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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EP 새끼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곽시원

188호

2020.10.08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 12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어느 속죄일로부터 며칠 후.

장소
황야

등장인물
양1 (남, 1살)
양2 (여, 1살)
흙먼지만 날리는 황야. 풀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든 척박한 땅이다.
양1과 양2가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양2는 울먹이고, 양1은 곤란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양2
(감정을 추스르며) 넘어지셨다구요?
양1
불운한 사고였죠.
양2
그러니까, 당신이.
양1
네.
양2
(주변을 둘러보며) 이 황야에서. 나도 당신도 찾을 수 없는 어느 돌부리에 걸려.
양1
네에.
양2
넘어지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양1
그렇죠! 무척 중요한 부분입니다. ‘불구하고’.
양2
넘어지면서.
양1
넘어지면서.
양2
(힘들게 울먹이며) 내 입안과 당신의 입이 부딪혀버렸고.
양1
정말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양2
...입을 떼려고 했으나.
양1
(정정하듯) 입을 떼려고 다시 한번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양2, 말을 잇지 못하고 '메에에-' 울어버린다. 이에 양1도 함께 '메에에-' 운다.
양1
(한숨을 쉬며) 결국 키스에 이르고 말았죠. (짧은 사이) 정말 유감으로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혀를 날름거리고는) 혀는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양2, 분해서 말 그대로 방방 뛴다.
양2
난 방금 전. 그러니까 30초 전까지만 해도 순결한 양이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당신이…!
양1
(뿔을 긁으며) 아... 이거 정말 곤란하게 되었군요.
양2, 감정이 북받쳐 울음을 터트린다.
양1
(양2를 다독이며)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세요. 이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몇십만 어쩌면 몇천만 분의 일의 사건이 일어나 버린 거죠.
양2
그게 뭐 어떻다는 거죠?
양1
이건 분명 '어떠한 일'입니다. 말씀드릴까요?
양2
마음대로 하세요.
양1
개입이 있었습니다.
양2
무슨 말이죠?
양1
누군가가…….
양2
누가요?
양1
어쩌면 뭔가가…….
양2
뭐가요? 돌부리요?
양1
정확히 말하기 힘드네요. 이건 마치 우리가 숨 쉬는 것과 같은 것이죠.
양2
이해가 잘 안돼요.
양1
당신은 어떻게 숨을 쉬는지 알고 있습니까?
양2
그건…….
양2, 몇 번 의식하며 숨을 쉬다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양1
그렇다면 왜 숨을 쉬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양2
그래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양1
맞아요. 살아가기 위해선 숨을 쉬는 것은 필연적이죠.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숨을 쉬는지는 모릅니다.
양2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양1
같은 이치입니다. 제대로 설명할 순 없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이것은 확실한 것이죠.
양2
잠깐, 결과적으로? 어떤 결과를 말하는 거죠?
양1
저와 당신의 입이 맞부딪힌…….
양2가 다시 울음을 터트린다.
양1
(아랑곳하지 않고) 저는 당신의 입에 제 입이 부딪히기 직전. 일 초의 십 분의 일. 아니, 백 분의! 천 분의! 만 분의 일에 달하는 그 찰나의 순간! (짧은 사이)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양2
(짜증섞은 울음을 내지르며)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양1
제가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사이.
양2
(잠시 울음을 그치고) 네?
양1
사랑을 느낀 순간, 돌부리가 제 발등에 가한 것은 노숙자의 귀싸대기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2
그, 그럼…….
양1
(황홀함을 느끼는 듯이) 그건 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익숙한 분의 긍휼한 어루만짐이셨습니다.
양1, 감정이 북받치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울음을 삼키기 위해 노력한다.
양1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라… 이걸 제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것은 나와 당신은 몇십만, 어쩌면 몇천만 분의 일의 확률 속에서 이렇게 우리가 된 것이죠.
양2
(곱씹듯이) 우리……?
양1
(양2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양2, 잠시 생각에 잠겨 발톱을 깨물다가 뭔가 결심한 듯 양1에게 묻는다.
양2
진실로 그렇게 느꼈나요?
양1
(양2의 손을 뿌리치고) '그때에는' 그랬습니다.
양2
그때에는? 그럼 지금은요?
양1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양2
왜죠?
양1
제가 당신의 입에서 나의 입을 떼어내는 그 순간, 돌부리에서 느꼈던 긍휼한 어루만지심은 어쩌면 노숙자의 귀싸대기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양2
겨, 결국 지금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양1
잠시 숨어버렸거나, 어쩌면 영영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양2, 이전들보다 더욱 크게 울음을 터트린다.
양1
