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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이사 가세요?

쓰고 보니

김주희

제253호

2024.05.16

[쓰고 보니]는 쓰는 동안 극작가의 몸을 통과해 간 것들을 기록합니다. 극을 쓴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실천을 동반하는지 그 흔적을 스스로 기록하고 지금의 극쓰기를 반추해보고자 합니다.

예약이 확정되었습니다

트리바고 앱을 켠다. 호텔을 찾아본다. 최저가를 비교한다. 1박 기준 십만 원 이하로 최소 3박 4일, 최대 6박 7일로 알아본다. 3년 전까지만 해도 근거리의 서울권 호텔에 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경기도, 인천뿐이다. 방을 고르는 기준엔 나름대로 조건이 있다. 1) 책상이 창을 향해 있는가? 2) 의자 높이가 불편하지는 않은가? 3) 근처에 편의점이 있는가? 이것만 충족되면 갈 수 있다. 어떤 때에는 꼭 책상과 의자를 대여하러 떠나는 것 같기도 하다. 조건 한 가지를 더하자면 창문 너머의 풍경이 알맞은가이다. 한글창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들여다볼 것이니 영향을 끼칠 거라 생각해서다.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고, 장소 변화가 있고, 어딘가 도시적인 내용이면 넓은 창 아래로 뭐든 내려다볼 수 있고 차도 가까이에 있는 곳을 택한다. (그런가 하면 애니미즘에 관한 희곡을 쓸 때에는 자연 친화적인 분위기 속 영적인 기운을 얻고자 호텔이 아닌 사찰을 고르기도 했다) 최근 폐쇄된 공간에서 인물들이 단절된 채 살아가는 작품을 쓸 때는 유흥가에 처박힌 모텔을 골랐다. 앞 건물의 시멘트벽이 전망의 전부였고,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았다. 일주일이 흘러 방을 나올 때, 출소한 사람처럼 잠시간 길 한복판에 서서 햇볕을 쬐기도 했다.

호텔스닷컴 예약 확인 페이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 예정된 숙박에 대해 필요한 모든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어요. 출발하시기 전에 해당 여행지에 대한 정부의 여행 권고 사항을 확인해주세요. 또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친절히 도와드리겠습니다.”

걸어 잠근 방에 있다는 것

챙겨가는 물건들이 제법 요란하다. 카카오톡의 나와의 채팅 공지창을 뒤적거려 리스트를 찾는다. 백팩에 욱여넣는 행위가 루틴처럼 익숙해져 있다. 리스트를 안 봐도 무엇을 넣어야 할지 알지만, 꼭 본다. 혹시나 깜빡했다가 필요할 때 없어서 그걸 구하거나 대체하거나 참는 과정에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성격이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에 그런 순간에 화가 치솟는다) 노트북, 각종 충전기, 공책, 포스트잇, 세면도구, 잠옷, 영양제(비타민 A, B, C, D), 상비약(두통약, 몸살 감기약), 점안제. 될 수 있으면 베개도 챙겨간다. 숙박시설의 높은 베개를 베면 목도 아프거니와 머리만 허공에 붕 뜬 느낌이 드는데, 잠을 거의 안 잘 것이기에 한번 잘 때 제대로 자둬야 하기 때문이다. 더 넣을 자리가 없으면 에코백 두 개쯤을 꺼내 거기에 이번에 쓸 작품과 관련해 읽어야 할 책들을 집어넣는다. “어디 이사 가세요?” 일하던 곳에서 동료분이 그렇게 묻기도 했다. 마음만은 정말 이사를 가는 것만 같다.

살던 곳을 등지고, 시간을 내서 내 발로 직접 낯선 도시의 어느 방에 와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꽤 즐거운 고립이다. 오자마자 청소를 원치 않는다는 표식을 해놓는다. 여러 겹으로 문을 잠가놓는다. 아무도 이곳의 문을 두드릴 수 없게.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없는 방, 없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방도, 복도도, 엘리베이터 내부도, 로비도 모두 깨끗하고 조용하다. 마치 밀폐된 예쁜 상자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그 조용한 무관심 속에서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호텔 창에서 바라보는 풍경. 세로로 긴 사진. 가까이에는 우거진 숲이, 그 너머로는 도로와 꽤 높이 솟은 두 개의 빌딩, 그리고 여러 건물이 늘어서 있는 도심의 풍경이 펼쳐진다. 어둑한 하늘 아래 건물들의 창에 불이 들어와 있다. 창 안쪽으로 노트북과 노란 불이 켜진 스탠드가 반사된다.

