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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의 태양

김주희

제70호

2015.06.18

두더지의 태양, 김주희

등장인물
에이(19세)
에이씨(46세)


한낮

장소
사막 변두리

무대
바닥에 부드러운 모래 더미가 쌓여있다.
무대 중앙에 구멍 두 개가 간격을 두고서 뚫려 있다.

바라보기 부담스러울 만큼 밝은 조명이 그곳으로 쏟아져 내린다.
에이와 에이씨, 구멍에 들어가 머리만 내놓고 위를 본다.

에이
(한 손으로 햇빛을 막아보며) 밝아.
에이씨
(태양을 올려다보며) 환하네.
에이
아빠 손으로 햇빛 좀 막아줘.
에이씨
그럼 아빠 손이 뜨거워지잖니.
에이
내 손은? 자식 걱정은 언제 할래?
에이씨
여기 오겠다고 한 건 네 의지였어.
에이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안 따라와.
에이씨
별 말 아니잖니. 온 거 후회되면 지금이라도 집 가. 아빠가 가는 법 알려줄게. 시내 쪽으로 걸어가서 800디나 주고 낙타 탄 뒤, 운전수 있는 데까지 가. 그런 다음 3000디나쯤 주고 공항까지 가. 그러고 비행기 끊어. 밤비행기가 싸니까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 기내식 줄 테니 배고파도 좀만 참고.
그렇다고 너무 참지는 말고. 그렇다고 또 아빠 돈 너무 막 쓰진 말고.
에이
참 다정하다. 왜 하필 여기야?
에이씨
뜨끈하잖냐.
에이
사우나 좋아하는 건 알아. 근데 여긴 사우나랑 급이 다르잖아. 땀 때문에 눈을 못 뜰 지경이라구. 보여? 속눈썹까지 젖었어. 그리고 왠지 벌레가 속옷 비집고 똥꼬에 낀 것 같애. 간지러워. 이렇게 꼭 찜찜한 곳이었어야 해? 갈 거면 차라리 북극엘 가든가.
에이씨
여기가 또 밤이면 북극이 되는 곳이야. 그 땐 너 입을 달달 떨면서 아무말도 못 하고 숨죽이고 있을 거다.
에이
에이씨, 아빠가 아빠답지 않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라곤 없어!
에이씨
가장으로서 책임감 가진 아빠들이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에이
쥐꼬리만 한 퇴직금 들고 사막 온다고?
에이씨
응. 사막 아니면 사막 같은 데로.

태양 좀 더 강렬해진다. 에이씨, 어렵사리 뜨고 있던 눈 잠시 감곤, 다시 번쩍 떠 태양에서 뿜어져 오는 햇빛 직시한다.
에이, 이젠 양손으로 햇빛을 가린 채 고개 숙인다.

에이
아 내 눈. 으 뜨거! 물 먹고 싶어. 아빠, 가방에서 생수통 좀 꺼내줘. 발밑에 놨지?
에이씨
오는 길에 가방 째 버렸어.
에이
미쳤어? 와, 아빠 돌았어?
에이씨
외국에 왔다곤 해도, 말이 심하구나. 아버지께.
에이
생수통뿐 아니라 거기 내 여권이며 돈이며 다 들어있는데! 아, 어떡해. 어쩔 거야. 어쩔 거야!
에이씨
걱정 마. 여권이랑 아빠 돈은 네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뒀어. 아까 너 땅 파느라 집중할 때. 아빠 참 책임감 있지.
에이
퍽도. 나 이제 아빠 아들 안 해.
에이씨
어차피 우리 곧, 부자관계 아니게 돼. 그때까지 사이좋게 있자.
에이
미쳤어. 미친 사람 말리려다 내가 미칠 지경이 됐네.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그깟 책임감 때문에. 아.
에이씨
아들로서의 도리로만 왔다고 말하진 마렴. 사이좋게 지내려면 솔직해져야지. 너 내신 개판에 수능 점수는 더 개판으로 나왔다며.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네가 해야만 하는 일도 세상에 딱히 없는 것 같다며. 세상에 너 하나 굳이 있어야 할 이유, 없는 것 같다며. 거기 네 구멍, 네가 팠다.
에이
막상 오니까 이건 좀 아니다 싶어. 아버진 마흔여섯이고 난 겨우 열아홉 살이란 말이야. 구멍으로 쏙 들어가긴 너무 이른 거 아닌가 싶단 말이야. 안 그래?
에이씨
구멍으로 들어가기에 너무 이른 나이란 없어.
애초에 사람은 너무 이른 나이에 한 구멍에서 나와, 너무 늦은 나이에 다른 구멍으로 걸어 들어가니까.
에이
아빠 맞냐? 너 나 주워왔지?
에이씨
목이 말라온다. 말을 아끼자. (여전히 햇빛을 똑바로 보려 안간힘을 쓴다)
에이
한 때 내가 진짜 좋아했는데. (여전히 햇빛을 보지 않으려 애쓴다) 내가 많이 어렸을 땐 로봇 장난감 들고 나랑 매번 결투해주고, 더 커서는 자전거 타는 법 알려주고, 엄마 몰래 수학 학원 대신 태권도장으로 보내준 데다, 삼 년마다 컴퓨터 최신 사양으로 바꿔주고…. 게임 현질 했는데 무기는 쓸 만한 걸로 잘 샀냐고 아무렇지 않게 묻질 않나, 더 커서는 술 먹는 거 걸렸는데,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라며 오징어랑 소주 들고 와서 겸상하자 하질 않나. 한 때는 쫌 멋있는 구석이 있는 아빠였는데, 지금은.
에이씨
지금은 졸음이 많아진 아빠야. 뜨뜻하니, 나른하다.
에이
…눈이라도 좀 감든가.
에이씨
아빠는 눈 뜨고 잠드는 게 소원이잖아.
에이
병신. (제 근처의 모래를 아빠한테 뿌린다)
에이씨
부드럽구나. 부처님 손바닥만큼.
에이
(계속 뿌린다. 그러다 제 구멍이 깊어지는 걸 보곤 관둔다)
에이씨
이렇게 환하다보면 언젠가 어두워지겠지. (태양을 보는 게 점점 힘겨워진다)
에이
…기다려져?
에이씨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 끄덕인다)
에이
아빠랑 더 말하고 싶은데, 목말라서 이젠 말을 조금밖에 못하겠어.

