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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축.자] 축제를 썰어 이 여름을 먹어치우자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성수연_배우

제205호

2021.07.29

연극in 웹진은 여름의 공연예술축제를 대상으로 7월 한 달간, 해당 축제가 추천하는 최고의 후원자에게, 자신이 덕질하는 축제를 대놓고 자랑하는 꼭지를 마련하였습니다. 해당 기사는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서, 그 내용의 면면은 웹진의 편집방향과 다소 다를 수도 있습니다. 코너의 참여를 원하는 축제와 필자가 있다면 webzine@sfac.or.kr으로 기고해주시면 되겠습니다. - 편집자주.

새소년의 곡 '자유' 에 이런 가사가 있다.
'나는 알아. 내가 찾은 별로 가자. 달을 썰어 이 밤을 먹어치우자.'
달을 썰어 밤을 먹어 치우자니,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이 부분을 듣고 있자면 마음속 어딘가에 내가 꽉 쥐고 있던 불안이 조금씩 가열되어 노랫소리와 함께 증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황소윤을 좋아한다. 목소리가 좋고, 멋있고, 페미니스트이고, 무엇보다 음악이 좋다. 그리고 나와는 영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만 같은 그가 써 내려간 멋진 가사들이 나와 턱 만나지는 순간에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삶의 방식을 갖고 있는 것만 같은 사람. 나와는 너무 달라서 불편하고 불안하지만, 그가 발견한 것을 같이 발견한 순간 뿌듯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멋진 사람.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가능하다고 믿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내가 머물러 있는 세계 너머에 있을 가능성을 일렁일렁하는 마음으로 자꾸만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매해 여름, 프린지에서 그런 사람들을 잔뜩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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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월드컵 경기장 어딘가에 숨어서 경기장 전체를 울리는 태평소 소리로만 관객들에게 다가가던 사람, 링 위에 서서 본인이 쓰러질 때까지 관객과의 한 판을 벌이던 사람, 셰익스피어 고전을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이한 방식으로 들려주던 사람, 공연 직전까지 보채는 자신의 갓난아기를 달래다가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순식간에 아기를 동료배우로 만들어 관객들도 아기도 웃게 만들던 사람... 일일이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멋진 사람들의 빛나는 순간들을 프린지에서 만났다. 그런 순간들을 볼 때면 마음이 일렁일렁한다. 나에게 익숙한 문법과 익숙한 세계가 균열하면서 불편함과 불안감이 올라오기도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불안은 더위와 함께 서서히 증발한다. 불안이 나로부터 잠시 자유롭게 해방되고 나는 사랑에 빠진다. 물론 그들은 프린지가 아니어도 멋졌을 것이다. 어쩌면 프린지여서 오히려 덜 멋졌을 수도 있고 혹은 프린지의 분위기에 힘입어 조금 더 멋졌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프린지였기 때문에 그들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관심을 갖고 계속 찾아다니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기도 어려웠을 아티스트들과, 쉽게 볼 수 없는 그들의 공연이 프린지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다. 관객으로서 이것은 정말 행운이다.

프린지의 기본이자, 가장 소중한 원칙 중 하나는 바로 ‘자유참가’다.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축제에 참여할 수 있고 아티스트로 환영받는다. 장르의 제한도 없다. 연극, 음악, 미술, 무용, 영상, 마임, 거리예술, 전통연희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장르의 예술가가 프린지에 온다. 나이나 경력의 제한도 없다. 늘 해오던 것과는 좀 다른 실험을 해보고 싶었던 기성 예술가들도, 학교 안 청소년들도 학교 밖 청소년들도, 1인 창작자도, 구성원이 스무 명이 넘는 팀도 프린지에 온다. 무엇보다 아직은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거나 발표한 작업이 없어 관객을 만날 기회를 갖기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프린지는 훌륭한 데뷔 무대가 된다. 누군가의 빛나는 첫 시도의 순간에 프린지가 있다. 데뷔든, 신작 발표든, 처음으로 도전하는 새로운 장르든, 처음으로 도전하는 새로운 포지션이든, 용기를 내어 첫 시도를 하기에 프린지는 훌륭하다. 경험이 있든 없든, 나이가 젊든 많든, 예술을 직업으로 하든 취미로 하든, 축제 기간에 그들은 프린지 아티스트다. 또한 연극, 실험극, 무용극, 다원예술, 전시, 퍼포먼스와 같은 기존 용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거나 굳이 설명할 이유가 없는 그 모든 공연들이 프린지라는 언어로 설명이 된다.

