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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에서 피어나는 내일의 극장

아르코극장 개관 40주년 기념전시 <없는 극장>

조주영

제200호

2021.05.13

"수어통역 영상보기"
(촬영/편집 : 김지성, 녹음 : 윤비원, 음향 믹싱 : 임나윤)
음성낭독_전혜인
음성낭독_최준태

아르코예술극장 개관/폐관 40주년을 기념하며

자주 가는 극장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그곳의 100년 후를 상상해보자. 그곳에 여전히 극장은 있는가? 누군가는 자신 있게 그럴 거라며, 누군가는 잘 모르겠다며, 누군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젓는다. 이때, 누군가가 제안해온다. “그렇다면 우리 한번 과감히 극장이 사라진 이후를 상상해보자”라고. 이 목소리는 비관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이 같은 가정이 우리에게 ‘극장’이란 공간에 대해 어떠한 색다른 사유와 경험을 가져다줄지 궁금해하는 목소리에 가깝다. 제안의 출처는 바로 개관 40주년을 맞은 아르코예술극장이다. <없는 극장>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타 터만 남은 만복사를 무대로 하는 김시습의 소설 <만복사저포기>에서 영감을 받아,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인 2121년, 극장의 터만 남은 곳에서 ‘아르코예술극장 폐관 40주년’을 기념한다. 시인, 건축가, 미디어 아티스트, 세 명의 극작가, 그리고 여섯 명의 배우와 함께. 이들은 오직 이곳 ‘극장’에서만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이야기와 감정들을 자신이 맡은 설치물과 텍스트에 차곡차곡 담아낸다. 그리고 2121년, 관객참여형 전시에 찾은 관객들은 극장의 잔해 사이를 걸으며 위치기반 헤드셋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서서히, ‘없는’ 극장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무언가가 함께 ‘있는’ 극장으로 변모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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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예술극장 로비 1층> 아르코예술극장 제공 Ⓒ 이승무 사진작가

극장 이전/이후의 관객들을 떠올리며

이러한 역설을 강조하듯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상반되는 작품명을 지닌 <극장 이전의 극장, 반전된 캐노피>와 <극장 이후의 극장, 부유하는 기둥들>이다. 전자가 ‘반전된’ 캐노피인 이유는, 아이디어는 외부에서부터 극장 입구로까지 이어지는 통로 위를 덮고 있는 캐노피에서 가져왔지만, 이를 밝은 은색의 금속 재질로 바꾸어 로비의 바닥에 ‘거꾸로’ 설치했기 때문이다. 마치 깊은 수심을 강조하듯 사각 판의 기다란 양 세로 변에는 얇은 흰 줄들이 천장에까지 매달려 있다. 캐노피 주변을 감싸는 <부유하는 기둥들>은 속이 채워지지 않은, 각각 다른 모양과 높이를 지닌 반투명의 원기둥들로 이루어져 있다. 족히 3m는 되는 반전된 캐노피 위를 걸어가면 관객의 머리 위로는 알록달록한 꽃물결의 조명이 천장에 비치는데, 이는 마치 극장이 생기기 ‘이전’, 햇빛과 비를 막아줄 캐노피가 존재하지 않는 빈터에 내리쪼이는 햇빛 같다. 반면 반투명 기둥들은 마치 아테네의 유적처럼 극장이 사라진 ‘이후’ 남게 된, 한때는 극장을 떠받들고 있던 기둥들과 닮아 있다.
극장 이전/이후의 풍경을 둘러보는 동안 헤드셋에서는 극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관객들의 대화가 흘러나온다. 헤드셋 표시가 되어 있는 스팟에 도착하면 음성이 자동으로 재생되는데, 관객이 위치한 곳에서 보이는 풍경과 일치하는 오디오는 대화에 더욱 몰입하게 한다. 관객 대기 공간에서는 꼭 자기 얘기를 하는 것만 같아 이 공연을 보러 왔다는 관객, 계단에서는 동기의 작품을 염탐하러 왔다는 연출가, 대극장과 소극장 사이에서는 초조하게 희곡을 위한 영감을 기다리는 극작가, 사무실 앞에서는 극장에 올 때면 ‘그 사람’과 함께 공연을 보러왔던 때가 생각난다는 어느 방문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들의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어느새 그동안 자신이 이 극장을 찾았던 이유와 공연을 함께 보러 왔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헤드셋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반응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치 적적한 극장 속 발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무빙 스포트라이트는 그들을 따라다니며 환하게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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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예술극장 로비 1층> 아르코예술극장 제공 Ⓒ 이승무 사진작가

극장을 서성이는 김주근들을 기억하며

본래 연극이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제사였던 것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와 대화로 채워진 극장은 이따금 제의와 애도의 공간으로 변한다. 헤드셋 테스트를 위해 가장 먼저 들은 오디오에서는 이름이 ‘김주근’으로 기입되어 있어 결국 공연을 보지 못할 처지에 놓인 ‘김수근’이라는 관객과 극장 안내원 간의 대화가 흘러나온다. 그의 이름이 하필 ‘김수근/김주근’인 것은 서울대 문리대가 관악으로 이전한 이후부터 혜화가 지금과 같이 문화예술의 메카로 자리 잡기까지 큰 공헌을 한 사람이 건축가 김수근이었다는 점을 환기한다. 전시 동안 여러 번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 그의 목소리는 사후에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을 서성이는, 지금의 동숭동을 있게 한 수많은 영혼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빈자리는 이제 ‘지금-여기’의 극장을 지키고 있는 산 자들의 목소리로 채워진다. 카페 앞에 섰을 땐 아포토시스(세포자살)를 다루는 어린이 과학연극에서 또다시 죽는 연기를 하게 된 배우와 그보다 더 그의 죽음에 대해 염려하는 한 팬 간의 대화를 듣는다. 배우는 아포토시스와 연극의 공통점에 대해 언급하며 만약 우리가 “우주의 우주만큼 광활하고 대단한 프로그램”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면, 건강한 몸(이야기)을 만들기 위해 예정된 때가 되면 죽는 세포들(배우들), 지하철이나 바다에서 모르는 사람을 구하고 죽은 사람들, 즉 “이제는 때가 된 죽음” 혹은 “어떤 죽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이들이 머물던 카페 테이블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는 관객은 그러한 마음들, “빛이 되어” 사라진 배우와 그의 팬, “이번에도 그렇게 된” 극작가, 4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이들, 즉 수많은 ‘김주근들’을 함께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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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예술극장 로비 2층> 아르코예술극장 제공

