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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넘기를 찾는 사람들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이휘웅

189호

2020.10.22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 12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개인병원 피부과 대기실.

안내데스크에 간호사 한 사람 앉아 있다.
중앙의 기다란 대기석에 지훈 앉아 있다.
대기석 뒤에 커다랗고 장식적인 문 하나, 무대 구석 벽에 붙은 금고 하나.
금고 옆에 창문. 창밖으로 보이는 밋밋한 회색 조 하늘.

선아 들어온다.
간호사
(데스크 속에 눈을 고정한 채) 몇 시 예약하셨어요?
선아
예약은 안 했고요. 상담받으러 온 게 아니라 지우 친구예요. 오늘 만나기로 했거든요.
간호사
성함이?
선아
선아요. 정선아.
간호사
(데스크 속 마우스를 움직이며) 정선아 씨. 다섯 시에 예약되어 있습니다.
선아
예약한 적 없는데. 지우가 해놓았나 본데요. 네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을 착각했나 봐요. 지금 잠깐 들어가서 인사만 해도 되겠죠?
간호사
(갑자기 고개를 들며) 아뇨. 지금 시술 중이세요.
선아
뭐지? 분명히 네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서성인다. 중앙의 대기석 쪽으로 가며) 여기 앉아서 기다릴게요.
대기석 의자 하나를 비워두고 지훈의 오른쪽에 앉는다.
잠깐 사이.
지훈
어떻게 한 거야?
선아
……? (고개를 든다)
지훈
그때 말이야. 초등학교 후문에서 우리 한 판 뜨기로 했잖아. 나는 후문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고, 정문은 오학년 누나들이 지키고 있었지. 어디로 빠져나간 거야?
선아
지금 저한테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훈
그래.
선아
저 아세요?
지훈
선아 아니세요? (사이) 선아 맞잖아. 이거 섭섭하네.
선아
아. 아! 너 지훈이구나! (팔을 살짝 친다) 웬일이야.
지훈
그래.
선아
여기서 다 만나네. 어쩐 일이야?
지훈
나도 지우를 만나러 왔지. 너처럼. (선아를 쳐다본다) 너도 시술받을 거지?
선아
아니. 난 그냥 지우랑 얘기하러 온 거야. 확인해야 할 게 있거든.
지훈
왜 시술 안 받아?
선아
응? 별다른 이유 없어. 꼭 받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지훈
요즘 다들 못해서 난린데. (속삭이듯) 지우가 공짜로 해준다고 했잖아.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선아
아니야. (손사래 친다)
지훈
여전하네.
선아
뭐가?
지훈
항상 “아냐, 아무것도”라고 대답했잖아. 친구들한테.
선아
그렇지 않아. (사이) 설명하기 어려워서 그래.
지훈
(어깨를 으쓱하며) 뭐 그렇겠지.
선아
(사이) 사실…… 난 그 시술을 받는 게 회피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그런 몸을 갖고 살기엔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너무 많잖아.
지훈
무슨 말이야?
선아, 몸을 돌려 지훈을 등지고 앉는다.
멀리서 규칙적인 기계음 들린다.
선아
여기, 목덜미에 두드러기가 생겼어. 너무 가려워. 나는 십 년 동안 먹던 음식을 먹고 십 년 동안 썼던 샴푸를 쓰고 있거든. 근데 요즘 갑자기 알레르기 반응이 생겨. (손등을 보여준다) 봐, 여기도 두드러기가 생겼어. 최근에 사람들한테 자꾸 이런 피부병이 생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지훈
음. (느릿느릿 말한다) 글쎄 내 생각엔……
선아
들어 봐. 이건 피부의 문제가 아니라 공기의 문제야. 피부가 영구적으로 탱탱해진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야. (소리를 낮춘다) 내가 지우가 하는 시술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 공기 중의 오염 물질을 중화하는 막을 피부 전체에 입히는 것에 불 과해. 모두가 나쁜 공기 속에 사는데, 소수만 그런 혜택을 누리는 건 불공평하잖아.
지훈
그러니까 네 생각에, 새로운 피부 시술을 받는 건 나쁜 일이라는 거지?
선아
그래.
지훈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도 걱정이 되긴 해. 이 시술은 처음에는 부작용이 많았대. 심장이 멈추고 뇌가 멈춰도 피부는 계속 탱탱해서, 죽은 사람이 지하에서 올라오거나 하늘에서 내려온다 해도 구분이 안 될 거래.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어. 요가를 잘 가르치는 사람은 많고, 배우려는 사람은 줄고, 온갖 운동법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한마디로 나는 몸 관리를 남들보다 잘해야 해. 영원히 탱탱한 요가 선생이 되려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나저나 어떻게 한 거야?