왜 더욱 크게 울음을 터트리죠?
양2
당신의 사랑이 잠시 숨어버렸거나, 어쩌면 영영 떠났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양1
슬퍼하지 말아요.
양2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양1
우리는 한때 사랑했고, 그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거예요.
양2
아름다운 추억? 그저 추악한 기억일 뿐이에요!
양1
그건 당신이 정하는 겁니다. 내가 사랑했던 순간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아름다워질 것이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추악해지겠죠.
양2
그럼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인가요?
양1
아름답게 남기고 싶다면 말이죠.
양2, 아무말도 않고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얼마 후 침묵을 깬다.
양2
인정할 수 없어요.
양1
정말인가요?
양2
그래서 용서할 수도 없어요.
양1
용서라니…….
양2, 다시 아무 말 않는다.
잠시 후 또 침묵을 깨고 말한다.
양2
난 당신 때문에 상처를 입었고……. 화가 나요.
양1
그럴 수 있습니다.
양2
번지르르한 말로 아무리 나를 현혹시켜도 그건 결국 속임수일 뿐이에요.
양1
진실은…….
양2
닥치고 들어요. 진실은 딱 하나뿐이에요. 난 상처 받았고, 당신은 죄를 지었다는 것.
양1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양2
어떻게 하면 내가 받은 상처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까요.
양1
그런건 애초에 불가능해요.
양2
아뇨.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그저 죗값을 치르면 돼요.
양1
좋아요. 그렇다면 결제 방식은 어떻게 되나요?
양2
난 당신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라요.
양1
이런…. 마음은 아프지만, 알겠습니다.
양2
당신의 울음소리가 들리지도 않았으면 좋겠고.
양1
지금 당장 출발을 하도록 하죠.
양2
냄새도.
양1
발을 재촉해야겠는데요?
양2
당신과 숨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날 괴롭게 해요.
양1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양2
당신의 죄를 짊어지고 영원히 사라지도록 하세요. 이 땅에서.
양1
황야를 말하는 거죠?
양2
아뇨. 이 모든 곳이요.
양1
아……. 이런…….
양2
겁이 나나요?
양1
저는 그런 겁쟁이가 아닙니다. 단지…….
양2
단지?
양1
저는 희생양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어, 저에게 다시 그것들을 지게하고 이곳으로 쫓아냈습니다.
양2
그래서요?
양1
제 등은 이미 죄로 가득합니다. 어쩌면 이 황야 어딘가에 얼마쯤 흘렸을지도 모르겠어요.
양2
(조금 당황하며) 그럼 어떻게 하죠?
양1
글쎄요. 저도 어떻게든 죗값을 치르고 싶습니다만 난감하네요…….
양1,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한다.
양1
아……!
양2, 양1을 쳐다본다.
양1
(혼잣말로) 아니야.
양2
뭐죠?
양1
아닙니다. 글쎄…… 이건 저에게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양2
그럼 저는 더 기쁘겠어요. 뭐죠?
양1
다른 양에게 제 죄를 지도록 하는 거죠.
양2
좋은 방법처럼 들려요. 하지만 누가 그런 일을 자처 할까요?
양1
그렇죠. 아무도 그런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양2
하지만?
양1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저처럼.
양2
아……. 그런데 남에게 죄를 덮어 씌우는 것이 왜 당신에게 가혹한 일이라는 것이죠?
양1, 양2에게 다가가서 말한다.
양1
괴롭지만 결정했습니다.
양2
무엇을요?
양1
이 잔인하고 가혹한 방법으로 제 죗값을 치르기로 말입니다.
양1, 양2의 손을 잡고, 한쪽 무릎을 꿇는다.
양2
(깜짝 놀라며) 왜 이러세요?
양1
제가 당신과 결혼을 해드리겠습니다.
양2
갑자기 양이 왜 개소리를 하죠?
양1
당신에게 내 아이를 바치겠습니다. 그럼 그 새끼에게 나의 죄를 지어주세요.
양2
그, 그럴 수가 그럼 우리 새끼가……?
양1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희생양이 되는 것이죠. 나의 죄를 짊어질.
양2
(혼잣말로) 너무 비극적인 일이야. 우리가 정말 결혼한다면 그의 새끼는 곧 나의 새끼이기도 해. 내 배 아파 낳은 새끼에게 내가 가장 증오하는 자의 죄를 지을 수 있을까?
양1
(무릎을 털고 일어나) 제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전 이만 가도록 하겠습니다.
양2
잠깐! 기다려요!
양2, 양1의 어깨를 채어 잡는다.
양2
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당신을 증오해요. 그런데 우리가 결혼을 한다니요? 이건 또 다른 추악한 기억이 될 거에요. 당신은 지금 또 다른 죄를 짓고 있어요.
양1
그럼 그 죗값까지 내 새끼에게 지어주세요. 낳고 길러, 나의 울음소리를 추악하게 기억하며 황야로 쫓아 보내세요.
양1, '메에에-'하는 울음소리를 내고 양2 또한 같은 울음소리를 낸다.
양2
우리 새끼를 꼭 사랑해주세요. 당신의 마음이 이 흙먼지가 될 만큼 갈가리 찢길 수 있도록.
양2, 양1의 팔짱을 낀다.
양1
물론이죠.
둘은 팔짱을 낀 채로 퇴장한다. 흡사 버진로드가 연상되는 모습이다.
양1과 양2의 울음소리가 번갈아 가며 황야에 퍼져나간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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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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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살고 싶어, 즐겁게 쓰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즐겁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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