조명, 더 밝아온다.

에이
잘가. 나름 수고했어. (햇빛 피해 이젠 팔목에 감은 눈을 대는데, 흡사 우는 듯한 모양새로 보인다)
에이씨
(여전히 같은 얼굴이다가, 미묘하게 달라진 표정. 눈을 거듭 깜빡이면서 손을 눈앞에 가져가본다. 잠시 당황하다, 이내 승려처럼 평온한 얼굴 된다)
에이
아빠, 근데 왜 하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모래 더미에 파묻혀 죽고 싶은 거야…? 정 끝내고 싶으면, 목매거나 손목 긋거나, 방법은 많잖아.
에이씨
가장 환한 태양 아래, 혼자 빛나다 가는 거, 멋있잖아.
에이
하긴. 아버지를 세상이 언제 이만큼 밝혀주겠어.
에이씨
그치. 얼마나 밝았는지, 이젠 캄캄하다고 착각이 들 정도야. 이제 구멍에 들어가기 딱 좋아. 그냥 들어갔으면 좀 억울하기도 하고, (사이) 낯설었을 거야.
에이
아버지, 잘 들어가.
에이씨
(들어가기 전) 넌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니?
에이
나, 구멍 없는 데나 한번 찾아다녀보게. 낙타 타고.
에이씨
그래. 나중에 놀러 와. 아빠 옆 구멍 파고 들어와.
에이
이제 우리 아빠랑 아들 관계 아니지? 산 사람 죽은 사람, 뭐 그런 거지?
에이씨
아빠 아직 안 죽었다.
에이
에이.
에이씨
내가 네 아빠만 아니었음 네가 좀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에이
죽은 사람은 말이 없대요. 그러니 그만 들어가 쉬세요.
에이씨
다 컸구나. 그래. 안녕.

에이씨,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에이, 구멍에서 나온다. 에이씨의 구멍을 오래 바라본다. 한숨을 쉬곤, 돌아서서 어디론가 떠난다.

막.

※ 본 희곡은 ‘10분희곡릴레이’ 독자 투고를 통해 게재된 희곡입니다.

호들갑 작가소개
반 오십 살. 스물다섯보다는 이렇게 말하기 적절한 생활을 하고 있고, 그런 자신을 좋아한다. 매일 8시간 이상 시, 소설, 희곡, 일기 등 가리지 않고 쓰거나 가리지 않고 책이면 읽는다. 그러다 고개를 들 때 창 너머 풍경이 바뀌어있으면, 황홀하다. 맛집, 벚꽃놀이, 석촌 호수 러버덕 등 ‘어머 여긴 가봐야 해’라 말하는 곳과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취미나 연예인에 무관심하고 또래 애들은 웬만큼 아는 패션이나 화장품 브랜드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주로 무료 강연이나 음악회를 들으러 다니고, 생활용품은 다이소에서 모두 해결한다. 끼니는 굶거나 김밥 집에서 해결하고, 아낀 돈으로 연극을 보거나 좋은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산다. 해바라기를 하러 소공원에 나오신 노인 분들을 보는 일을 좋아한다. 그밖에 탑골 공원에 가만히 앉아 있다오기, 동묘 벼룩시장에서 헌책이나 옛 CD 및 골동품 사기, 허름한 가게에 앉아 아저씨들 틈에서 빈대떡 먹는 것도 좋아한다. 맥주 들고 노래방 가서 혼자 마이크 독차지하며 노래 부르다 오는 일도 즐겁다. 책을 절대 버리거나 팔지 않고, 누군가 내게 편지나 메모 하나 써 준 것은 모두 가지고 있다. 낡고 늙고 보잘 것 없어하는 것들에서 언제나 예쁨을 느낀다. 대개 사람과 글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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