선아
뭘?
지훈
초등학교 사학년 때 말이야. 우리 후문에서 만나 결판 짓기로 했잖아. 정문은 오학년들이 지키고 있었고, 담을 넘을 만한 곳도 한 명씩 서서 망을 보고 있었는데. 어디로 빠져나간 거야?
선아
(황당한 듯 웃는다)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기억도 안 나는데. 그러니까 네 말은 그때 우리가 (주먹을 치켜든다) 사학년 일 반 짱이 누군지 가리려고 한 판 붙기로 했었다는 거지?
지훈
(놀란다) 아니. 주먹싸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 줄넘기 말이야.
선아
줄넘기라고?
지훈
그래, 줄넘기. 그때 우리 반 유명했잖아. 한 번도 싸움이 없었던 반으로. 다들 줄넘기에 미쳐 있어서, 싸울 일이 생기면, 방과 후에 남아 줄넘기 대결을 했잖아. 보통 오래 넘거나 일 분 동안 많이 넘으면 이기는 거였지만, 좀 잘하는 애들은 이단 뛰기로 우열을 가렸고, 너랑 나 수준이 되는 애들은 삼단 뛰기나 뒤로 이단 뛰기로 승부를 보곤 했지. 패배하면 한 달 동안 줄넘기를 할 수 없는 게 우리의 규칙이었고. 그렇게 승자와 패자의 실력 차가 벌어졌어. (선아 웃는다) 그땐 전혀 웃긴 일이 아니었어. 네가 기억을 못 하니까 이상하다! 네가 줄넘기에 제일 미쳐 있었고 친구들에게 줄넘기를 가장 많이 빼앗은 애였잖아.
선아
내가 줄넘기를 뺏었다고?
지훈
그래. 너한테 줄넘기를 뺏긴 주호가 방과 후에 교실에 남아 몰래 줄넘기를 하다 주번한테 걸리는 일도 있었지. 다음날 점심시간 주호는 교탁에 서서 일 년 동안 내뱉은 자신의 모든 거짓말을 낱낱이 고백해야 했고, 그러고 나서는 아무도 그 걔한테 말을 걸지 않았어.
선아
잔인했네.
지훈
(자신의 회상에 점점 몰입) 가을엔 이미 줄넘기가 우리 반만의 문제가 아니었어. 줄넘기의 열정이 거대한 하수구처럼 전교생을 휩쓸어 버렸지. 게다가 선생님들이 교실 뒤 게시판에 “오늘의 줄넘기” 산을 만들고 꼭대기에 일등 한 애의 사진을 붙여줄 정도로 줄넘기 유행을 부추겼어. 그래서 방과 후엔 복도, 운동장, 학교 뒤 주차장에서 전교생이 미친 듯이 줄넘기를 해댔다고. 우리는 뒤로 이단 뛰기를 할 줄 아는 애만 출입할 수 있는 옥상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곤 했어. 장관이었지. 그런 진정한 열정에 동참할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야.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내가 하수구 위에 살아남은 머리카락 뭉치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선아
(계속 웃는다) 하나도 기억이 안 나. 그런데 내가 사학년 때 뒤로 이단 뛰기를 했다고? 대단한데.
지훈
야, 너 정말 하나도 기억을 못 하네. (실망한 듯 말을 멈춘다) 그래, 물론 사소한 옛날얘기지. 기억을 못 할 만도 해. 게다가 넌 워낙 바쁘니까. 친구들을 못 만난 지도 한참 됐지? 인터넷 뉴스에서 네 이름을 여러 번 봤어. ‘분해 분해’ 프로젝트였나?
선아
‘아이 분해’야. ‘아이 분해’.
지훈
네가 쓰레기를 찾아내고 분해하는 AI 로봇을 설계한 거지? 전 세계에 수출한다고 여기저기 뉴스에서 떠들어 대던데. 정말 대단해.
선아
내가 설계한 게 아니야. 팀원들을 잘 만났지.
지훈
난 네가 잘될 줄 알았어. 옛날부터 끈기가 장난 아니었지. IQ도 우리 반에서 세 번째로 높았고.
선아
하하. 내가 기억하기론 두 번째였어.
지훈
맞아. 거의 첫 번째였지.