자유참가라는 '형식' 으로 모두를 환대하는 프린지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보이지 않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여러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고 그 숫자도 적지 않지만(2020년에는 140팀이 넘는 아티스트가 축제에 지원했었다), 최대한 각각의 아티스트들에게 맞는 방법으로 소통하기 위해 애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신중하게 인터뷰를 하며 아티스트들의 특성과 니즈를 파악하고, 다양한 장르의 작업자들을 아티스트와 사무국 간 소통의 매개자로 섭외하기도 하고, '마이크로포럼'1)등의 자리를 독려하며 아티스트들의 이야기를 소중히 듣기도 한다. 아티스트들이 원하는 만큼의 관객을 만나게 하기 위한 일에도 애를 쓴다. 또한 자유가 무책임으로 이어지는 일이 없도록 상호 존중을 위한 여러 과정을 마련하여 정성스레 진행한다. 무더운 여름에 그 모든 일이 쉽지 않을 텐데도 항상 상냥하고 다정한 '태도'로 모두를 환대한다.

내 머릿속에서 프린지는 항상 어떤 사람의 모습과 함께 떠오른다. 하얀 얼굴에, 웃음소리가 마치 냉장고에서 갓 꺼낸 사이다처럼 청량한 사람인데(심지어 자주 웃는다!), 7년이 넘도록 더위 속에서도 폭우 속에서도 걱정 속에서도 그 사람이 찌푸린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프린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 환대하는 마음으로 모두를 바라보는 사람들. 축제를 정말 축제로 만드는 사람들. 개개인의 프린지 스태프들이 감정노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면서도, 그 밝음에 전염되어 거의 진액을 뻘뻘 흘리면서도 "안녕하쎄오~~!" 하는 인사가 절로 나온다. 서로가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것만 같은 이상한 에너지에 또한 마음이 일렁일렁한다. 어쨌든 프린지에는 초청 공연이 딱히 없으니 프린지에 참여하고 아니고는 순전히 아티스트들의 마음에 달려있는데, 꾸준히 프린지에서 작업을 발표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꽤 많다는 것, 그리고 매해 프린지를 보러 오는 관객들이 있다는 것, 작년의 스태프가 올해의 아티스트가 되기도 하고, 올해의 아티스트가 내년엔 인디스트2)로 참여하기도 하는 식의 어떤 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프린지의 환대가 분명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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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프린지페스티벌2021 티저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QnXKym6SytE)

2015년부터 프린지에서 프로그래머라는 포지션으로 가깝고도 먼 거리에서 프린지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나는, 매해 프린지가 어떤 숙제를 안고 다음 여름을 준비하는지,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프린지'라고 했던가. 월드컵경기장에 축제를 안착시켰을 땐 공연이 가능한 공간을 발굴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수도 없이 공간을 탐색했고, 경기장 내 관객들의 공연 관람을 위한 이동의 편의와 놀이성을 위해 자전거를 도입해보기도 했고, 자전거를 타고 보는 축제가 아무리 즐거웠어도 지향하는 축제성과의 거리가 확인되었을 때 다음 해에는 미련 없이 포기하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코로나19로 인해 오프라인 축제 진행에 제약이 생기고 공연의 스트리밍 서비스가 활성화되던 작년엔, 온라인 축제를, 무려 게임 형식으로 만들어 진행하기도 했다. 프린지는 언제나 지금, 여기의 예술가들과 관객들에게 프린지가 어떤 의미의 축제가 되어야 하는지 열심히 질문하고 그 답들을 성실히 기억하여 반영하려 애쓴다. 지금, 여기에서 지향해야 하는 가치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2021년, 프린지는 또 지금, 여기에 걸맞는 프린지를 준비하는 중이다. 지난 몇 년간 프린지는 상암월드컵경기장과 문화비축기지에서 축제를 열었는데, 개별 아티스트들에겐 공간의 특수성이 제약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그때 그곳에서만 가능했던 멋진 순간들이 있었고, 스태프, 아티스트, 인디스트, 관객들 모두가 한데 모여 한껏 축제의 기분을 만끽할 수도 있었다. 한 곳에서 대규모로 관객을 만나는 형태의 축제가 어려운 지금, 그러나 함께 모여 있을 때 가능했던 축제성을 이미 경험한 지금, 프린지는 극장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축제와 뜻을 함께할 수 있는 마포구와 서대문구 일대의 여러 대안공간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또다시 축제의 가능성을 확장했다. 예전처럼 자연스레 한데 모여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기 어려운 만큼, '마이크로포럼'과 '관객과의 대화'를 확대하는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축제와 관객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이다.

