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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

정의재

제92호

2016.05.26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강원도 전방부대인 12사단에서 군 복무 중이던 최 모 일병이, 지난 12일 초소 경계임무를 수행하던 중, 총에 부착되어있던 총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같이 근무하던 김 모 병장의 말에 따르면, 최 모 일병은 평소에도 조금 어두운 성격으로, 남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표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사건 당일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해당 부대는 사건의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 중이며…

S#1
등장인물 없이 음성만 들린다.


앵커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강원도 전방부대인 12사단에서 군 복무 중이던 최 모 일병이, 지난 12일 초소 경계임무를 수행하던 중, 총에 부착되어있던 총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같이 근무하던 김 모 병장의 말에 따르면, 최 모 일병은 평소에도 조금 어두운 성격으로, 남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표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사건 당일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해당 부대는 사건의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 중이며…

무대가 밝아지고, 무대 위에는 단독군장 차림에 총검이 부착된 총을 들고 있는 김중표 병장과 최상훈 일병이 거리를 두고 서있다.

김중표 병장
상훈아. 혹시 무슨 힘든 일 있었어?
최상훈 일병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김중표 병장
아니야, 뭐가 죄송해. 네가 요즘 힘이 없는 것 같아서 걱정 되서 물어 본거야.
최상훈 일병
죄송합니다.

얼마간의 정적.

김중표 병장
군 생활, 힘들지?
최상훈 일병
김중표 병장
군 생활 쉽지 않지. 넌 또 천식까지 있어서 남들보다 더 힘들었을 거야. 너는 그냥 간부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선임들은 천식 핑계 대고 열외 한다고 너한테만 지랄하고. 억울하기는 한데 뭐라고 말은 못하겠고…
최상훈 일병
(아무 말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김중표 병장
그래도 어떻게 꾸역꾸역 버티면서 군 생활은 했는데,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군 생활 엄청 오래한 거 같은데, 앞을 보면 끝은 안보이고, 그렇게 힘든 와중에 여자친구는 보고 싶은데 슬슬 연락도 뜸해지고…
최상훈 일병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김중표 병장
야 상훈아. 그런데 엄청 웃긴 게 뭔지 알아? 이 개 같은 대한민국 군인 중에 군 생활 동안 이런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 없다? 진짜 사는 곳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른 사람들이, 희한하게 여기 들어오면 다 생각이 똑같아 진단 말이야. 웃기지 않냐?

김중표 병장은 최상훈 일병을 힐끔 쳐다보지만 최상훈은 바닥만 응시하고 있다.

김중표 병장
상훈아. 나도 예외는 아니더라. 나 일병 때 여자친구한테 부대로 연락이 왔어. 진짜 상상도 못했는데 여자친구가 내무반으로 전화를 했더라. 진짜 그때는 완전 신나서 들고 있던 걸레도 던져버리고 내무반으로 달려갔어. 설마 얘가 헤어지자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지. 병신같이. 진짜 수화기를 받아들고 여자친구가 구구절절하게 헤어지는 이유 설명하는 거 듣는데, 아무생각도 안 들더라. 멍하니 여자친구 얘기 듣고 있다가 그냥 전화 끊어버리고 내무반으로 들어왔어.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걸레 들고 청소 했어.
최상훈 일병
…(가만히 서서 총기 앞쪽에 부착된 총검을 무표정으로 바라본다)
김중표 병장
그때는 아무생각도 안 들다가 자려고 누웠는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지? 도대체 내가 뭣 때문에 이 냄새나는 모포위에 누워있는지 모르겠는 거야. 막 그런 거지같은 생각하고 있는데 불침번이 부르더라. 초소 근무 가야 된다고. 나는 또 그 소리를 듣고 기계처럼 옷 갈아입고 총 들고 초소로 왔지. 나도 그때 우리소대 왕고랑 근무 섰었거든. 내가 멍하니 있으니까 왕고가 나한테 자기 이야기를 해주더라. 걔는 알고 있던 거지 내가 여자친구랑 헤어진 걸.
최상훈 일병
(총기에 부착된 총검을 떼어내어 두 손으로 강하게 쥔다. 김중표 병장은 이런 행동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김중표 병장
지금 내가 너한테 하는 이야기처럼 두서없이 이런저런 이야기 늘어놓는데 그게 귀에 들어오겠냐? 듣는 둥 마는 둥 그러고 있는데 진짜 딱 한마디가 귓 속에 박히더라. 다들 똑같다. 이유는 다르지만 다들 그런 시기가 온다. 그리고 그 시기가 지나면 그때가 군생활이 편해지는 시기라고. 나도 그때는 무슨 개 같은 소리인가 했는데 진짜 그 시기가 지나니까 군생활이 편해지더라. 이 개 같은 생활이 편해지기 시작하더라니까. 그러니까 너도 너무 고민 하지마. 어차피 지나가면 별거 아닌 일이야. 언젠가 한번쯤은 겪어야 되는 일이니까 너도…

