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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한국어(한글)로 만난 「가자 모놀로그」

이예원

제249호

2024.01.25

지난 11월 19일, 팔레스타인 라말라 소재 아슈타르 극장(Ashtar Theatre)에서 전 세계 연극인에게 연대를 요청했습니다. 아슈타르 극장의 청소년 워크숍 참여자들 31명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극 「가자 모놀로그(The Gaza Mono-logues)」를 11월 29일 세계 각지에서 낭독 또는 공연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1991년에 설립된 아슈타르 극장은 애초 연극인뿐 아니라 시민, 특히 청소년 대상 연극 교육 단체로 시작한 곳입니다. 2010년에 창작된 「가자 모놀로그」 대본은 상연에 앞서 14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해 10월 17일 하루에 걸쳐 36개국 60개 도시에서 1,500여 명의 청소년이 아슈타르 극장의 창작극을 무대에 올렸다고 합니다. 같은 해 11월 29일에는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두 차례 상연되기도 했습니다. 11월 29일은 유엔이 ‘세계 팔레스타인 연대의 날’로 지정한 날입니다. (유엔이 ‘팔레스타인 분할’을 결정한 1947년 11월 29일로부터 30년이 지난 해예요.)

아슈타르 극장의 연대 요청 소식을 SNS로 접하고 한글로 관련 내용을 간략히 옮겨 공유한 뒤, 어떤 형태로 낭독에 참여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연극인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연대를 표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몸마음에 맞는 방식으로, 예를 들어 집에서 대본 일부를 수어와 몸짓을 포함한 여러 언어로 ‘낭독’해 음성이나 영상의 형태로 공유하는 다양한 형태를 상상했으니까요. 함께 연대할 때 생성되는 힘(가능 세계들)을 생각해 한국 안팎에 있는 지인을 모아 영상 회의 프로그램으로 낭독을 진행하고, 녹화 영상을 아슈타르 극장과 SNS에 공유하는 방법도 생각했습니다. 11월 26일로 예정된 팔레스타인 연대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 집회 때 아랍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며칠 일찍 낭독을 진행하거나, 아슈타르 극장의 연대 요청에 대한 소식이나마 공유하고도 싶었습니다.

「가자 모놀로그」와 아슈타르 극장의 로고 이미지. 왼편 위쪽에는 영문으로 The Gaza Mono-Logues, ASHTAR Theatre PALESTINE이 적힌 로고가, 아래쪽에는 같은 내용이 아랍어로 적힌 로고가 있다. 오른편에 있는 것은 아슈타르 극장의 로고다.

14개 언어로 번역된 「가자 모놀로그」 대본 중에 한글 대본은 없어서, 31편의 글로 이루어진 대본의 일부나마 옮기는 일이 우선인 듯했습니다. (저는 아랍어를 하지 못하니 영어로 번역된 대본을 중역해야 했습니다.) 일인 낭독에서 다인 낭독으로 넘어가면 번역에 실리는 비중이 참여자 수에 비례해 커질 수밖에 없을 테고요. 이런 생각을 하며 수순에 따라 아슈타르 극장에 연락해 피다 지리스(Fida Jiryis) 번역가가 영어로 번역한 대본을 한국어로 중역해도 좋을지, 일정상 아주 짧은 분량만 번역해도 무방할지 극장과 저작자의 동의와 의견을 구했습니다. 막상 극장의 흔쾌한 동의를 받고 나니, 기왕이면 대본의 3분의 1 정도 번역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팔로워도 몇 되지 않는 개인 SNS 계정으로 번역에 동참할 사람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번역가 지인 몇 분에게 직접 물으면 부담을 줄 것 같아 ‘공모’를 선택했습니다.)

다행히 많은 분이 글을 공유해준 덕에, 이틀 만에 여덟 분이 참여 의사를 밝혔습니다. 11월 24일 기준으로 여덟 분이 각기 두 편의 글을 번역해 주기로 했고, 그와 별도로 낭독을 준비하겠다는 분과 번역된 글 중 일부를 간단히 검토하는 작업을 함께 진행해주시겠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 뒤로도 번역 참여 의사를 밝힌 분들이 있어 결국 27일 오전까지 14명의 번역가와 비번역가, 연극인과 비연극인이 대본 전체 분량을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번역을 진행해 주신 분은 김지수, 김진아, 미래, 민경, 배소현, 안팎, 우지안, 유수, 이동경, 이소정, 이여로, 전규연, 정혜린, 호영 님입니다. 이 중 몇몇 분은 번역 외에도 낭독 기획과 준비, 작업 소개, 번역 검토를 맡아 주셨습니다. 소통은 대부분 DM과 쪽지, 이메일, 문자 메시지로 이루어졌습니다.

26일부터는 간단하게나마 원문 대조와 편집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고, 공역자와 낭독 준비 팀에 한해 작업본을 공유 문서 형태로 전하고 최종 점검을 요청했습니다. 시간 제약상 편집 과정에서 편집자 재량으로 수정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공역자 분들에게 사전에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습니다. 편집 작업은 29일 당일까지 이어졌고, 그에 따라 낭독 팀이 급하게 포스터 디자인을 다시 해야 하는 일도 있었고(디자이너 신화용), 공유 문서로 작업하는 과정에서 문단이 엉뚱한 곳으로 이동하는 일이 벌어져 낭독을 앞두고 혼선을 빚기도 했습니다.

