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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속에서 생동하는 일

비수기 수기(手記)

강하늘

제252호

2024.04.25

나에게 ‘비수기’라는 단어는 어색하다. 예술가로서 가시적인 활동을 하지 않을 때를 지칭하는 단어로 들리기 때문이다. 나와 동료들은 하나의 프로젝트, 하나의 작품을 위한 실질적인 리허설 기간이 아닌 시간에도 ‘작업’을 하고 있다. 또한 ‘비수기’라는 단어는 본래 수요가 많지 않은 시기를 뜻하는데 나는 수요가 많든 적든 그냥 하기 때문에 더더욱 이 단어가 어색하다.
이분법적인 시간 개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단어를 바꾸어 볼까?
씨를 뿌리는 시간과 열매를 수확하는 시간. 이렇게.

씨를 뿌리는 시간은 미래에 도달할 작업에 직간접적으로 영감을 주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를 보거나 미술관에 가거나 훌쩍 여행을 떠나거나 관심이 있었던 분야를 새롭게 배우고(요즘은 책 만들기를 배우고 있다) 글을 쓰는 시간들이 여기에 속한다. 열매를 수확하는 시간은 예술가로서 의미와 재미를 부여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발표하는 시간이다.
한편 씨앗이 자라나 열매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물과 햇빛이 필요한데 나에게 있어 물과 햇빛은 연극을 매개로 어린이 청소년과 만나는 일이다. 식물의 성장을 위해 물과 햇빛에 의한 순환이 작용하듯 어린이 청소년을 만나는 일은 내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순환하고 생동한다.

나는 2009년부터 현재까지 예술가, 예술교육가, 연극놀이 리더, 티칭 아티스트 등 다양한 이름으로 어린이 청소년과 만나고 있는데 그 계기는 이렇다. 예술대학 연극과 재학시절. 나는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학부 환경으로 인해 전공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전공 수업은 뒤로한 채 교양수업에 몰두했고 우연히 ‘예술과 교육’이라는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다. 그 수업에서 예술가가 학교 및 지역 사회의 어린이 청소년과 만나 예술이 어떻게 한 존재를 구하고 지역 사회를 바꾸는지 또 그것이 예술가에게 어떠한 의미이며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지에 대한 다큐멘터리1)를 보게 되었다. 나 또한 고등학교 연극반 시절 대학로에서 활동하던 배우 선생님의 지도하에 연극을 경험했고 그 경험이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았기에 예술가로서 어린이 청소년을 만나는 상상을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것 같다. 그것이 이 수업을 통해 의식 위로 올려지게 된 것이다.

필자가 초등학교에서 진행한 연극놀이를 촬영한 사진 두 장을 위아래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마주 앉은 두 학생의 손이 교감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촬영하였다. 한 학생이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끔 책상 위에 두 팔을 올리면, 맞은 편 학생이 한 손 또는 두손을 사용하여 상대의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만진다.
J 초등학교 연극놀이

예술교육가로서 나의 첫 번째 장소는 경북 청도에 있는 N초등학교였는데 전교생이 30명 정도인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였다. 일주일에 두 번 방문하는 서울에서 온 연극 선생님을 위해 학부모들은 직접 농사 지은 구황작물을 매 수업마다 주셨고 여름이면 여름캠프에 겨울이면 겨울캠프에 연극 프로그램을 넣어 학생, 선생님, 학부모들과 함께하는 창조적인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함께 걷고 텐트를 치고 마을 목욕탕에서 다 함께 목욕을 하고(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밤엔 감자와 고구마를 구워 먹고 서울보다 맑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서울에서와는 또 다른 삶의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어린이들과 만나 함께 섞이면서 어린이들의 고민과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함께 공유할 수 있었고, 대학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연극에 대한 순수한 즐거움과 열망을 회복할 수 있었다. 특히 압축적이면서 상징적인 어린이의 몸짓에서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연극이 리얼리즘 연극이 아닌 피지컬 씨어터라는 것을 확인했고, 창조적인 과정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즉흥성과 환상성이 대두되는 공연예술에 대한 욕구를 깨달았다. 안톤 체홉에 도무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학부 시절, 대학에서 배울 수 없었던 나의 연극적 스타일을 어린이들과 만나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안톤 체홉의 작품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Searching for Home〉 프로젝트의 사진. 나무 재질의 책상 위에 놓인 작고 둥근 잎이 달린 묘목을 잡은 두 손을 촬영한 사진이다. 두 손은 묘목 뿌리 부근의 흑과 이끼를 누르듯 잡고 있다. 사진의 왼쪽 하단에 책상 위에 놓인 가위 날 일부가 촬영되었다.
<Searching for Home> (2022) (촬영: 이지수)

