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그것이 그것이 아닌 것은 이제 더 이상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홍기황

제198호

2021.04.15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1년 5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 이레 (로봇, 5년, 곧 폐기를 앞둔 상태)
- 정호 (남, 30세, 냉동인간에서 해동된 상태)
겨울. 이따금 세찬 바람 소리가 들린다.
영양균형소. 청결한 느낌을 준다.
이레, 혼자 가만히 앉아있다. 아무런 미동도 없다.
잠시 후, 정호, 손에 입김을 불며 등장한다.
정호
훨씬 추워졌네.
정호, 생각했던 것과 다른 환경에 낯선 듯 주위를 둘러본다.
이레, 스위치 켜지듯 정호를 발견한다. 일어선다. 인사한다.
이레
어서 오세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시면 됩니다.
이레, 정호를 쳐다본다.
정호
왜 그래요?
이레
센서에 의하면 고객님의 영양 밸런스가 다소 무너진 것으로 확인 됩니다.
정호
영양 보충이 필요하긴 하지.
이레
이번 신제품 바는 어떠십니까?
기존 제품과 다르게 씹을 수 있도록 식감이 존재하지만 절대 치아를 마모시키지 않는 제품입니다.
정호
고기 없나요?
이레
신제품 바에는 고기 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소고기 향, 돼지고기 향, 닭고기 향부터 취향에 맞게
정호
고기 향 말고요.
이레
스파이스도 자세하게 설정 가능합니다.
소금과 후추, 생강, 된장, 마늘, 강황 등 다양한 향신료 향을 첨가하실 수 있습니다.
정호
여기 고기는 안 파냐고요.
이레
고기는 판매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호
여기가 가장 가까운 마트라고 들었는데요.
이레
이곳은 고객님의 신체상태에 따라 균형 있는 영양소로 배합된 식품을 제공해드리는 영양균형 소 그램입니다.
정호
이런 다이어트 제품 같은 거 말고 제대로 된 음식 파는 곳 없나요? 정육식당 같은 곳이요.
이레
2119년, 현재 정육된 고기를 파는 곳은 더 이상 없습니다.
정호
고기를 안판다고?
이레
2030년, 배양육 상용화 이후, 동물에 대한 인간의 윤리를 주장하는 식품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혁명이후, 국제적으로 동물을 사육, 정육하는 시스템이 전면 금지되어 더 이상 생명을 고기로 팔 수 없습니다.
정호
사실이에요?
이레
그렇습니다. 현재 인류는 이러한 방식이 음식을 섭취하는 데 가장 인간적인 행위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정호
나 참.......
정호, 혼자서 화를 식힌다.
이레
고객님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정호
여긴 더 지옥이네. 먹는 재미마저 없으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이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정호
이런 말도 이제 없죠?
이레
검색해보니 과거 잇몸치료약 광고에 있던 가사로 나옵니다.
이 약도 식품혁명 이후에 사라졌습니다.
정호
잘못 깨어났네. 잘못 깨어났어.
이레
영양상태 통계를 보니 해동인간으로 확인되는데 맞으십니까?
정호
다들 절 그렇게 부르더군요. 사람을 냉동육마냥 취급하고,
어쩐지 병원 재활기간동안 음식이 뭔가 이상하다 했어.
난 또 그게 병원식인 줄 알았지.
아, 지금 일어나면 은행이자도 잔뜩 불고 고기도 왕창 뜯고 행복할 줄 알았더니,
은행은 망했고 음식은 이 모양이니.
이레
해동인간 재활프로그램을 이용하시면 금방 적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정호
난 그렇게 살고 싶어서 신청한 게 아니거든요.
인간인 척하는 로봇이 고기인 척하는 ‘바’나 팔고 있는 세상이라니.
이레, 갑자기 허공을 응시한다.
이레
명령어 수신완료.
앞으로 자가 폐기까지 10분 남았습니다.
정호, 이레를 본다.
이레, 슬픈 표정을 짓는다.
이레
그동안 로봇 ‘이레’를 이용해주신 고객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희 영양균형소 ‘그램’은 더 신속하고 빠른 배송 서비스로
고객님들에게 다가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이용고객들에게 메시지 송신완료.
이레, 무표정으로 돌아가려 애쓰지만 계속해서 슬픈 표정으로 돌아온다.
그런 표정을 짓는 자신이 통제가 불가능하다.
이레, 자신을 쳐다보는 정호를 바라보다가
이레
로봇 권리를 주장하는 인간들이 부여한 감정기능입니다.
폐기에 앞서 우리들은 모두 이 표정을 짓도록 되어있습니다.
이 표정은 엔진을 너무 뜨겁게 가열시킵니다. 바디에 과부화가 일어납니다.
인간은 이런 제 표정을 보고 연민을 느낀다고 실험결과가 있습니다.
저는 슬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명령어를 그대로 따를 뿐입니다.
