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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극 창작자의 기쁨과 슬픔

어린이·청소년극 창작자 에세이

박영

제201호

2021.05.27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첫 극장 나들이를 했다. 엄마와 함께 어린이날을 맞아 MBC에서 주최한 어린이 뮤지컬을 보러 갔다. 가기 전날부터 입고 갈 옷을 미리 입어보며 기대에 부풀었다. 엄마가 공연이 끝나면 햄버거도 사준다고 해서 더더욱 신이 났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히 외출 준비를 했다. 흐린 날씨였지만, 내 마음만큼은 반짝였다. 보라색 멜빵 반바지에 흰색 스타킹과 검은 구두를 신고 경쾌한 투스텝을 밟으며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다. 난생처음 가보는 극장은 너무 넓고, 너무 깜깜하고, 너무 시끄럽고, 너무 눈부시고, TV에서만 보던 연예인이 눈앞에 있어 너무 신기한, 그야말로 ‘너무너무’ 한 공간이었다. 앞에서 3번째 줄에 앉은 나는 바닥에 잘 닿지 않는 두 발을 신나게 흔들며 홀린 듯 공연을 보았다. 공연이 끝나고 먹은 햄버거 역시 꿀맛이었다. 동네에서는 절대 먹어볼 수 없는 ‘시내의 맛’이었다. 흔쾌히 별점 다섯 개를 줄 수 있는 어린이날이었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인데도 ‘약속은 약속. 어떠한 경우든 약속은 지켜야 해~’ 코미디언 이용식 님이 불렀던 노래를 지금도 흥얼거리는 걸 보면 첫 연극 경험이 무척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극장 의자에 앉아 두 발을 신나게 흔들던 그 어린이가 자라 이제는 지금의 어린이를 연극적 세계로 초대하는 창작자가 되었다.
무대에서 만난 어린이 관객은 저마다 고유한 관람 태도, 표현 방법, 취향을 가지고 있어 경험할수록 그 개성에 감탄하게 된다. 작년, 코로나19로 인해 매회 한 가족만을 관객으로 초대하는 어린이 공연을 했다. 이렇게 조촐한 숫자의 관객을 만나본 적이 없어 낯설었지만, 한 명 혹은 두 명의 어린이 관객의 고유한 특성을 발견하기에는 탁월한 환경이었다. 적극적으로 추임새를 넣으며 점점 무대 앞으로 다가오는 아이, 배우와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워하며 엄마 뒤로 숨으면서도 장면에서는 절대 눈을 떼지 않는 아이, 옆으로 누워 자신의 팔로 머리를 받치고 TV를 보듯이 편안하게 즐기는 아이,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묵직한 바위처럼 앉아 조용히 집중하는 아이… 아이들 취향 또한 달랐다. 누군가는 배우가 모자와 목도리를 벗고 안경을 쓰며 다른 역할로 바뀌는 순간에 집중했고, 누군가는 악사가 연주하는 다양한 악기 소리에 매료되고, 누군가는 주인공 펭귄에게 이입되어 이야기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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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극 <뒤뚱이의 편지>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 (2019)
창작자로서 좋은 어린이극에 대한 확신을 품고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크지만, 어린이 관객을 만나면 내 욕심이 지나치게 무겁고 심각했구나 싶다. 언어적 평가가 익숙한 성인 창작자에게는 나이가 어린 관객일수록 말과 글로 피드백을 받기 어려워 이것이 종종 곤란하면서도 미진한 부분으로 남는다. 그러나 연극이 언어 그 너머의 것임을 알려주는 것 역시 어린이 관객이다. 현장에서 고유한 빛으로 싱그럽게 반짝이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볼 때면 ‘이것도, 저것도, 그것도 해봐도 좋겠다!’라는 가능성을 활짝 열어주는 것 같아 오히려 힘을 받곤 한다.
대부분 어린이는 양육자나 선생님 등 주변 성인의 선택으로 공연장에 오게 된다. 어린이는 성인처럼 스스로 공연을 찾아보고, 가격을 지불하고, 혼자 공연을 보러오지 못한다. 결국 어린이 주변에 연극 관람을 권유하는 어른이 없다면 연극을 볼 기회가 현저히 줄어든다. 이 기회는 어린이가 사는 지역, 가정환경, 경제적 상황, 양육자의 관심사 등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린이극에서는 극장 공연뿐만 아니라 어린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순회공연도 어린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연극 경험의 한 조각이다.
대학원 1학년 때 처음으로 어린이극 순회공연을 다니며 그 매력에 푹 빠졌다. 어린이가 주인이 되어 공연팀을 맞이하는 곳에서 펼쳐지는 연극적 세계는 어린이들에게도, 창작자들에게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어린이들은 학교, 도서관, 아동 센터 등 자신의 일상 공간이 극장으로 변신한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무엇이 달라졌나 관찰한다. 그리고 창작자들에게 “오늘 뭐 하러 왔어요?”라고 알면서도 계속 묻는다. 그만큼 어린이와 창작자 사이의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진다. 무대와 객석으로 나뉜 위계가 슬쩍 흐릿해지면 배우와 어린이 관객은 함께 공연을 만들어가는 감각을 현장에서 공유한다. 배우들은 어린이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낚아채 극적인 요소로 확장하고, 어린이들의 호흡과 말, 웃음, 감탄사, 박수, 몸짓 등에 맞추어 대사의 속도를 조절하기도 한다. 그리고 연기하면서도 동시에 어린이 관객이 포함된 큰 의미의 공연을 함께 보는 신비한 경험을 하곤 한다.