기후위기를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는 이 시대에 축제가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을 성실히 모색하기 위해 '에코프린지위크'를 준비한 것도 올해 프린지의 특징이다. 이미 매해 최대한 축제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나 일회용품을 줄이기 위한 방법들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공연 외 가장 큰 기획행사로 '에코프린지위크'를 마련한 것은, 이 사안을 함께 이야기하며 사회에 영향을 미치도록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프린지의 의지가 그만큼 강한 것으로 느껴진다. 이미 많은 예술가들이 이런 이야기들을 작업 안팎에서 열심히 나누고 있다. 그와 함께 축제 단위에서 이런 이야기가 크게 이루어졌을 때의 파급력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관객 입장에서는 감사한 마음으로 이런 의지를 반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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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올해 프린지의 컨셉은 '자유'다. 축제를 즐기기 이렇게나 부자유스러운 시기에, 게다가 이미 '자유' '독립' '시도'와 같은 말들을 수식어로 달고 있는 프린지가, 새삼스럽게 '자유'라는 단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쉽고 익숙하고 또 커다란 말이어서 구체적인 의미가 되지 못한 채 그냥 그런가보다 흘러가버리곤 하는 '자유'의 의미를 올해의 프린지와 함께 생각해보려 한다. 사실 우리에겐 이제 더 이상 일회용품을 멋대로 쓸 자유도, 단지 한 번 웃자고 누군가를 비하하는 농담을 할 자유도 없다. 그것은 자유인 척하는 폭력이었음을 이제는 알고 있다.

아주 부자유스럽고, 불편하고, 불안한 여름이다. 더운데 마스크를 벗을 수도 없고, 시원한 음료 하나 사 먹으러 카페에 들어가는 것도 조심스럽다. 다 함께 모여서 수박이라도 썰어 먹으며 더위를 이길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나는 그냥 조심스레 프린지에 가려고 한다. 마음을 일렁일렁하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렇게 프린지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이다음 프린지는 또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보고, 멋진 아티스트들이 새로이 바뀐 이번 프린지에서 들려준 이야기들을 곱씹고, 이 불안한 여름을 축제를 썰어 먹어 치우며 버틸 생각이다.

홈페이지(https://www.seoulfringefestival.net:5632)에 나와 있는 71개의 참가팀 소개와 그들의 작업 소개를 읽는 것만으로도 벌써 축제가 시작된 기분이 든다. 프린지에 자주 참여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의 작업 소개를 보면 마치 좋아하는 아이돌의 컴백소식을 접했을 때처럼 두근거린다. 프린지 소식은 페이스북 페이지(https://www.facebook.com/seoulfringefestival)에 자주 업데이트되고 있으니, 팔로우해서 소식들을 보며 축제 기분을 미리 즐기고 있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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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저영상을 시사회하는 프린지 스탭들

프린지가 없는 여름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누가 나에게 프린지가 뭐냐고 묻는다면 정확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왜 이렇게 더위에 치를 떨면서도 정확하게 설명도 못하겠는 이 축제의 시작을 목을 빼고 기다리게 되는지, 진액을 뻘뻘 흘리면서도 기를 쓰고 찾아가게 되는 그 마력의 정체는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프린지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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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성수연
배우, 창작자. 희곡연기, 1인창작, 공동창작 등 다양한 형태의 연극작업을 하고 있다. 프린지에서는 파이리라는 이름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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