중얼중얼

다 쓰고 난 뒤에는 (발)연기를 하면서 몇 번이고 대사를 고친다. 인기척 없는 방에서 쉴 새 없이 중얼중얼… 마치 귀신 들린 방 같다. 희곡에는 밝은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에 - 물론 나는 나름대로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 어둡고 음울한 말이나 뉘앙스가 오가곤 한다. 혼잣말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목이 탄다. 하루에 4리터의 물을 마신 적도 있다. 생수가 끊기지 않게 이틀에 한 번꼴로 여러 병을 보급해놓는다. 뭘 사러 갔다 오거나 쓰다가 호흡이 끊기면, 비로소 창밖이 눈에 들어오는데, 벌써 늦저녁이, 벌써 아침이 되어 있곤 한다. 내 인생에서 또 이만큼 시간이 갔구나, 한다.

삼 년 전에는 창밖을 보다가 경찰에 신고를 한 적도 있었다. 당시 쓰던 희곡이 누군가가 죽은 뒤 복도에 냄새가 퍼져서 비로소 입주민들이 서로 소통하게 되는 내용이었다. 건너편이라기엔 조금 멀고, 건너 건너 건너 건너편 정도의 건물에 조금 낡은 아파트가 있었는데, 층마다 꽤 널찍한 공동 테라스가 있었다. 10층 정도 돼 보이는 높이였는데 자꾸 한 아저씨가 테라스를 돌아다니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바람을 쐬고 계신 거겠지, 하고 시선을 돌리자니 이십 분에 한 번꼴로 나와 돌아다니시는 것이었다. 글이 써지지 않았다. 결국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아, 창밖에 아파트가 보이는데 거기 아저씨 한 분이 자꾸 아래를 내려다보셔서요. 느낌이 안 좋아서요.” 잠시 후 호텔 앞에 경찰차가 도착했다. 건물 사진을 찍은 것을 보여드리며 열심히 위치를 설명해보았다. 그리고 내 방으로 돌아오니 경찰분들이 그 아저씨께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확인 전화도 받았다. 결론은 그런 생각을 가진 게 아니었다고. 다행하면서도 실례를 끼친 것 같아 머쓱했다. 한편으로는 희곡의 내용에 너무 몰입해있는 것 같기도, 스스로 만든 세상에 갇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호텔에서 살아가는 작가의 일상을 본 적 있다.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서였다. 호텔에서 씻고 먹고, 글을 쓰고, 호텔에서 출근하고 호텔로 퇴근하는 삶은 꼭 판타지 장르 같았다. 고백을 참거나 고백하는 명장면이 아닌 그 잠깐의 장면을 몇 번이나 더 돌려보기도 했다.

거주 중인 나의 월세방은 점점 좁아진다. 해를 거듭할수록 책, 연극 소품, 의상, 기자재 등이 점점 더 자리를 차지한다. 수납·정리에 영 재능이 없는지 아무리 치워도 비좁기만 하다. 유일하게 깨끗한 것은 내 책상뿐이지만, 거실 겸 주방에 있어 작업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함께 사는 소중한 룸메이트가 오가기에 열린 공간이다. 고립되지 않는다. 희곡을 쓸 때는 철저히 혼자여야 한다. 그것이 누군가의 마음을 빌려 말을 여닫는 이의 기본자세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방을 검색한다. 걸어 잠글 수 있는 방을 찾는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각지의 호텔과 모텔로 향한다. 영양제, 상비약, 베개, 커피, 생수와 함께하며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모를 며칠을 보낸다. 나 혼자 말하고 나 혼자 듣는 대사를 쓰고 중얼거리면서, 가끔 창밖 너머로 이상한 장면들을 목격하면서. 희곡을 쓰는 동안, 극작가로 사는 동안은 그럴 것이다. 언제까지, 라고 이따금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혹은 애써 묻지 않으면서. 좀 고단하고 힘들어도 괜찮다. 체크아웃은 있을 테니까.

스프링 노트에 검은색 볼펜으로 쓴 글을 비스듬히 찍은 사진. “한순간, 입 밖으로 꺼내진 말은 고립된다. 침묵하는 무성의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나 아직은 자신이 속하게 될 대상에게 완전하게 가닿은 것은 아니다. 이 고립의 순간에 말은 방금 창조된 피조물, 최초의 말과 같다.” - 막스 피카르트 저, 배수아 옮김, 『인간과 말』, P116.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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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희

김주희
극작가. 이상한 존재들의 울음을 극장으로 데려온다. 프로젝트 1인실에 있다.
<식탁>, <마지막 미노타우로스>, <어느 날 문을 열고>, <마르지 않는, 분명한, 묘연한>, <낙원> 등을 썼다.
www.kimjoohe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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