선아
고마워.
지훈
지금보니 살도 빠진 것 같아.
선아
고마워.
지훈
쇄골이 정말 반듯하네.
선아
응.
지훈
그나저나 그날, 우리가 마지막 줄넘기 결투를 하기로 했던 날, 정문을 지키던 오학년 누나 기억나? 솔이 누나 말이야.
선아
솔이 언니…… 기억하지.
지훈
(갑자기 슬픈 목소리) 며칠 전에도 다들 모여서, 솔이 누나 얘기했어.
선아
솔이 언니한테 무슨 일이 있었어?
지훈
증발. 그 누나 증발했어.
선아
(심각한 표정이 되어) 실종되었다고?
지훈
아니. 은유적인 뜻이 아니라, 진짜 기화되어 흩어져 버렸어. (손으로 흩어지는 시늉을 한다) ‘피융’하고.
선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지훈
다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하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조차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솔이 누나의 증발에 대해서,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고 있다는 거야.
선아
(어리둥절해서) 그러니까 솔이 씨에게 무슨 나쁜 일이 있었다는 거구나.
지훈
그만해!
선아
(의자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친다) 뭐야……왜 이래?
지훈
어제 술자리에 있었던 친구들 모두 그렇게 결론 내렸어, 솔이 누나의 증발은 다 네 탓이라고! 네 얘기가 나오면 다들 이렇게 말하지. (과장된 연기를 시작한다) “선아? 그게 누구더라?” “아, 그 비열한 줄넘기 일등을 말하는 건가?” “정작 결승전에서는 도망친 그 정선아를 얘기하는 거 맞나?” “그 뭐더라, ‘아이 슬퍼’ 프로젝트인가 ‘슬쩍 회피’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던데!” “대단한 영웅 납셨네!” (킬킬 웃는다) 그러다 이런 진지한 비평도 나오지. “흠, 난 솔직히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던데. 진심이 안 느껴진달까. 화제를 타고 유명해지긴 했지만 상용화를 핑계로 몇 년을 지루하게 끌다가 결국 바보들의 유행과 함께 사라질 말장난에 불과해.” (선아 표정 점점 차가워진다.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서성인다. 지훈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이런 지적인 진단을 하는 친구도 있지. “그런데 AI가 어떻게 쓰레기와 쓰레기가 아닌 것을 구분한다는 거지? 그 경계가 인위적인 만큼 식별 장치에는 무시무시한 위험이 잠재해. 선아의 프로젝트는 인류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어제 우리는 이렇게 결론 내렸어. 솔이 누나의 증발은 네가 진짜 사소한 부탁 하나를 들어주지 않은 바람에 발생한 일이라고. 네가 사소한 행동 하나만 취했으면 솔이 누나가 그렇게 사라질 일은 없었을 거라고. 무슨 염치로 여기 온 거야? 염치가 있다면 우리 모두에게 사과해야지. 자꾸 기억 안 나는 척을……
선아
야! 난 정말 아무 기억이 없다고. 난 솔이 언니랑 거의 모르는 사이야.
지훈
(고개를 젓는다) 뻔뻔하네.
선아
내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어이없네. (여전히 일어선 채 대기석 주위를 배회한다. 잠깐 사이) 그래. 내가 솔이 언니랑 알고 지냈다고 치자. 잘 아는 사이여서,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어둡고 작은 당구대가 있는 일 층 호프집에서 만나 당구를 치던 사이였다고 치자고. 어쩌면 솔이 언니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몰라. “너무 건조해. 모든 게. 이 맥주, 이 벽, 소음들, 선아 너, 이 당구공마저도. 너무 건조해. 너무 건조해서, 내 수분을 다 나눠주고 싶어.” 어쩌면 그때가 내가 위로를 건넬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막 프로젝트의 펀딩을 시작하고 있었어. 인류의 존속에 기여할 게 확실하지만 무관심 속에 공중 분해될지도 모르는 ‘아이 분해’ 프로젝트를 알리기 위해 너무 바빴고, 머릿속엔 그 프로젝트에 대한 생각뿐이었어. 그러다 보니 어쩌면 나는 기다란 당구봉에 기대어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는지도 몰라. 솔이 씨는 성인이야. 물론 나는 솔이 씨의 집에 가습기 하나를 선물할 수도 있었을 거야. 내가 줬다는 것도 모르게, 산타할아버지처럼. 하지만 선물 받은 가습기가 인간의 증발을 늦추는지, 더 가속화하는지는 나보다 뛰어난 기획자나 천재 과학자라 해도 영영 알 수 없는 문제야!
