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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은 한 점으로 모인다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강세진

188호

2020.10.08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 12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큰 창이 있는 상담실, 창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창살은 십자가 형태이다.
의사와 환자의 자리는 분절된 구역 안에서 대칭을 이루는 듯 보여야 한다.
책상에는 큰 시계가 있고, 시계는 환자 쪽을 향한다.

불이 켜지면 환자와 의사, 서로를 마주보고만 있다.
환자
그래서 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의사
제가 환자분께 무엇을 하라, 마라 말씀드릴 순 없어요.
환자
선생님은 제가 말하면서 깨닫길 원하시죠? 그런데 그걸 못해서 여기 와 있는 거잖아요. 문제를 헤쳐 갈 힘이 있었으면 여기 안 온다고요. 그러니까 말해주세요.
의사
깨달아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도 강박이죠.
환자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의사
저는 해결책을 드릴 수 없어요. 다만 이거 하나만 생각해주시길 바래요. 지금 마음이 고통스러운 게 본인이 못나서 혹은 멍청해서가 아니다, 본인의 고통이 어디에서 와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다보면...
환자
고통이 끝나나요?
의사
덜해질 거예요.
환자는 책상 위에 있는 시계를 내던진다.
환자
엿 먹어요.
환자는 퇴장한다. 수간호사가 쓰레받기와 비를 들고 들어온다.
수간
간만이네요... 아니, 환자들이 다 짰나. 왜 매번 시계만 부수는 거야. 잠깐 추스르고 계세요. 만물상 좀 다녀올게요.
시계를 주워 퇴장하는 수간호사.

사이
노크 소리-
다음 환자가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의사
잘 지내셨어요?
환자
아니요, 불면증이 심해져서요.
의사
상황이 많이 좋아졌던 것 같은데... 약은 제 시간에 드시나요?
환자
예, 약 먹는 건 문제없어요.
의사
그럼 왜 갑자기 잠을 못 이루시는지, 짐작되는 일은요?
환자
들어도 좀.. 믿기 힘드실 텐데...
의사
괜찮습니다. 부담 갖지 말고 얘기해주세요.
환자
제가... 갑자기 사람 얼굴을 들여다보면, 불행한 일들이 떠올라요. 그 사람이 겪을 불행한 일들이요.
의사
상상인 건가요?
환자
대부분 제 상상 같은데, 이뤄질 때도 있어요. 어제는 버스정류장에 같이 서 있던 사람이 머리카락에 묻은 새똥을 닦고 있는 게 상상되더라고요. 그 모습을 떠올리자마자 그 사람 머리에 새똥이 턱하니 떨어졌어요.
의사
그것 때문에 불면증이 생긴 건가요?
환자
아니요. 이건 별 거 아닌 일이고, 사실 정말 큰 문제는 다른 거예요...

(사이)

제가 그리 친하지는 않은데 그냥 정기적으로 찾아뵙는 분이 계세요. 그런데 몇 주 전부터 그 분을 뵈면 어린아이가 살해당하는 모습이 그려지더라고요. 직감적으로 제가 본 어린애가 그 분 딸이라는 걸 알았어요.
의사
끔찍하네요.
환자
그렇죠, 저도 너무 끔찍해서... 그런데 이 장면이 자꾸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데... 이 사실을 얘기해줘야 할까요?
의사
많이 친하신가요?
환자
아뇨, 전혀요. 사실 저를 귀찮아하지 않을까 싶어요... 만약에 제가 말을 하면 그 분이 제 말을 믿고 아이를 보호할 수 있을까요?
의사
음... 글쎄요. 말을 하느냐, 마느냐는 제가 결정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사실 상대가 그리 유쾌하게 들을 것 같진 않네요.
환자
그럴까요?
의사
그렇겠죠.
환자
그렇군요.
의사
언제부터 남의 불행을 엿보게 되셨나요?
환자
한 달도 안 됐어요.
의사
계기가 있었나요?
환자
계기라면... 한 달 전인 것 같아요. 출근버스를 탔는데, 머리에 애벌레 한 마리가 붙어있었어요. 처음엔 놀라서 벌레를 버스 창틀에 옮겨줬거든요... 저는 좌석버스를 타요. 아시죠? 그 창문 없는 버스요. 점점 걱정이 되더라고요. 얘는 지금 물도 없고 풀도 없는 세계에 떨어진 거잖아요. 그곳에서 애벌레한테 남은 삶이란 그냥 말라비틀어져 죽는 거 외엔 없어보였어요. 하릴없이 죽음만 기다리는 삶은 지옥이겠죠.

