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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립지에서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김연재

186호

2020.09.10

새롭게 시작한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 12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무대 위 다섯 명의 배우는 서로 흡사해 보인다.

국경 지대.
여름 한낮의 뙤약볕이다.
해체공1, 허리까지 자란 풀숲에서 동상의 손을 줍는다.
그는 손을 살피다가 절단면에 귀를 댄다.
양동이 속에 손을 넣은 뒤 달린다.

풀숲을 밟는 트럭의 바퀴와 엔진 소리.
천장에서 줄에 묶인 거대한 동상이 내려온다.

시청 직원1
오늘부터 너는 시청의 동상 해체공으로 고용됐다.
해체공1
나는 한 번도 고용되어 본 적이 없는데요.
시청 직원1
그런 건 상관없어. 너는 무직인 데다가 국경 지대에 살고 있으니 직업을 하나쯤 가져도 좋을 거야.
해체공1
동상 해체공은 무슨 일을 하는데요?
시청 직원1
동상을 최대한 잘게 쪼개는 거야. 원래 동상이었던 흔적이 남지 않도록.
해체공1
동상은 철로 만들어졌는데 어떻게 잘게 쪼갤 수 있죠?
시청 직원1
이걸 주마. 조심히 사용해야 해.

시청 직원1, 해체공1에게 전기톱을 건넨다.
해체공1, 전기톱을 받아 든다.

해체공1
동상을 해체한 다음에는요?
시청 직원1
기다리는 거야. 우리가 다른 동상을 가져올 때까지.
해체공1
시가지에는 그렇게나 동상이 많은가요?
시청 직원1
압축하기 좋게 해체하면 더 커다란 동상을 가져다주지.
해체공1
더 커다란 동상을 해체하면 뭐가 좋은데요?
시청 직원1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
해체공1
휴가도 갈 수 있나요?
시청 직원1
그럼. 대신 시청 시설물 관리과에 신청을 해야 한다.

시청 직원1, 해체공1의 양동이를 들여다본다.

해체공1
훔친 거 아니에요. 풀숲에서 주웠어요. 속이 텅 비어 있었어요. 텅 빈 손에 귀를 대 보았어요. 양동이 속에서 손이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날뛰었어요. 종아리에 스치는 양동이의 감촉이 꼭 사나운 들개 같아서 더 빠르게 뛰었어요.
시청 직원1
누가 이미 해체한 걸 주웠구나. 이런 조각들이 모이면 큰 돈이 된다.
해체공1
여기에서는 소리가 들려요.
시청 직원1
어떤 소리?
해체공1
이 세상에서 무언가가 영영 사라지는 소리요.

숲 속에 전기톱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해체공1
휴가를 승인 받았군요.
해체공2
오래 기다린 덕분에요.
해체공1
휴가를 신청한 사람들이 내 앞에 아직 많대요.
해체공2
동상 해체공이 많아져서 그래요. 숲 전체가 동상 해체장이 되었어요.
해체공1
그래서 어제 왔던 사람들이 그냥 가버렸군요.
해체공2
간혹 숲에 구경을 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해체공1
깃발을 든 관광객들이 찾아왔어요. 동상 해체장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어요. 동상 해체장은 여기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지도와 다르다며 떠났어요. 아니, 처음엔 가이드가 내 어깨를 톡톡 치는 거예요. 너무 놀라는 바람에 전기톱을 내 허리에 잘못 꽂았지 뭐예요. 큰 사고가 날 뻔 했어요.
해체공2
저런. 지금은 괜찮나요?
해체공1
불꽃이 조금 튀었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어요.
해체공2
그게 동상 해체공들의 직업병이에요.
해체공1
동상을 배경으로 관광객들의 단체 사진을 찍어줬어요. 동상의 표면에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이 비쳤어요. 단단한 철이 손끝을 덮었더라고요. 그 사람들 나중에 앨범을 보다가 흠칫 놀랄 거예요. 전기톱을 든 유령이 찍힌 줄 알겠죠.

해체공1, 낄낄 웃는다.

해체공2
도시의 사람들은 만들기보다 없애는 게 더 성가신 것들을 숲에다 버려요. 여기가 우리의 앞마당인 줄도 모르고요. 그러고는 모르는 척 구경을 오죠.

해체공1, 어깨를 으쓱한다.

해체공1
동상을 몇 개나 해체했어요?
해체공2
간신히 하나를 끝냈어요.
해체공1
세상에. 나는 아직인데.
해체공2
그동안 이렇게 늙어버렸어요.
해체공1
동상 하나를 다 해체하면 얼마를 벌 수 있어요?
해체공2
나는 한 푼도 받지 못했어요.
해체공1
왜요?
해체공2
시청 시설물 관리과 사람들이 내 고철들의 무게를 쟀어요. 처음 동상을 가져왔을 때의 무게와 다르다면서 내가 고철을 빼돌렸다는 거예요.
해체공1
무게가 달라졌어요?
해체공2
네. 그도 그럴 것이, 빈 공간이 사라졌으니까요.
해체공1
빈 공간이 사라질 수 있나요?
해체공2
부식된 것 같아요.
해체공1
빈 공간이 부식될 수 있나요?
해체공2
조금씩 부식된 빈 공간이 공기 중으로 흩어진 거예요.
해체공1
빈 공간을 찾으러 갈 건가요?
해체공2
지금 막 떠나는 길이에요.
해체공1
빈 공간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고요?
해체공2
빈 공간이 내는 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어요.
해체공1
빈 공간이 소리를 낼 수 있나요?
해체공2
이건 비밀인데요.