말을 이어가며 김중표 병장은 최상훈 일병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는 어느새 총검을 총에서 떼어내어 두 손으로 쥐고는 자신의 목을 찌르는 최상훈 일병이 있었다. 검붉은 선혈과 함께 최상훈 일병은 앞으로 힘없이 쓰러지고, 김중표 병장은 말을 잃은 채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다. 그리고 조명이 꺼진다.

S#2

김중표 병장
여기까지… 입니다…

말을 마친 김중표 병장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떨린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박 중위는 생각에 잠긴 듯 얼마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서류만 바라본다.

박상일 중위
(시선을 김중표 병장에게 돌리며) 중표야, 최 일병이 천식 있다는 부분은 빼자.
김중표 병장
(살짝 당황해 하며) 예…?
박상일 중위
그리고, 여자친구 이야기도 빼자. 최 일병은 그냥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 했다 이렇게 이야기해. 너도 일병 때는 군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 힘들어 했는데, 같이 근무나간 선임의 이야기 덕분에 그 후로는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자.
김중표 병장
네…? 하지만 그러면…
박상일 중위
하아…(김중표 병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얼굴을 들이밀며) 중표야. 너 군생 활 얼마나 남았냐? 2개월? 나 3개월 남았다. 그냥 내가 집어준 부분만 주의해서 말하면 돼. 그럼 좀 귀찮기는 하겠지만, 전역하는 데는 아무지장 없을 거야. 알겠지?

박상일 중위의 왼쪽 가슴 주머니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박상일 중위
(김중표 병장을 한 번 바라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는다) 충성! 박상일 중위입니다. 네, 네. 지금 저하고 같이 있습니다. 네. 아, 10분 뒤 말씀이십니까? 네, 알겠습니다. 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충성!

전화를 마친 박 중위는 책상위의 서류를 챙겨 나갈 준비를 한다.

박상일 중위
중표야. 우리 제발 아무 일 없이 전역하자.

박상일 중위는 서류를 챙겨들고 무대 밖으로 나간다. 무대 위에는 김중표 병장 혼자 아무런 움직임 없이 자리에 앉아 있다. 얼마간 정적이 흐른 뒤, 김중표 병장이 바닥에 머물던 시선을 정면으로 돌린다. 그리고 서서히 조명이 꺼진다.

S#3
무대 조명이 들어온다. 무대 위에는 단독 군장 차림에 총검이 부착된 총을 들고 있는 김중표 병장이 무대 왼편을 짜증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김중표 병장
아주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그때 무대 왼편에서 같은 차림의 최상훈 일병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거친 숨을 내쉬며 들어온다.

