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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

이소연

제93호

2016.06.09

무대 부부의 집, 거실 빗소리 들려온다. 남편, 제사상을 차리고 있다. 아내, 방에서 나온다.

등장인물
남편
아내

무대
부부의 집, 거실

빗소리 들려온다.
남편, 제사상을 차리고 있다.

아내, 방에서 나온다.

아내
여보.
남편
잘 잤어?

아내, 잠이 덜 깬 얼굴로 소파에 앉아 가만히 남편을 바라본다.

아내
뭐해?
남편
전이 죄다 으스러져.
아내
부침가루 썼어?
남편
…아.
아내
(웃는) 그러니까 그래.
남편
그냥 계란물 입히면 되는 건 줄 알았어.
아내
깜박 잠들었네. (다가와 앉는) 누구 제사야?
남편
……응.
아내
누군데? 해도 안 졌는데 제사상을 벌써 차려. (음식 뒤적이는) 당신 혼자 이걸 다 차렸어? 나한테 말하지 않구….
남편
혼자 할 수 있으니까.
아내
놀랍네. 라면 물도 못 맞추는 사람이.

아내, 거실을 서성인다.

아내
이상해.
남편
(제기 위치를 바꾸어보는) 뭐가?
아내
여기 말이야. 뭔가… 낯설어.
남편
커튼을 바꿔서 그래.
아내
(커튼 만져보는) 당신이 바꿨어? (사이) 여기 있던 꽃병은 어디 갔어?
남편
깨져서 버렸어.
아내
(놀라는) 언제? (커튼 걷는) 커튼도 안 걷고.
남편
당신 자는 동안.

아내, 남편의 옆에 앉는다.
자신을 보지 않는 남편의 얼굴을 붙잡는다.

아내
울어?
남편
(빼내며) 울긴 누가 울어.
아내
낯설어… 당신도.
남편
낮잠 자서 그래.
아내
낮잠……. 낮잠을 잤던가 내가. 이상해. 언제 잠이든 거지? (혼란스러운) 왜 이렇게 많이 잔 거야?
남편
원래 잠이 많아, 당신. (일어서는) 두 시야.
아내
(투정부리듯) 억울해. 하루가 짧아진 기분이야. (사과 들며) 사과는 꽁지를 따야지.
남편
여보.
아내
배도 그렇고…….
남편
미안해.

사이.
남편, 창문을 열고 담배를 문다.

아내
왜 그래?
남편
윤 작가 만났어.
아내
오늘? 그러고 보니 당신, 오늘 세 시에 첫 공연 아니야? (벌떡 일어서는) 맞잖아. 첫 공연에 연출이 빠지면 어떡해. (시계 보는) 곧 시작하겠어.
남편
윤작가랑 작품 들어가기로 했어. 대본이 너무 좋더라. 이렇게 좋은 작품을 나한테 맡겨줘서 고맙다고 했어. 그랬더니 울더라. 윤작가가 울었어.
아내
무슨 소리야? 지금 작품, 그 작가님이랑 하는 거잖아.
남편
윤 작가 말이야. 어려도 속이 깊잖아. 정도 많고. 나를 많이 걱정했다더라. 내가 자기 우상이었대. (웃는) 평소 같았으면 헛소리 말라고 한 대 쥐어박았을 텐데, 우니까…. 울면서 그런 소릴 하니까. 간지러운 거 꾹 참고 물었어. 일 년 전에 내가 네 작품 맡아 놓고 공연 첫 날 도망쳤는데, 그래도 내가 우상이냐고. 우상 삼을 게 없어서 이런 무책임한 연출을 삼냐고. 난 그냥 웃자고 한 소리였는데, 윤작가가 그러대. 그래서 우상이었다고. 내가 하는 연극은 항상 인간다웠고… 그래서 중심엔 사랑이 있었고…… 그러니까 그 날은… 내 세계가 무너진 거라고. 내가 잠적한 일 년이, 자기는 마땅하다고 생각했대. (사이, 웃는) 그래, 내가 졌다! 그랬어. 이거야말로 진짜 웃기는 소리지.
아내
여보. 나 당신이 무슨 말 하는 지 하나도 모르겠어. (다가가는) 이상해. 당신이 낯설어.
남편
(담배 끄는) 당신은 매일 한 시 오십칠 분에 일어나. 잠드는 시간은 보통 네 시 반. 가끔은 오십분. 운이 나쁘면 일어난 지 한 시간 만에 잠들 때도 있어.
아내
뭐?
남편
다만 일 년 내내 같은 건, 당신은 언제나 울며 잠이 든다는 거야. 환한 낮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을 하고 나에게 말하지. ‘안녕, 여보.’그러면 나는 당신보다 더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어. ‘일어나, 여보!’