낯선 행위자들로 채워질 극장을 상상하며

<없는 극장>의 프로그램에는 본 전시의 기획 이유와 관련해 “극장이 나아갈 내일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면 공연예술 장르 자체가 세계적인 위기를 맞은 현 상황을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밝히고 있다. ‘대면’을 전제로 하는 공연예술을 포함한 많은 활동들의 위기가 이제까지 인간이 자신과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다른 생명체들을 망각해왔기에 초래된 것으로 본다면, “극장이 나아갈 내일”에는 그동안 가시화되지 않은 수많은 비인간 “행위자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업이 결코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없는 극장>은 이러한 낯선 행위자들을 소환하고 있었으며 이는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반가운 부분이기도 했다. 2층의 창가에서 관객은 (마치 창밖으로 보이는 마로니에 공원 속 행인과 비둘기의 대화를 엿듣는 것처럼) 인간과 비둘기의 대화를 듣게 된다. 이는 얼핏 보면 인간에게 이별을 고하는, 둘 사이의 로맨스로 보이는데, 관점을 달리하면 이는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두는 인간을 향한 비둘기의 호소처럼 들린다. 비둘기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죽으려고 할 때 비둘기가 머리에 와 앉은 것이 ‘신의 계시’였을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하나의 ‘선택’이었을 뿐이라고. 또한 사랑한다면 자신을 “해방”시켜달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지하 1층 연습실에서는 자신의 ‘후손’인 인간들에게 남긴 ‘홀리 카카로치’의 메시지가 들려온다. 맨 마지막에 듣게 되는 이 히든트랙에서 카카로치는, 비록 인간들은 자신을 하나의 ‘소음’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으나 자신은 구약/신약, 중생대/신생대, 흑사병/코로나, 빙하기/지구온난화를 지나 현재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았으며 앞으로도 자신은 늘 “극장 지하 벽돌 하나 틈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카카로치와 비둘기가 남기고 간 일종의 경고는, 인간만이 프로타고니스트로 등장하는 “세상이라는 극장”은 더 이상 ‘안락한 집’이 아닌 (지하 1층의 <비정형의 문들>처럼) 침투와 교란이 반복되는 극장 안팎의 생태계를 비추는 “자연의 거울”로 탈바꿈해야 함을 내포하고 있다. 극장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는 비둘기, 날아서 내려가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는 지문처럼 스스로를 변태/진화시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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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예술극장 지하연습실> 아르코예술극장 제공
전 지구적 공멸이 아닌 민주적 공진화를 위해 상상해야 하는 내일의 극장의 모습은 <작가 필립>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앞에 서면 들려오는 오디오에 의하면 ‘작가 필립’은 로봇 배우이자 ‘극장’ 그 자체이다. 그의 머리는 극장 조명을 상징하듯 손전등으로 되어 있으며 다섯 손가락을 포함한 몸은 극장을 구성하는 수많은 혼합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극장이었을 때 자신 안에는 배우들, 무용수들이 살았고, 빛, 소리, 말들을 품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전시 동안 인기척을 넘어 드디어 발화할 기회를 가진 비둘기와 카카로치까지 더해지면, <없는 극장>은 극장이 자연과 ‘유리된’ 공간이 아닌 오히려 자연과 문화가 ‘만나는’, ‘물질성’이 가장 극명히 드러날 수 있는 생태적 공간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전깃줄 끝에 매달려 있던 어린 새가 떠났을 때 사람들은 그제서야 새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는 구절을 들을 땐, 새가 떠나기 전에 그 새를 극장에서, 관객들과 함께 주의 깊게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보카치오가 흑사병의 한가운데서 사랑을 이야기한 것처럼 김시습 또한 부조리한 세태 속 생인(生人)과 사자(死者)의 애정을 다룸으로써 강렬한 생의 의지를 표출했다. ‘없는 극장’을 나설 때 즈음엔 이곳을 다녀간, 다녀가지 못한 관객들 또한 ‘두보의 시’와 관객의 뒤에서 부르던 ‘소리꾼의 사랑 노래’를 부디 오래도록 함께 부를 수 있기를 바라보았다.
두보의 시
원해조간미록유(遠害朝看麋鹿遊)
“해심에서 멀어지니, 아침에 고라니와 사슴과 노네”

소리꾼의 사랑 노래
“나는 당신의 머나먼 미래이거나, 언젠가의 과거였던 사람 ... 슬픈 눈의 배우여,
외로운 사랑은 곧 끝날테니 ... 극장의 불 밝아오면 ... 사랑한 이들 그대를 기다려,
다시 만나 감싸 안고 ... 두려움 없이 사랑하는 그대여 ... 그대 숨쉬니 나는 숨쉬고
그대 숨으로 나는 숨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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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영

조주영
좋은 인간-동물이 되고 싶은데 매일같이 딜레마에 빠집니다. 여섯 번째 대멸종을 앞두고 연극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jin021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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