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면 라 토마티나가 시작된다
김시임
제91호
2016.05.12
극 전체 배경은 미국의 조그만 한 식당이다. 여자가 앞치마를 두르며 영업 준비를 한다. 남자가 무대에 들어선다.
등장인물
남자
여자
극 전체 배경은 미국의 조그만 한 식당이다. 여자가 앞치마를 두르며 영업 준비를 한다.
남자가 무대에 들어선다.
- 남자
- 아줌마, 토마토스프 하나요.
- 여자
- 아침에도 먹고 가더니, 저녁도 토마토 스프야? 아니면 내가 베이컨 하나 구워줄까?
- 남자
- 스프나 주세요.
- 여자
- 괜찮니?
- 남자
- (기침을 그치며) 아무렇지 않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 여자
- (스프를 저으며) 그러게 왜 안 피던 담배를 다 피고 그래.
- 남자
- (퉁명스럽게) 저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
- 여자
- 그건 아니지만 한 번도 담배 피는 걸 못 봐서 안 피는 줄 알았지... 꽤 독한 거 같던데.
- 남자
- 스프 안 주실 거에요?
- 여자
- 그래, 스프. 금방 갖다 줄게. (스프를 뜨며) 근데 학생은 학교 식당 놔두고 왜 맨날 여기로 와?
- 남자
- 제가 오는 게 싫으세요?
- 여자
- 나야, 좋지. 근데 학생이 오고 가는 길이 머니깐.
- 남자
- 아무렇지 않아요.
- 여자
- (스프를 갖다 주며) 뭐가?
- 남자
- 학교에서 여기까지 오는 거요. (토마토스프를 가리키며) 그리고 이거, 먹으러 와요.
- 여자
- 학교엔 스프가 없나봐?
- 남자
- 아뇨. 있어요. 그것도 엄청 많이.
- 여자
- 근데 매일 토마토 스프만 먹네.
- 남자
- 제가 토마토를 워낙 싫어해서요. 토마토 이거, 다 먹어치워야 하거든요. (게걸스럽게 스프를 떠먹으며) 토마토에선 토 맛이 나요. 마치 제가 비행하는 동안 겪었던 맛이랄까. 맞아요. 그 비행기가 이륙하는 맛! 한 입 떠먹는 순간, 몸속에 파고드는 상큼한 흔들림은 정말 환상적이에요. 아줌마, 잠깐만요. 저, 정말 토 나올 거 같아요.
- 엄마
- 여권 챙겼지? 짐도 다 붙였고. 이제 가면 우리 아들 언제 볼 수 있대? 방학 때 들어온다 해도 떨어져 있는 날들이 더 많잖아. (사랑스럽게) 우리 아들, 몸 건강히 잘 갔다 와. 밥도 잘 챙겨먹고, 연락도 자주 하고. 아니다. 연락 자주하면 공부하는 데 방해될 테니깐 일주일에 한 번만 하자. 엄마는 우리 아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 다른 엄마들이 유학 간다고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아들, 가서도 열심히 공부할 거지? 엄마는 우리 아들 믿어. 또 엄살은...! 이때까지 잘해왔잖아. 그럼, 누구 아들인데 다 잘할 수 있지. 엄마가 사랑하는 거 알지? 출발 시간 다 됐다. 어서 가봐. 아들, 엄마가 사랑해!
- 여자
- (손목을 끌어당기며) 뭐야? 꼴이 왜 이래? 괜찮아?
- 남자
- 아무렇지 않아요.
- 여자
- 아니, 이게 다 왜 그런 거야. 무슨 일이야?
- 남자
- (손목을 뿌리친다)
- 여자
- (스푼을 뺏으며) 무슨 일 있었던 거지?
- 남자
- 아무렇지 않다니까요! (화를 억누르며) 스푼 주세요.
- 여자
- 무슨 일인지 말 안 해줄 거야?
- 남자
- 신경 끄세요.
- 여자
- 말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 남자
- (눈을 치켜뜨며) 말해주면 뭐 당장이라도 해결해줄 거 같이 말하네요.
- 여자
- 뭐라도 알아야지 해결해주든 말든 하지.
- 남자
- (웃으며)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전쟁이요.
- 남자
- 라 토마티나. 아줌마, 아시죠? 부뇰에서 열리는 토마토 축제. 그게 말이에요. 이 동네에서도 열리는 거 아세요? 그것도 매일 밤마다. 저기 13번가 쪽에 가시면 구경할 수 있는데. 근데요.. 참가는 못 해요. 거긴 저 같은 애들만 참가할 수 있는 곳이거든요. (옷에 못은 토마토 껍질을 떼어내며) 오직 검은 토마토, 황색 토마토를 위한 축제에요. 아줌마는 절대 못 해요. (여자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아줌마는 새하얀 백 토마토니깐.