아내,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붙잡는다.

남편
눈 감은 당신을 붙잡고 나는 엉엉 울다가, 일어나라고 뺨을 쳤다가, 미안하다고 부은 당신 볼을 붙잡고 다시 울었어. (사이) 그렇게 일 년을 보냈어.
아내
그만해, 여보. 나 머리가 너무 아파.

아내, 바닥에 주저앉는다.
상에 차려진 제사 음식들을 본다.

아내
오늘 누구 제사야?
남편
…….
아내
어머님 제사는 겨울이고, 아버님은 정정하신데. (원망스럽게 보는) 왜 상을 차렸어?
남편
여보.

아내, 불현 듯 남편에게 달려간다.

아내
말하지 마. 말하지 마, 여보.
남편
(괴로운)
아내
당신이 말하면, 나 잠이 드는 거지? 당신이 나를 재우는 거지?
남편
(동시에, 따라 읊는) 당신이 나를 재우는 거지?
아내
(혼란스럽게 보면)
남편
일 년이나 연극을 했어. 당신이랑 나랑, 이 대본을 가지고. 어떻게든 결말을 바꾸려고 했어. 당신이 잠들지 못하게 하려고 난 매일을 일 년 전 그 날에 살았어. 깨진 꽃병과 똑같은 꽃병을 사서 뒀고, 바뀐 계절을 보지 못하게 매일 커튼을 쳤어. 잠든 당신의 손톱을 자르고, 당신이 입고 잠든 옷과 똑같은 옷을 몇 벌씩 사뒀어. 당신이 일어나는 한 시 오십칠 분만 되면 난… 언제나 같은 옷을 입고 여기 앉아 있었어. (사이) 하지만 결말은 한 번도 바뀌는 적이 없어.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깨달았어. 모든 걸 깨달은 순간, 내게 사과를 하며 스스로 잠이 들었지. 내가 당신을 재웠다고? 아니, 난 당신을 한 순간도 잠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 당신을 재우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라고. 날 떠나는 건 언제나…!
아내
나한테… 어제도 이 말을 했었어?
남편
…….
아내
어제도 똑같은 말을 했어?
남편
(외면하며) 오늘, 당신이 떠난 지 일 년 째 되는 날이야.
아내
그런데 왜 내가 아직도 여기 있어?
남편
…….
아내
왜 나를 보내지 않았어?
남편
……내가 …항상 여기까지였으니까. (보며) 언제나 당신을 보낼 수 없었으니까. 다음 대사를 말할 수 없었으니까. 여기서 늘 그만뒀으니까. 이 이상은 도저히……

아내, 웃는다.

아내
그랬구나.
남편
여보.
아내
나 전부 기억해.
남편
…무서워, 여보.
아내
당신은 기억해? 내가 당신한테 고백했던 날, 당신이 나한테 키우던 강아지 얘기를 했어. 아주 어릴 때, 반 년 정도 키우던 강아지가 죽어버렸을 때… 그 때 당신이 한 달을 굶었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따라 죽으려고 했다고. 사랑하는 건 고통이라고. 소중한 무언가가 생기는 게,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라고. (사이) 미안해, 여보. 그 때 당신에게 무슨 겁이 그렇게 많냐고 핀잔준 거. 도망치는 당신을 붙잡아 내 옆에 둔 거. 그게 너무 미안해.
남편
알아. 당신이… 그게 맘에 걸려 나를 찾아온 거. 나를 위해 삼백 번이 넘도록 낮잠에서 깨어준 거.
아내
이제 괜찮을 거야. (남편 어루만지는) 많이 컸어, 당신. 나를 보낼 수 있을 만큼.
남편
(아주 힘겨운 듯, 그러나 또렷하게) 미안해.
아내
수고했어, 여보.

두 사람, 마주보고 웃는다.

아내
드디어 결말을 바꿨네.

빗소리 커졌다가, 이내 그친다.

막.

호들갑 작가소개
경기도 파주, 1992년 12월 9일생. 맛있게 연기하는 배우를 꿈꾸다 직접 군침 도는 요리를 하기로.
더 끝내주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지지고 볶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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