이 와중에 몇몇 팀이 여러 형태의 낭독을 별도로 기획하고 준비해 진행해주셨습니다. 11월 26일 저녁에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라이브 송출로 「가자 모놀로그」 낭독을 진행한 김연재 극작가, 서울 신촌극장과 종로 무교로에서 두 차례 낭독을 진행하고 라이브 송출한 극단 런더앤싸이트닝, 안티무민클럽, 지금아카이브, 서울 남영동 시안재에 모인 연대자들과 이름 없는 낭독회를 가진 스라소니가 온다, 강원도 화천 예술텃밭에서 워크숍 참여자들과 낭독을 진행한 궁리소묻다, 서울 논현동 디오니소스 라운지에서 공연 뒤 낭독을 한 스튜디오 나나다시, 제주 강정마을에서 낭독의 자리를 가진 이상의 이상과 강정마을 활동가분들, 그리고 제가 알지 못하는 다른 곳에서도 다른 여러 분들이 따로 또 함께, 11월 29일 당일이 아니더라도 함께 낭독을 해주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따뜻하지만 다소 어두운 분위기의 작업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각자 대본을 보고 있다. 한쪽 벽면에 걸린 프로젝터 스크린에는 대본을 쓴 이에 관한 간략한 정보가 영사되고, 그 앞에 놓인 긴 테이블에 여섯 명의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다. 테이블 뒤쪽으로도 네 명의 사람들이 스크린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앉아 있어 공간 전체가 가득 찬 느낌이다.
남영동 시안재 ‘이름 없는 낭독회’
(촬영: 최용석)
 
빨간 벽면에 크게 뚫린 엔틱한 디자인의 창틀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있다. 각자 노트와 대본을 들고 있으며, 그 앞에는 스탠드형 마이크가 놓여 있다. 왼쪽의 인물은 검은 상하의에 흰색 레이스 스카프를 두르고 짧은 머리를 노랗게 염색했으며, 오른쪽 인물은 청바지와 흰색 트위드 재킷을 입고 긴 검정 머리를 늘어뜨렸다.
스튜디오 나나다시 낭독 장면
(출처: 스탠드업씨어터 @standup.theatre)

「가자 모놀로그」 낭독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고 진행하고 확장할 수 있는 연대 행동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라엘이 자행하고 있는 잔혹한 집단 학살과 인종 청소, 강제 추방과 생태 학살을 당장 제지하고 가자 시민에게 구호 식량과 의약품을 전달하도록 국제 사회에 촉구하고, 나아가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앞당길 여러 방법을 계속해서 찾고 구상할 때입니다. 아슈타르 극장 홈페이지의 「가자 모놀로그」 대본 페이지에 게재된 「가자 모놀로그 2023」을 번역해 낭독할 수도 있겠고, 팔레스타인 영화를 함께 보는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제닌 난민 캠프의 자유 극장(Freedom Theatre)(@freedom_theatre)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들의 활동(@artistfrontline)에 대해 알아볼 수도 있겠고, 번역을 통한 긴급행동을 이어가고 싶다면 가자에서 온 번역(@TranslfromGaza), 팔레스타인 문학 페스티벌(@PalFest), BDS 운동(@BDSmovement, @pps_kr) 계정을 엑스 어플에서 찾아보셔도 좋겠습니다. 1월 11일에 방송된 팟캐스트 인터뷰, <책읽아웃–황정은의 야심한 책>(375회) 『아! 팔레스타인』, 『필리스트』의 원혜진 작가 편도 듣거나 읽어 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금전적 후원으로 연대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일 분은 아슈타르 극장에서 요청한 대로 청소년과 성인을 대상으로 한 사회 심리 프로그램을 후원하거나, 가자의 시인과 작가들을 후원하거나,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통신 경로가 수시로 차단돼, 생사가 걸린 소통과 언론 보도의 창마저 단절되는 가자 주민과 언론인에게 전자 심카드를 전해주는 방식의 후원을 고려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가자 모놀로그」 편집 작업에서 가장 까다로웠던 부분은 인명 표기였습니다. 영어, 중국어, 힌디어, 에스파냐어 다음으로 사용자가 많은 아랍어에 대한 확정된 표기법이 여전히 없어서인데요, 한편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을 보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 각각에 대한 외래어 표기 세칙이 정리돼 있습니다. 결국 ‘아랍어 표기 시안’, ‘아랍어 표기 권고안’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상에 검색되는 상이한 표기 원칙을 비교한 끝에 한쪽을 선택해 로마자로 표기된 인명과 지명을 한글로 그나마 일관되게 표기하려 노력했지만, 꺼림칙한 마음은 남아 있습니다. 외래어 표기법의 한계도 분명 존재하지만, 이름을 올바르게 표기해 발음하고 부르는 건 상대에 대한 기본 예의인데, 「가자 모놀로그」 한글 대본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예의를 과연 지키고 있을지요. 함께 확인해 주실 분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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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원

이예원
2004년부터 출판, 미술 번역가로 활동했다. 한영과 영한 번역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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