- 여자
- 학생...
- 남자
- 토마토 속엔 산이 많대요. 그래서 스페인 축제 거리는 금방 깨끗해진다는데... 저도 이렇게 계속 토마토를 먹다보면 제 몸 속도 산들로 가득해서 온통 깨끗해질 수 있겠죠? 몸 안에 쌓인 걱정, 근심 이런 거 모두 깨끗해질 수 있을 거에요. 근데요 아줌마, 13번가엔 아직 토마토 즙이 도로를 가득 포장하고 있어요.
- 여자
- 괜찮니,,,?
- 남자
- (정색하며) 저는 아무렇지 않아요.
- 여자
- 다 먹었으면 접시 치워줄게.
- 남자
- (여자가 접시를 다 치우기 전에) 이렇게라도 토마토를 먹어치우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어요. (스프에 담긴 토마토를 하나 꺼내며) 이렇게 물컹물컹한 게 맞으면 또 얼마나 아픈지 아세요?
- 여자
- 내려놔. 지저분하잖아.
- 남자
- 아줌마도 똑같네요. 제가 그렇게 지저분해요?
- 여자
- 아니, 네가 더러워질까봐.
- 남자
- 이미 더러운 걸요. 저는 아무렇지 않아요.
- 여자
- 너는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야.
- 남자
- 저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
- 여자
- 불쌍한 아이...
- 남자
- 감사하네요. 저 같은 걸 불쌍하게라도 봐주시니 말이에요. 그럼 아줌마, 저 당분간이라도 여기에 있으면 안 될까요?
- 여자
-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니?
- 남자
-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 여자
- 나는 네가 돌아가면 좋겠다.
- 남자
- 돌아갈 곳이 없어요. 엄마가 직접 이 꼴을 보는 것 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을 거에요.
- 여자
- 만약 여기 있다가 그 애들이 널 찾아내면?
- 남자
- 그건... 아무렇지 않아요.
- 여자
- 정말...?
- 남자
- 아줌마가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절대 몰라요. 이런 외지고 낡은 식당을 누가 찾아온다고.
- 여자
- 내가 말한다면...?
- 남자
- …….
- 여자
- 이봐. 좀만 기다려. 새로 한 그릇 갖다 줄 테니깐. 다 먹어치워야 한다며.
- 남자
- 안 주셔도 될 텐데... 안 주셔도 저는 아무렇지 않아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사이) 아무렇지도 않아야만 해요. 난 늘 누군가에게 부러웠던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형, 누나, 친구, 동생...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어요. 그러니깐 저는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부러운 사람이고, 누군가가 부러워해야할 사람일거에요. 결국, 저는 아무렇지 않아야만 해요. 무엇보다 저 반대편에서 기다릴 우리 엄마를 위해서 말이에요. 앞으로도 엄마는 항상 날 믿고, 항상 날 사랑할 거에요. 이 푸른 지구가 붉게 물드는 순간까지.
남자, 담배 한 대를 핀다. 연기를 한 번 들이마시더니, 마구 기침을 한다.
남자, 구역질을 하며 성급히 나간다. 조명이 바뀌고 여자는 어느새 앞치마를 벗고, 엄마로 분해 있다. 정면을 응시한 채 아들과 대화를 한다.
비행기 이륙 소리와 함께 조명이 다시 바뀐다. 남자, 몸에 토마토를 흥건히 적신 채 들어온다. 그런 남자를 발견한 여자.
남자, 태연하게 다시 테이블로 가 스프를 마저 먹는다.
남자, 점점 실성한 거 같이 보인다. 그런 상태로 계속 대화를 이어나간다.
여자, 접시를 들고 나간다.
남자, 들고 있던 토마토를 제 이마에 대고 마구 으깨기 시작한다. 무대 점점 어두워지고, 쨍그랑 소리가 들린다. 암전.
- 호들갑 작가소개
- 초등학교 때 만난 담임선생님 영향으로 줄곧 글을 써왔다. 주로 시를 썼는데, 예고시절 연극을 처음 접하고 희곡을 썼다. 물론, 어떻게 쓰는지 모르고 시작한 거라 잘 쓰진 못한다. 그저 글 쓰는 재미 하나로 계속 썼는데 요즘 들어 그 재미를 잃어가는 느낌이었다. 근데, 이번 10분 희곡 릴레이를 통해 내가 왜 글을 쓰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감사하다. 앞으로 더 열심히 써서 색깔 있는 극작가가 될 거다. 지켜봐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