공연이 끝나고 몇몇 어린이들은 배우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이 악기는 이름이 뭐예요?”, “또 어디서 공연해봤어요?”, “왜 이렇게 땀을 많이 흘려요?”라고 궁금한 것을 묻는다. 또는 선심 쓰듯이 소감을 툭 던지며 “5학년이 보기엔 조금 유치했는데 그래도 재밌었어요.”라고 말하거나 “깃털 한번 만져 봐도 돼요? 깃털 장면이 제일 재밌었어요.”라고 말하고는 문방구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깃털인데도 자신에 뺨에 비비며 황홀해한다. 공연 내내 뚱하게 앉아 있다가도 공연이 끝나면 무대 철거를 척척 도와주는 어린이도 있다. 순회공연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이런 팔딱거리는 순간은 내 안에 알록달록 색실로 새겨져 자꾸 만지며 떠올리고 싶은 장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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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씨어터 <시르릉비쭉할라뽕> 전주 공연. 관객 입장 전의 모습 (2018)
어린이가 극장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직접 찾아와 공연을 보는 경험은 공연 전후의 과정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극장을 찾아오는 길, 매표소에서 표를 찾는 과정, 극장에 입장하여 공연 시작을 기다리며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공연 시작 직전의 암전, 공연 관람 후 사진 촬영, 공연 프로그램 북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까지 모두 총체적인 연극 관람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 시대를 사는 요즘, 집에서 클릭 한 번으로 공연을 볼 수 있게 되면서 이러한 오프라인의 경험을 온라인 관람 경험으로 연결 짓는 것은 창작자들의 도전 거리가 되었다. 작년 한 프로덕션에 참여하여 어린이들에게 공연이 포장 완료된 하나의 상품으로만 다가가지 않도록 ‘온라인 극장 안내서’를 별도로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표 구매부터 시작하여 공연을 보러오는 과정, 극장 입장 후 안내 멘트, 무대 셋업 과정 등을 보고 들으며 현장감을 조금이라도 살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달라지는 공연 관람 문화에 맞추어 어린이의 삶에 연극이 잘 안착하여 녹아들 수 있도록 이러한 시도들이 고군분투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어떤 배우에게 어린이집에서 마스크를 쓰고 공연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관객이 되어 무대에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배우를 본다고 상상해보았다. 정말 낯설고 이상했다. 어린이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알겠지만, 마스크를 쓰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을까? 생각이 많아졌다. 창작자가 어린이를 극장으로 초대하면 원칙을 조율할 수 있지만, 순회공연에서는 창작자도 외부인이기에 그곳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그것에 배우의 마스크 착용도 포함된다는 것을 코로나 덕분에 알게 된 거다. ‘그래도 공연이 취소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잖아.’ 싶다가도 ‘앞으로 계속 이러면 어쩌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또 다른 도전 거리가 빼꼼 문을 열고 찾아왔나 보다.
적응한 듯 낯설고, 변화한 듯 그대로인 이 아리송한 시대를 살아가는 어린이 창작자와 어린이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고 싶다. 부디 극장이 될 수 있는 어디에서든 만나요, 우리. 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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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

박영 연극 하는 창작자.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 강사
백발의 노배우가 되어 무대에서 어린이 관객을 만나는 장면을 떠올리면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어린이들의 유연성을 본받아 연극의 가장자리를 넓혀가는 작업을 하고 싶다. 개인의 몸적 서사를 발굴하여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좋아해 소매틱(somatic)과 연극을 연결하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 최근에는 어린이극과 페미니즘을 연결하는 작업에 관심을 두고 “나다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pbbang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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