최상훈 일병
헉… 헉… 죄… 죄송합니다… (숨을 고르기 위해 애쓴다)
김중표 병장
(어이없다는 듯) 힘드냐?
최상훈 일병
…헉… 아… 아닙… 헉… 니다…
김중표 병장
그럼 차렷하고 똑바로 서, 새끼야.
최상훈 일병
헉… 헉… 스읍…!(최대한 소리 죽여 숨을 고르며 차렷 자세를 취한다)
김중표 병장
야~ 상훈아. 요즘 군대 많이 좋아졌다. 선임 앞에서 힘든 티도 다 내고?
최상훈 일병
죄송… 합니다… 제가… 선천적으로 천식이… 있어서…
김중표 병장
(말을 끊으며) 야, 누가 니 새끼 천식 있는 거 물어봤어? 나 태어날 때부터 병이 있으니까 건드리지 마라, 이거야?
최상훈 일병
아닙니다.
김중표 병장
아니긴 뭐가 아니야~ 천식 때문에 간부들이 오냐오냐 봐주니까 이제 선임은 아주 개 좆으로 보이지?
최상훈 일병
그런 거 아닙니다.
김중표 병장
내가 니 새끼 처음 왔을 때부터 알아 봤어. 태어날 때부터 병신인 새끼가 가오나 잡으려고 현역 지원해놓고, 간부들이 커버 쳐주니까 뒤에서 받아먹기나 하고, 남들 쌔빠지게 훈련할 때 행정반에 처박혀서 컴퓨터나 두들기고 있고… 하, 이거 뭐 나같이 멀쩡한 사람들은 서러워서 어디 살겠냐? 어? 어이가 없어서…
최상훈 일병
죄송합니다.
김중표 병장
아니야, 니가 뭐가 죄송하냐. 뭐 니가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겠냐. 그냥 부모가 그렇게 낳아준 게 잘못이지. 어? 죄송은 니 부모가 해야지, 안 그러냐?
최상훈 일병
죄송합니다, 김 병장님. 근데, 부모님은 언급하지 말아 주십시오.
김중표 병장
(최상훈을 노려보며) 뭐?
최상훈 일병
제가 마음에 안 드시면 저를 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부모님을 언급하시지는 말아 주십시오.
김중표 병장
(정색하며)야, 최상훈. 엎드려.
최상훈 일병
(총을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고 엎드려뻗친다)
김중표 병장
니가 간부들이랑 붙어 다니더니 내가 만만하구나. 그래, 근무 두 시간 남았다. 근무 끝나고 내 눈도 못 쳐다보게 해줄게, 이 씨발새끼야. 100개. 30초 준다.
최상훈 일병
(푸쉬업을 하기 시작한다.)
김중표 병장
니 새끼 천식 핑계대고 체력단련 빠진 거 내가 오늘 다 채워줄게. 기대해라.
최상훈 일병
헉… 헉… 헉… (몇 번의 푸쉬 업 후, 푸쉬 업 속도가 점차 느려진다.)
김중표 병장
상훈아, 힘들어? 근데 어쩌냐? 여기, 니 새끼 커버처줄 간부가 없네?
최상훈 일병
헉… 헉… 헉… (거친 숨을 내쉬며 힘겹게 개수를 채워 나간다.)
김중표 병장
(힘겹게 푸쉬 업을 하는 최상훈을 바라보며) 야 최상훈. 내가 너 같이 아프다고 핑계대면서 남들 좆뺑이 칠 때 뒤에서 꿀 빠는 새끼들 본 게, 한두 명이 아니야. 근데 웃긴 게 뭔지 아냐? 그렇게 아프다고 징징대던 새끼들이 나랑 근무 한번 나갔다가 오면 다음날 병이 다 나았다네? 아프다는 소리를 안 해. 내가 너도 안 아프게 해줄…

그때 푸쉬 업을 하던 최상훈 일병이 바닥에 쓰러져 가슴을 움켜 쥔채 숨이 넘어 갈 듯 헐떡거리기 시작한다.

최상훈 일병
허억… 허억… 끅…… 허억…
김중표 병장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랄을 한다, 지랄을. 너 지금 내 앞에서 연기 하냐? 어? 안 일어나?
최상훈 일병
허억… 김… 끄윽… 병… 장… 허억… 허억…!