아이슬란드와 독일에서 진행한 <Searching for Home> 프로젝트2)로 인해 2020년과 2021년에는 예술교육가로서 휴식기를 가졌다. 2022년 다시 어린이 청소년과 만났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또 필연적으로 창작과 어린이 청소년과의 만남 사이 선순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청소년과 함께하는 Searching for Home 워크숍을 통해, 나의 청소년 시기의 Home에 대한 감각과 동시대 청소년이 감각하는 Home이 만나 충돌하고 또 스며드는 과정을 통과했다. 이는 본인이 극작한 청소년극 <세계몰락감>3)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이 작품은 2023년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주관 청소년극 창작벨트에 선정되었는데 이곳에서 나는 작가이자 사운드 디자이너, 워크숍 리더로서 17인의 청소년4)과 만나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세계몰락감>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세계가 무너진 후 처음으로 ‘나’와 ‘세계’를 마주하게 된 청소년 현재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16살 현재는 ‘세계가 몰락하는 소리’를 듣는데 청소년 시기에 경험하는 그 특유의 ‘몰락의 감각’이 이 작품의 주요 정서다. 나와 창작진은 17인의 청소년과 함께하는 워크숍에서 ‘나의 세계가 몰락했을 때 나는 어떠한 소리를 듣는가?’라는 질문으로 청소년과 깊게 만났고 각자 자신의 몰락의 경험에 대해 진실하게 나누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청소년들은 자신의 몰락의 소리를 녹음 및 수집해왔고 이 소리들은 <세계몰락감> 낭독공연에 있어 중요한 사운드 재료가 되었다.

나무 바닥으로 된 연습실에 일곱 명의 청소년이 앉아 있다. 촬영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은 두 명의 학생은 바닥에 놓인 기타에 앰프를 연결하고, 그 뒤로 모형 권총을 쥔 학생이 앉아 있다. 다른 학생들도 각자 할 일에 분주하다.
국립극단 청소년극 창작벨트 17인의 청소년

청소년들은 삶의 원형적인 시간 안에서 생생히 살아 숨 쉬는 ‘내 안의 그 청소년’을 꺼내놓게 했다. 삶은 약간의 진실과 대부분의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는 무대 위에서만 진실해질 수 있다. 그래서 언제나 부끄럽고 약간의 절망을 안고 무대에 선다. 진심을 다해서 쓰고 공연을 만든다. 진심을 다하는 것이 ‘언쿨’한 시대에 청소년은 나의 진심을 가장 잘 알아보고 이에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정직하게 응답하는 존재들이다. 무대 위 진실, 취약함, 상처, 슬픔을 띄워 내가 보내는 연결의 요청을 고스란히 받아 땀, 눈물, 숨, 열기로 응답하는 존재들.
청소년극은 청소년의 삶의 문제를 다루고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나누어 가지는 장소다. 극장은 만남을 통해 서로의 세계가 뒤섞이고 삶의 파동이 일렁이는 곳이다. 만남 속에서 생동하기. 나는 이 감각 때문에 청소년과 만난다.

현재 나는 경기도 외곽의 D 초등학교에서 1, 2학년 어린이들과 만나고 있다. 목표는 조금 내려놓고 ‘계획은 있으나 지금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보자’라는 마음으로 교실 문을 연다. 집 밖에서는 절대 말을 하지 않던 아이가 연극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은밀한 놀이 세계에 나를 초대하고, 아까부터 손들었는데 왜 나를 쳐다보지 않느냐며 눈물을 흘리면서 서운함을 토로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몸을 움직이다가 쉬는 시간에 나를 껴안으며 사랑을 말하는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 곳.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이 만남 속에서 무엇이 생성되는가?
이런 의미에서 예술교육과 공연은 본질적으로 같다.

강하늘, 유은정이 진행하는 ‘서칭 포 몬스터’의 참여자가 쓴 손 글씨를 촬영하였다. 흰 종이에 연필로 적힌 글귀는 다음과 같다.<br>
        “우리는 모두 조금씩 조금씩 서로 다르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모두가 몬스터 아닐까요? 사람들은 나와 다른 것을 보고 괴물이라고 하잖아요”.
서칭 포 몬스터 (티칭 아티스트 강하늘, 유은정)

[사진: 필자 제공]

  1. 기억을 따라 검색해보니 EBS 다큐멘터리 <세계의 예술교육 그 현장에 가다>인 것 같다. 확실하진 않다.
  2. <Searching for Home> 프로젝트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화두로 아이슬란드(2019), 한국(2020), 독일 (2021), 한국(2022)에서 공연된 연작 프로젝트이다.
  3. <세계몰락감>(2023) 강하늘 작, 장윤하 연출(크리에이티브 윤슬). 2024년 10월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다.
  4.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의 파트너 청소년들로서 공연 연계 워크숍, 희곡 개발, 연구 등 다양한 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해 리서치와 창작, 공연 제작에 있어 새로운 순환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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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늘

강하늘
텍스트, 사운드, 감각을 재료로 연출, 퍼포머, 사운드 디자이너, 작가, 연극놀이 리더 등 경계를 넘나들며 공연창작을 해오고 있다. 한때 밴드 <스위밍돌>에서 음악을 만들고 연주했다. 요즘은 유년기의 통증을 다룬 <러빙 씨어터>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트위터 @motherdoll / haneulse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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