사이.

해체공2
처음에는 동상이 비명을 지르는 줄 알았어요.
해체공1
누구나 처음 전기톱에 베일 때는 아픔을 느끼잖아요.
해체공2
비명이 아니었어요. 전자음이었어요. 쉭쉭거리고, 웅웅거리다가 금속성의 물체를 긁어내리듯이 규칙적으로 클클거리는 소리요.
해체공1
백색 소음 같은 건가요.
해체공2
그럴지도요. 내내 소음에 시달렸어요. 그러다가 오래 전 내가 코를 막고 내뱉었던 재채기 소리가 들렸어요. 전자음을 뚫고요. 나는 그때부터 누군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마는 소리를 들었어요. 죽으려다 마는 소리와 태어나려다 마는 소리를 들었어요. 비가 오려다 마는 소리와 눈사람이 녹는 소리와 바다 안개의 소리를 들었어요. 나는 이제 철을 통과한 모든 파동을 느낄 수 있게 된 거예요. 생각해 봐요,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모든 파동이 계속 남아서 공명하며 신호를 보낸다고 말이에요.
해체공1
섬뜩하네요.
해체공2
너무 쉽게 말하네요, 남 일처럼.
해체공1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요.
해체공2
당신도 언젠가 그런 소리를 들어봤을 텐데요.
해체공1
나는 그런 적 없는데요.
해체공2
그런 건 대개 전생처럼 느껴지니까요.
해체공1
글쎄요.
해체공2
앞으로 듣게 될지도 모르고요.
해체공1
몸에 철분이 유독 많은 사람이 있대요. 그것도 건강에 좋지는 않아요.
해체공2
나는 기립성 빈혈이 있는데요.
해체공1
조심해요. 천천히 일어나요.
해체공2
괜찮아요. 입에 고철 조각을 넣고 빨았더니 많이 좋아졌어요.
해체공1
또 볼 수 있을까요?
해체공2
빈 공간을 다 찾고 나면 다시 들를게요.
해체공1
고마워요.

해체공2, 나가다가 물구나무를 선다. 물구나무를 선 채 나간다.
해체공1, 전기톱으로 자신의 몸을 긋는다.
고철 조각들을 수레에 쓸어 담는다.

시청 직원2
유감이지만 휴가 신청이 반려되었습니다.

사이.

해체공1
그렇군요.
시청 직원2
휴가 사유가 승인되지 않아서요.
해체공1
동상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당최 일을 할 수가 없다니까요.
시청 직원2
예전에도 당신 같은 해체공이 있었는데.
해체공1
나와 같은 소리를 들었대요?
시청 직원2
글쎄, 꺼지지 않는 스피커에서 나는 잡은 같은 걸 들었대요. 스, 스, 스, 스, 스, 하는 기계음 뒤로 흥얼거리는 소리, 입을 여는 소리, 혀를 굴리는 소리, 옷이 마찰하는 소리가 깔려 있었대요. 귀가 아플 정도로 꽉 찬 침묵이 오버 더빙 되어 있었대요. CCTV를 확인해 봐도 동상 해체장에는 고철들뿐이었는데.
해체공1
고철에 저장된 파동을 들었을 수도 있잖아요.
시청 직원2
그 사람도 똑같이 말했어요.
해체공1
내가 그 사람 만나볼 수 있나요?
시청 직원2
휴가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물구나무를 서서 걸어 나갔어요. 사람들이 자꾸만 물구나무를 서서 어지럽다면서요. 소지품 상자를 쏟으면서요.
해체공1
지금은 어떻게 됐어요?
시청 직원2
RISS에 최근에 참여한 연구가 있더라고요. 바다 안개가 빙원 횡단 시 안전선 표시 목적으로 쓰는 카라비너의 부식에 미치는 영향.1)
해체공1
읽어봤어요?
시청 직원2
그럼요. 제가 또 궁금한 건 못 참잖아요. 카라비너를 줄에 매달아 놓고 세 달 뒤에 돌아와 보는 게 전부인 실험이었어요.
해체공1
세 달 뒤에 카라비너는 어떻게 되었는데요?
시청 직원2
부식 돼서 손을 대자마자 바스라졌대요.
해체공1
허무하네요.
시청 직원2
그럴 것도 없어요.
해체공1
메인 저자로 참여한 거였으면 좋겠네요.
시청 직원2
카라비너로 참여했더라고요.
해체공1
아!
시청 직원2
이 동상만 다 해체하면 휴가를 승인해 드리죠.
해체공1
그동안 내가 해체한 동상만 족히 백 톤은 될 거예요.
시청 직원2
속도가 느리시잖아요.
해체공1
다 해체해 봤자 또 무게가 빠졌다고 할 거면서!
시청 직원2
늙은이가 염치도 없지.
해체공1
전기톱도 바꿔주지 않고.
시청 직원2
배보다 배꼽이 크면 안 되잖아요.