이내 소리가 멎고 최상훈 일병은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김중표 병장
이내 소리가 멎고 최상훈 일병은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김중표 병장
야… 야… 최상훈…?

자신을 등진 채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는 최상훈의 어깨를 잡고 바로 눕힌다.

김중표 병장
김중표 병장 (놀라 뒤로 넘어지며) 아악!!

최상훈 일병은 입에 거품을 문채 아무 미동도 없다. 김중표 병장은 바닥에 넘어진 채로 아무 말도 못하고 몸만 덜덜 떨고 있다.

김중표 병장
(덜덜 떨며 최상훈 일병을 흔들며) 야… 상훈아… 최상훈…?

그때 무대 왼편에서 박상일 중위가 한손에는 휴대용 플래쉬를 들고서 들어온다.

박상일 중위
중표야, 잘하고 있.. (쓰러져 있는 최상훈을 발견하고 놀라 말을 멈춘다.)

박상일 중위는 들고 있던 플래쉬를 던지며 쓰러져 있는 최상훈에게 달려간다.

박상일 중위
(최상훈을 흔들며) 상훈아!! 야!! 최상훈!! 정신차려!! (김중표를 쳐다보며) 야 김중표! 얘 왜이래!! (대답 없는 김중표) 김중표 너 이 개새끼..!

김중표 병장은 바닥에 주저앉아 떨고 있다. 박상일은 그런 김중표의 모습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위를 살핀다. 그러다가 최상훈의 옆쪽에 놓여있는 총을 발견하더니 무언가 생각한다. 몇 초 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자신의 뒷주머니에서 검은 가죽장갑을 꺼내 양손에 끼운다. 그리고는 총에 부착되어 있던 총검을 빼내어 최상훈의 양손에 쥐어준다.

박상일 중위
씨발…!! 씨발…!! 씨발…!!!!!

그리고는 욕지거리를 뱉으며 그대로 최상훈의 목에 피가 튀지 않게 최대한 천천히 밀어 넣는다. 칼을 끝까지 밀어 넣은 뒤 바닥에 앉아 벌벌 떨고 있는 김중표 병장에게 급하게 다가간다.

박상일 중위
(잡은 어깨를 거칠게 흔들며) 야, 김중표, 이 개새끼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나는 오늘 여기 안 왔던 거고, 최상훈은 네가 말릴 틈도 없이 스스로 자살 한 거야, 알겠어?


김중표 병장
(대답 없이 박상일의 눈을 쳐다보며 덜덜 떤다)
박상일 중위
알겠냐고, 이 새끼야!!
김중표 병장
(몸을 덜덜 떨며 고개를 강하게 여러 번 끄덕인다)

그리고 무대 조명이 꺼진다.

호들갑 작가소개
작가라는 타이틀이 나에게 붙어도 좋은지 잘 모르겠다. 극작을 전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따로 배운 적도 없다. 잘 생각해 보면 배우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 내가 희곡을 쓴다는 생각을 27년의 삶 중에서 26년 동안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짧은 극을 올리기 위해 한 작품,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도 민망하지만 20분여 분량의 짧은 희곡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떻게 써야할까 고민하는 순간부터 글을 써내려가고, 다 써낸 글이 무대 위에서 실현되기까지의 그 과정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객들이 그 무대를 보면서 공감했다고 말해주었다.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었다. 나를 녹여 만든 이야기가 다른 이들로 하여금 어떠한 감정을 일으킨다는 것에 엄청난 희열을 느낀 것이다. 그때부터 조금씩 기회가 생길 때 마다 글을 쓰려고 했다. 나는 소설 같은 장편은 쓰지 못 한다. 하나를 오래 붙잡고 있지 못하는 성격에다가 어떻게든 참고 쓰다보면 결국 이야기를 내가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황이 와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지금 희곡을 쓰고 있다. ‘작가’라는 거창한 타이틀 보다는 그냥 ‘정의재’라고 불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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