”는 피드백이 오갔어요. 저는 무엇보다 KTS 그룹이 토론의 형식으로 활동하는 것이 좋아요. 규칙을 만들고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이런 방법을 탐구해봤는데 어떨 거 같아? 네 의견이 궁금해.”하는 대화의 시도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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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차엔 일일일과 협업 구조로 작업한 민주주의 활동가들의 협동조합 빠띠 행동 강령 워크숍을 진행했어요. 빠띠팀은 일일일의 플랫폼을 만들고 운영하는데 그 소통의 방법이 민주적인 형태가 되도록 고민하신대요. 일일일 사이트 맨 앞에 ‘커뮤니티 약속문 0.9’가 걸려 있어요. 제가 적극적으로 이런 기획 프로그램을 제안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 대문에 걸려있는 약속문이 큰 영향을 줬던 거 같아요. ‘매뉴얼 만들기’라고 스터디를 소개했지만 고정된 매뉴얼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회의 흐름과 인식이 계속 변하는 상태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무언가 하는 데엔 함께 유동적으로 흐르며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룰이 필요해요. 고정되어 족쇄가 되어버리거나, 흐려져 까먹게 되는 먼지 쌓인 매뉴얼 말고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해보는 ‘행동강령’ 같은 장치를 만들어 보기라는 소개의 빠띠 워크숍에선 오픈 소스 활용, 약속문 버전을 업데이트하는 웹 개발자 무리에서 피어난 행동 강령(Code of Conduct) 흐름에 대해서도 알려주셨어요. 계속 논의하고 수정하며 공통의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는 핵심을 짚어주셨어요. 조별로 모임이 하나의 커뮤니티라는 가정 하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단어나 문구로 뽑고, 환영받는 행동, 환영받지 않는 행동을 적어보고 그에 대한 커뮤니티 차원의 대응을 논의했어요. 공동체 차원의 갈등 발생시 조율 방안을 미리 상상해보는 것은 공동의 규칙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에요. 실제 공동체에서는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 규칙들이 어떻게 적용되며, 실효성이 있을까 저도 궁금해졌어요. 일일일의 약속문이 1.0으로 가는 과정이 기대되어요.

4회차는 ‘나만의 2가지 매뉴얼 8쪽 미니북’ 만들기를 진행했어요. 첫째는 ‘경험 개선, 내 기준 체크리스트 만들기’ 매뉴얼 북이에요. 과거 갈등 상황을 돌아보면 대개 감정이 먼저 차올라서 당시 내 대응과 내가 가장 바라던 해결을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되더라고요.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내 경험에서 배울 점을 찾아보는 매뉴얼 가이드라인을 고안했어요. 누구나 각자의 경험을 대입해보고 대안, 대처, 기준점을 세울 수 있게 항목을 제시해요. 객관적으로 문제를 들여다보면 그때 내가 한 실수나 잘못, 미흡했던 점이 보여요. 자책하지 않고 거기서 개선할 수 있는 점을 찾아 더 나은 나를 만드는 매뉴얼이에요. 경험을 바탕으로 기준점을 세우고 다시 비슷한 일을 할 때 흔들리지 않을 내 체크리스트를 적어요. 익명성을 위해 사건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고 익명 처리를 하는 작업도 했어요.

두 번째는 재원님과 함께 고안한 ‘000 사용 매뉴얼, 나는 어떤 약속이 필요한 사람일까?’에요. ‘나’를 기준으로 한 위기 대응 매뉴얼이랄까요? 나의 언어로 표현/묘사하고 본인이 불편함을 느끼는 상황을 적어요. 그 안에서 침해당했다고 생각한 가치를 뽑아 우선순위에 따른 크기대로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요. 상황과 가치를 좀 더 구체화해서 적어보고, 불편한 상황에 대한 나를 위한 해결 방법을 적어요. 예를 들면, 불편한 상황 : 무례한 반말 – 존중과 배려 – 존댓말은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 무시하는 기분을 느낌 – 공식적인 업무엔 존대, 친해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 반말은 천천히 눈치 봐가며 (되도록 하지 말기) – 이런 식으로요. 작성하고 함께 보면서 익명 피드백을 남기며 얘기 나눴어요. 다짐 같은 문구가 많아 이를 모아서 무언가 만들어 볼까 해요. 예의 있게 화내기,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할 말 꼭 하자! 당당히 내 권리 요구하기! 꼰대 체크리스트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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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장치 만들기’ 스터디의 목표는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더 나은 나와 내 미래를 만들자!’였어요. 스터디에 함께 해주신 분들이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그간 풀리지 않았던 고민들의 실마리를 찾아가셨으면 해요.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까지 찾아내셨다면 더 좋겠고요. 저는 함께 만든 매뉴얼 보다 이 과정을 통해 앞으로 다르게 삶을 살아갈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동의 약속을 같이 이야기하고 서로 배려할 수 있는 인식을 넓혀 나가는 것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인지 수준을 높여, 서로 다르기 때문에 범할 수 있는 오차 범위를 줄여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요. 이런 논의를 활발히 해 나아간다면 더뎌도 차차 변화하겠죠.
*개죠니의 안전장치 스터디 ‘나만의 매뉴얼 북’ 정보 및 소식 :
https://forms.gle/x3SmqgiSXL6nDyfp9

**참고사이트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 KTS_ https://kts-wg.com/
사회적 협동조합 빠띠_ https://parti.coop/
청년 기획자 플랫폼 11111 약속문_ https://one.parti.xyz/front/posts/36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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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서

임정서 예술가, 기획자
임정서는 다양한 형태의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예술가 겸 기획자다. 필름메이커 정체성을 중축으로 두지만, 일반적인 형태의 영화는 아주 드물게 만든다. “예술이 무엇일까?”란 질문을 갖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에 “예술”을 비비고 충돌 시키며 실험 중이다. 예술로 누군가의 삶에서 ‘영화적인 순간’을 발생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다. 병과 죽음으로 인한 상실 그리고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우울을 예술로 호방하게 대처하는 자세를 탐구하는 예술 운동 “유방랜드”를 하고 있다. hisuehowru@hotmail.com
유방랜드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YouBangLand
홈페이지:www.jungsuhsuel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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