(사이)

저는 애벌레한테 눈길을 뗄 수 없었어요. 내가 지옥 속에 한 생명을 내던졌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막 나더라고요. 사십분 간 애벌레를 쳐다보다 신용카드 위에 애벌레를 옮겨 같이 하차했어요. 그리고 품에 고이고이 데리고 와서 회사 화분에 옮겨줬어요. 풀밭에 내려놓으면 새가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의사
착하시네요.
환자
아니요. 내려놓고 얼마 안 있다가 곧 죽었어요. 회사 동료들이 난동을 부리며 티슈로 벌레를 눌러죽이더라고요. 제가 커피를 뽑으러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요.
의사
그래도 벌레를 살리고자 노력을 많이 하셨네요.
환자
맞아요. 전 노력했어요.
의사
노력이 허사가 되었을 때 많이 슬프셨겠어요.
환자
예, 제가 애벌레 하나 못 구하는 존잰가 싶었거든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애벌레도 온전한 생명 하나고, 인간도 온전한 생명 하나잖아요. 크기만 작을 뿐이지, 벌레도 인간도 똑같은 값의 생명이니, 뜻대로 다루기 어려운 건 어쩔 수 없겠더라고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진 않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인정하기로 했어요. 그러고 나니 사람들의 불행이 보이더군요.
의사
동료들에게 분노하진 않으셨나요? 벌레를 죽여서요.
환자
글쎄요... 놀랐지만 화가 나진 않았어요. 사람들은 서로 서로 죽이잖아요.
의사
벌레 한 마리의 죽음을 사람과 동일하다 여기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지금 이 마음이 불안을 가중시킬 수도 있고...
환자
혹시... 제가 신은 아닐까요?
의사
왜 갑자기요?
환자
사람의 행불행을 아는 건 신만이 할 수 있는 일 같아서요. 물론 제가 느끼는 건 불행뿐이지만요.
의사
본인을 신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감정이 느껴지나요?
환자
아무것도요. 도리어 어떤 벽에 가로막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내가 신이래도 사람들은 내 말을 신뢰하지 않겠죠. 실제로 내가 말한 불행이 눈앞에 벌어져도, 그 사람들은 내가 예지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이)

마치 유리창 안을 훔쳐보는 거대한 눈이 된 것 같아요...
정말 그 사람한테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리면 안 되는 걸까요?
의사
권장하고 싶진 않네요.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건 좋은 일이죠. 하지만 타인이 원할 때 손을 내밀어야 도움이죠.
환자
사람에게 닥치는 불행은 찰나와 같아요. 찰나에 벌어진 일로 수없이 많은 밤을 고통 받을 사람이 요청하는 도움이래봤자, 이미 불행이 찾아든 다음 아닌가요?
의사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은 기우예요. 만약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대도, 그 고통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죠. 덜어질 수 없어요.
환자
그럼 저는 어떻게 하죠?
의사
저는 환자분께 어떻게 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만, 조언을 해드리자면 다만 연습해보시길 원해요.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지 도와주지 않는 법이요.
환자
제 죄책감은 어떻게 하죠? 도움을 요청할 걸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예방하지 못한 저의 슬픔은요? 도와줄 수 없는 존재의 슬픔도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의사
글쎄요. 아파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줄 수 없다면, 여기서 흘리는 눈물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환자
그런 건가요...... 정말 그럴까요...... 그렇군요......
의사
수면제 성분이 있는 약을 늘려드릴게요.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자리에 누워보세요.
환자
선생님은 신은 믿으시나요?
의사
예, 신을 믿어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환자
재림을 믿으세요?
의사
예수님이 재림할 걸 믿냐고요? 글쎄요... 믿음은 있지만, 알아볼 자신은 없네요.
환자
저는 가끔 신이 자살한 게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렇지 않고 서야 사는 게 이렇게 갑갑할 수 있을까요?
의사
생활은 달라지기가 어렵죠... 신이 자살하셨든 안 하셨든... 하지만 신이 있다 믿는 게 좀 더 건강할 수 있는 방법이죠.

(사이)

새로 드릴 약은 수면 성분이 강하니 아침엔 복용하지 마시고, 잠에 들기 30분 전에 드세요.
환자
(사이) 감사합니다.
의사
저.... 잠깐 궁금해서요. 그 지인 분, 딸은 어떻게 죽나요?
환자
(긴 사이) 그 분 회사에 다니던 직원이 퇴사권유를 받고 나서요. 그 앙갚음을 위해 아이를 죽이더군요.
의사
정말 끔찍하네요.
환자
정말 끔찍하죠...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환자 퇴장한다.

사이
수간호사는 새로운 시계를 들고 상담실에 들어온다.
의사
시계가 없어서, 상담을 몇 분이나 했는지 모르겠네요.
수간
무슨 상담이요?
의사
방금 전에 나간 분이요.
수간
시계 사오느라 환자 오고 가는 거 못 봤는데, 송간한테 확인해볼게요.
의사
김간은 안 왔어요? 근래 자주 늦는 것 같은데
수간
김간은 이번 주 내내 안 와요. 그만두라니까 바로 안 나오는 거 있죠, 정말 속을 모르겠다니까요.
상담실의 불이 서서히 꺼진다.

창밖의 불이 점점 밝아지고
환자가 거꾸로 천천히 창 안을 쳐다보며 추락한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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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진

강세진 극작가
70년대 지방 깡패같은 마음으로 글 쓴 적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주섬주섬, 연장 챙기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po_po_9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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