지훈
정말?
선아
그래 정말이라니까.
지훈
지우가 전부 너 때문이라고 하던데.
선아
이 새끼. 내 앞에서 말해보라고 해.
선아 벌떡 일어나 커다랗고 장식적인 몰딩이 있는 문으로 다가간다.
심호흡한 뒤 벌컥 연다. 의료도구가 있는 작은 창고다.
기계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쓰러져 내린다.
기계가 사라져 드러난 벽에 두 개의 색동줄넘기가 X자로 걸려 있다.
간호사
(달려오며) 뭐 하시는 거예요? (의료도구를 다시 창고에 넣는다)
선아
아니……그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지훈
(천천히 가까이 온다) 진료실은 저쪽 문이야.
지훈이 가리키는 곳에 벽에 붙은 금고가 있다.
성인이 겨우 기어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은 높이와 너비.
선아 그 문을 향해 돌아선다.
간호사
열지 마세요! 시술 중에 빛이 들어가면 안 돼요.
선아
죄송하지만, 당장 물어봐야 할 게 있어요.
간호사
제발 앉아 계세요!
선아 앉는다.
간호사도 제자리로 간다.
지훈 서성거리다 커다란 문을 조심스레 빼꼼 열더니 색동줄넘기 두 개를 꺼낸다.
지훈
하필 줄넘기가 있네. (사이) 그때 못한 승부를 지금 해볼까?
선아
지금? 여기서?
지훈
그래. 여기서.
선아
여기서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간호사의 눈치를 본다. 간호사 신경도 쓰지 않고 데스크 속 업무에 집중한 채)
지훈
자! 옛날 생각나지?
지훈 선아에게 줄넘기 하나를 던진 후 줄넘기를 시작한다.
어색하게 이단 뛰기도 한다.
간호사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지훈
너도 얼른 해 봐!
선아
아니, 나는 괜찮아.
지훈
제발, 아무 생각 말고 줄넘기에 몸을 맡겨봐!
선아
줄넘기가 정말 진지한 일이었고, 여전히 너한테 큰 의미가 있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여기서는…….
지훈
또 결판 짓길 피하는 거지? 다음에, 다음에 미루면서 결국 안 할 속셈인 거 알아.
선아
너 자꾸 내가 뭔가 회피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이곳은 병원 대기실이고, 난 이런 곳에서 줄넘기를 휘두르고 싶지 않을 뿐이야.
지훈
네가 설계한 ‘아이 분해’ 로봇 있잖아, 그 로봇의 움직임은 우리의 “달리며 이단 뛰기”에서 영감을 받은 게 확실해. 그렇지? (이단 뛰기를 한다. 숨을 헐떡이며) 이런 식으로 움직이잖아. (줄넘기를 넘으며 대기실을 쏘다닌다)
선아
(화를 감추지 못한다) 너랑 말을 섞은 게 잘못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네가 얼마나 멍청한 놈인지 잠깐 잊고 있었어. 너한테 설명하기엔 너무 어려운 내용이지만, 로봇의 형태와 움직임은 최고의 전문가들이 몇 년간 힘을 합쳐 고안해낸 거야. 유해물질을 분해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을 계산하고 구현한 거라고.
지훈
그게 바로 줄넘기야. 최소한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최대한의 열량을 태우는 운동이지. 덕분에 그때 우리 반에는 비만인 친구가 한 명도 없었잖아.
선아
제발 멍청한 소리 좀 집어치워! (줄넘기를 방해하려고 한다) 그만해! (줄에 맞을까 봐 살짝 물러선다) 너희들은 내가 얼마나 중대하고 긴급한 일을 해내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해. 줄넘기 시합이나 친구를 위로해주는 일, 외로운 친구에게 가습기를 선물하는 일은 너처럼 한가한 애들이 책임지고 해야 하는 거야!
지훈
(줄넘기를 멈추고 숨을 고르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선아
그래! 난 너무 바빠. 그런 일까지는 도저히 해낼 수가 없어. 그런 일은 너처럼 다른 방법이 없는 애들이……
지훈
“다른 방법”이라니?
선아
(당황한다) 아니, 내 말은…… 아냐, 아무것도.
지훈
(끄덕인다) 앞으로 넘든, 뒤로 넘든, 줄을 계속 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나.
간호사
(목청 높여) 이지훈 씨. 들어가세요.