해체공1, 다시 자신의 몸을 긋는다.
전기톱이 잘 들지 않아 말썽을 부리는 소리.
무대 위 그의 몸은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는다.
카라비너 소리 들려온다.
그는 카라비너의 소리와 대화한다.

해체공1
너 돌아왔구나! 북극은 어땠어?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논문 잘 읽었어.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동상만 다 해체하면 휴가를 승인해 준대. 그런데 전기톱이 고장나 버렸어.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그냥 동상이 다 부식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하루는 가슴에 타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져서 봤더니 허파와 심장 사이로 바람이 통하고 있지 뭐야.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어. 허파에 바람 들어간다는 말이 이거구나, 싶고. 이제는 예전처럼 고철에 비친 나를 본다고 해도 알아볼 수가 없을 거야.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동상 해체공들은 안에서부터 사라져.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나는 왜 사라지지 않는지 모르겠어.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라고 말하는 순간 네가 지난번에 똑같이 말했던 게 기억났어.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대개 이런 생각이 들 때쯤 사라진다고, 너도 그랬다고 했었나.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점을 치고 있었어. 고철 조각들을 입에 넣고 빠는 거야. 그런 다음에 돌 위에 쭉 늘어놓고 침이 마르는 모양과 속도를 관찰해. 그걸 보고 있으면 내가 오늘 얼마큼 부식될지 알 수 있어.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고철 조각을 입에 넣고 있으면 역겨울 때가 있어. 세면대에 토를 했어. 변기에 입을 대기 싫어서. 세면대가 막혔어. 며칠간 씻지 못했어.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양동이를 좀 빌릴 수 있다면 좋을텐데. 입이라도 헹구게.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정말로 이제는 아무도 나를 알아볼 수가 없을걸.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논문 잘 읽었어. 내가 이 말 했던가?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나는 업무시간의 대부분을 졸면서 보내.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주로 나쁜 꿈을 꿔. 어디로 떠나는 꿈을 꾸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떠나기 위해 지루하게 헤매는 꿈만 꿔. 시간 떼우는 데는 이만한 게 없어.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모두 떠나서 그래.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시청 시설물 관리과에서도 여기에 동상 해체장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어.

카라비너의 소리.

해체공1
이제는 동상을 외국으로 보낸대. 위험해서.

해체공1, 작은 고철 조각들을 뱉어낸다.
돌 위에 고철 조각들을 늘여놓고는 침이 말라가는 모양을 관찰한다.
카라비너 소리 멀어진다.
이제 무대 위에는 해체공1의 손만 남아 있다.

시청 직원3, 풀숲을 걷는다.
고철들이 잔뜩 쌓여 있다.
해체된 동상들이다.
그 중에 손만 남은 해체공1 있다.
바람이 불면 속이 빈 고철들이 땅 위를 구르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시청 직원3은 머뭇거린다.
바람이 잦아든다.

시청 직원3
휴가를 신청하셨죠.
해체공1
악몽을 꿨어요.
시청 직원3
괜찮으세요?
해체공1
처음과 끝이 붙어버린 구조였어요.
시청 직원3
시청 시설물 관리과에서 나왔습니다.
해체공1
업무 시간에 맨날 이렇게 조는 건 아니에요.
시청 직원3
그게 아니라, 휴가를 승인해 드리려고요.

사이.

해체공1
나는 휴가를 신청하지 않았는데요.
시청 직원3
시청 시설물 관리과로 수십 차례 휴가를 신청하셨잖아요.

해체공1, 생각한다.

해체공1
그건 아주 오래 전 이야기예요.

해체공1, 생각한다.

시청 직원3
저희가 더 이상 이곳을 관할하지 않게 된 후에도 계속.
해체공1
나는 혼자 중얼댔을 뿐이에요.
시청 직원3
하지만 제가 들었습니다. 전화기에 녹음된 쉭쉭대는 잡음 사이로요.
해체공1
동상 해체장이 다른 부서 소속으로 바뀌었나요?
시청 직원3
이곳은 이제 지도에서 지워졌어요. 이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시청 직원3, 양동이에 해체공1을 담는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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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재

김연재 극작가
작가, 단추학자, 이미지 수집가
<매립지>,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폴라 목> 등을 썼다. 기계 및 광물과 상호침투하는 배우의 몸 그리고 오컬티즘에 관심이 있다.
인스타그램 @publish_seri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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