지훈
아, 넵. (다시 선아를 보고) 나머지 얘기는 나 시술받고 나와서 더 하자.
선아
솔이 씨 문제에 정말 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지우한테 분명하게 물어봐.
지훈
알겠어, 내가 다시 한번 제대로 물어볼게. 참고로 네 얘기가 나올 때 말이야, 나는 한 번도 널 욕하는 친구들한테 동조한 적 없어. 분위기가 좀 풀어졌을 땐 “분해 분해 프로젝트가 정말 대단하긴 해”라고 주장한 적도 있어.
선아 차갑게 고개를 끄덕인다.
금고 문을 열고 높이에 딱 맞는 어린아이가 걸어 나온다.
지훈 열린 문으로 기어들어 간다.
지훈
(엉덩이를 문밖에 둔 채) 지우 안녕! 보고 싶었어. 어제도 봤지만. (문을 닫고 사라진다)
어린아이 퇴장하지 않고 구석에 서서 선아를 쳐다본다.
어린아이의 얼굴은 너무나 하얗다.
선아 멍하니 서 있다.
선아
나답지 않게 너무 흥분했어. (대기석에 앉는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창밖에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다.
창밖 하늘에서 흰 방호복 입은 형체가 서서히 내려온다.
몸 곳곳에 알록달록한 와이어가 연결되어 있고 가벼운 방독면을 쓰고 있다.
허리엔 갖가지 청소도구를 매단 채.
흰 형체 창문을 두드린다.
집요하게 두드린다. 선아에게 손을 흔든다.
선아
뭐야? ……? (깜짝 놀라며 일어난다) 솔이 씨!
솔이
안녕 선아.
선아
(창문을 연다) 거기서 뭐 해요?
솔이
(창틀을 붙잡고 딱 붙어 선다) 창문 닦고 있지.
선아
아, 네. (사이) 나쁜 소식이 있다고 해서…… 언니한테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어요.
솔이
무슨 나쁜 소식?
선아
증발했다고 하던데요.
솔이
(웃음) 내가 실종되기라도 한 줄 알았어?
선아
그게 아니라. 기체가 됐다고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길래.
솔이
그랬으면 좋겠지만 동생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 (갑자기 더 큰 웃음)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알겠다. 이 년 전에 이 건물 일 층 호프집에서 몇 명 애들이랑 술을 마셨어. 마시다 시간을 보니 새벽 다섯 시 반인 거야. 나 그때 출근하거든.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호프집 화장실 창문을 열고 몸에 와이어를 부착한 뒤 창문을 닦으며 올라가기 시작했지. 그 이후로 친구들에게 연락하지 않았어. 그때 술값이 백만 원은 나왔을걸.
선아
술값 내기 싫어서 연락을 안 한 거예요?
솔이
그건 아니고. 술이 깨고 나서 친구들이랑 거리를 두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선아
왜요?
솔이
뭐, 그냥. 나랑은 사는 방식이 다르니까.
선아
그럼 그날 술 취한 채로 일을 한 거예요?
솔이
이 일에서 내가 어떤 상태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술에 취했든 정신이 나갔든 손이 빠르든 느리든. 마지막 날들을 어떤 고리에 걸 거냐, 그것만이 문제야. 그런 단순함이 난 좋아. 어떤 고리에 내 줄을 거느냐에 따라 며칠 동안 병원을 보게 될 수도, 식당을 보게 될 수도, 학원을 보게 될 수도 있어.
선아
“마지막 날들”이라고요?
솔이
그래. 줄을 잘 걸면 저녁엔 창문에 비친 노을을 볼 수 있어. 그러면 나는 잠깐 일을 멈추고 하늘을 감상하려 해. 하지만 먼지가 노을과 창문 사이를, 창문과 나 사이를, 내가 닦은 창문에 희미하게 남은 수분 위를 곧장 덮어버려. 공기가 지독하게 나빠. 이 상황에 창문을 닦고 있는 건 미친 짓이야. 우리에게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게 분명해 보이거든.
선아
아, 네.
솔이
그래서 말인데, 사소한 부탁이 하나 있어.
선아
그런데 지금 진료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솔이
부탁이야. 내 부탁을 한 번 들어주기로 약속했잖아.
선아
약속이요? 제가 약속을 했다고요?
솔이
그래. 그때 초등학교 정문에서. 못 본 척 빠져나가게 해주면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기로 했잖아. “언니, 배가 너무 아파요. 지금 그놈과 줄넘기 시합을 하면 제가 질 게 뻔해요. 제발요”라고 했잖아.
선아
(지친 목소리) 아아.
솔이
(대기실 구석에 서 있는 어린아이를 가리키며) 저기 내 동생이 있어. 이 건물 삼 층에 있는 태권도 학원에 데려다줘야 해. 그때까지만 이 일을 대신해 줘.
선아
그렇게 어려 보이진 않는데요. 아니면 제가 데려다주면 안 될까요?
솔이
동생에게는 심한 아토피가 있어. 그런데 내가 이렇게 일을 하고 있어서 병원까지 혼자 왔어. 상태가 얼마나 좋아졌나, 혹시 나빠지진 않았나 당장 확인하고 싶어.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항상 잠들어 있으니, 우리는 대화할 시간도 없다고.
선아
잠깐 비워두면 되지 않을까요?
솔이
텅 빈 채 매달린 와이어를 관리자가 보면…… 난 일자리를 잃을 거야.
선아
음. (고민한다) 며칠 남지 않았다면서 일자리를 잃는 게 대수인가요?
솔이
(벌컥 화를 내며) 며칠 남지 않았다는 건 은유적인 말이야. 동생을 먹이고 입히고 학원에 보내는 건 눈앞의 현실이고.
선아
알겠어요.
솔이 창문 안으로 들어온다.
선아 몸에 알록달록 와이어 묶는다.
솔이 도망치듯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사라진다.
선아 창밖으로 둥실 날아오른다.
선아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공중에서 흔들린다.
잠시 후 지훈과 지우 대기실로 기어 나온다.
지훈의 팔과 얼굴 피부에서 엄청난 광이 흐른다.
지우
(지훈의 몸 너머로 빼꼼 쳐다보며) 얘 어디 갔어?
지훈
아까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화장실이라도 갔나?
선아
야! 얘들아. 나 여기 있어.
선아 창문을 두드리려고 한다. 몸을 가누지 못한다.
지우
(열려 있던 창문을 닫으며) 소음이 크네.
지훈
(소리 낮춰) 창문 닦는 사람이 일을 굉장히 못 해!
지우
아무튼, 걔가 다시 오면 무조건 칭찬을 해. 정말 대단하다느니, 타고났다느니, 옛날부터 잘 될 걸 알았다고 치켜세워주란 말이야. 원래도 거만한 애니까, 그런 말로 쉽게 의심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거야.
지훈
알겠어.
지우
그리고 외모에 대한 칭찬도 한두 마디 해.
지훈
그래.
지우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이 커다란 문으로 인도해서 줄넘기를 발견하게 해. 그리고 너도 처음 발견한 것처럼, 이십 년 만에 처음 잡아보는 척 어설프게 줄넘기를 하면서, 걔한테 다시 한번 결투를 신청해. 일방적으로, 따끔하게 혼쭐을 내주란 말이야. 아예 절망하게 만들어! 그러면 내가 대기실로 나와 걔를 위로해 줄 거니까. 이렇게 말할 거야. “친구야, 모든 일을 바로잡을 필요는 없어. 옛날의 줄넘기 같은 열정을 발휘할 필요도 없고. 지금은 밤이고, 밤에는 선물을 기다리거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눠야 해.”
지훈
알겠어.
지우
어제도 연습했지?
지훈
하루종일 했지. 하지만 나는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 인제 와서 이단 뛰기 결판을 내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난 그때의 일을 다 잊었어.
지우
바보야, 당연히 줄넘기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 녀석이 패배감에 젖어 ‘아이 분해’ 프로젝트를 말아먹게 하는 데 있는 거라고.
지훈
(기분이 나빠져서) 줄넘기가 중요하지 않다고?
지우
그래! 중요한 건 나쁜 공기, 사물의 건조함, 한쪽 날개를 잃은 벌처럼 회전하는 피부과 대기실의 대기 인원이야.
지훈
그게 무슨 말이야?
지우
(한숨 쉬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이 분해’ 프로젝트를 싫어하는지 아니? 그 사람들을 대신해서 우리가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거라고.
지우 다시 작은 문 안으로 기어들어 간다.
창밖의 선아 천천히 하늘 위로 사라진다.
지훈 뭔가 말하려다 말고 줄넘기한다.
줄넘기하며 퇴장한다.
간호사의 타자 치는 소리와 먼 곳의 기계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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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웅

이휘웅
시와 미술, 언어와 사물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재학 insta @shampooforoilyh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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