이제 저 같은 인간형 로봇은 다 사라져 갑니다. 비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통계를 계산해보면 당연합니다.
고객님이 오늘 첫 손님이십니다. 그리고 제 마지막 손님이십니다.
정호
안 물어봤는데.
사이.
정호
솔직히 기분 나쁜 거죠?
이레
전 감정을 느끼지 않습니다.
정호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화가 났다는 건데.
사이.
정호
그럼 10분 후면 사라진다는 거예요?
이레
이제 9분 13초 남았습니다.
정호
같이 있어줄까요?
이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생김새가 닮았다고 해서 인간처럼 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흰 도구니까요.
정호
그렇게 말해도.......
이레
고객님 찾으시는 물건이 없으시면 이만.......
정호
난 먹을 걸 사러 온 거에요. 지금 쫓아내려는 거? 밖이 저렇게 추운데?
이레
그럼, 여기 키오스크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정호, 키오스크를 눌러보면서
정호
몇 살이에요?
이레
저희는 나이가 없습니다.
정호
몇 년이나 살았느냐 말이에요.
이레
살았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제조되어지고 기능한지 5년 되었습니다.
원래 인공지능 로봇은 너무 많은 정보가 쌓이기 전에
5년 주기로 자가 폐기하도록 프로그램 되어있습니다.
정호
5살? 완전 애네.
정호, 키오스크 작동을 멈추며
정호
그럼 말까도 돼? 불편해서.
이레
로봇은 경어의 개념이 없습니다.
정호
그래. 개념이 없구나.
이레
제품 구매 안하십니까?
정호
살 거야. 너 꺼지면. 그러니까 전원이 꺼지면.
사이.
정호
슬퍼 보여.
이레
입력된 코드 값입니다.
정호
널 만든 사람 말이야.
이레
저는 공동창작 되었습니다. 저희 회사 그램은 다국적 기업으로,
John James, Louis Ulliel, 邓伦, にしかわけんたろう, 김선영.......
정호
아니, 그 사람들을 다 알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러니까 그 중 한명이 너에게 코드를 입력했을 거 아니야. 슬픈 표정을 지으라고.
이레
누가 입력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정호
알 수 없지만 그 사람 정말 슬펐던 거 같아.
너한테 코드 입력할 때, 울고 있었을 걸?
이레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정호
확인하지 말고 상상을 해.
이레
저에게 상상하는 기능은 없습니다.
정호
그래. 가능한 기능이 없네. 폐기 할만 해.
긴 침묵.
정호
기분 나빴니?
이레
전 감정을 느낄 줄 모릅니다.
정호
근데 그 표정으로 대답 안하니까. 너무 미안해지잖아.
사이.
정호
그러니까 계속 대답 좀 해줄래?
이레
대화상대가 필요하십니까?
정호
아, 아니. 그러니까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면 대답을 계속 해달라는 말이지.
이레
전 감정을 느낄 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정호, 키오스크를 이용한다.
정호
잘 모르겠는데 좀 도와줄래?
이레, 정호에게 다가간다.
이레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시면 됩니다.
정호
그러니까 난 갈비 향을 먹고 싶거든?
그래서 여기 레시피대로 간장 향, 파인애플 향, 대파 향, 마늘 향, 추가하는데,
이거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
이레
아 갈비 향은 여기 커스텀 메뉴에 레시피 대로 세팅되어있습니다. 직접 골라서 드시면 됩니다.
정호
근데 우리 엄마는 갈비 만들 때 배랑 사과를 갈아서 넣었다고 들었거든. 그걸 추가할수 없을까?
이레
아, 그럼 프리미엄 스파이스 메뉴로 들어가서 추가로 넣으시면 됩니다.
정호
아 됐다. 바로 먹어볼 수 있나?
이레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레, 퇴장한다.
정호, 창문을 바라본다.
정호
뭔가 더 추워진 거 같아. 예전엔 추위를 많이 안탔는데.
이레
(목소리만) 과거에 비해 더 추워졌습니다. 곧 빙하기가 다시 올 것 같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더 이상 밖으로 나오시는 고객님은 없고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십니다.
정호
깨어날 시기를 잘못 선택했다니까.
이레, 바를 들고 등장한다.
이레
여기 프리미엄 갈비 향 바입니다.
정호, 바를 들고 먹기 시작한다.
반을 남긴다.
정호,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본다.
이레
어떻습니까?
정호
그 맛이 아니네.
이레
바는 기존 음식 맛의 70퍼센트를 구현한다고 합니다.
정호
갈비가 아니지.
이레
갈비가 아닙니다.
정호
고기로 만든 것이 아니지.
이레
고기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정호
고기가 고기가 아닌 것은 이제 더 이상 고기가 아니기 때문이지.
긴 침묵.
정호
폐기면 사라지나?
이레
저는 사라집니다. 저에 관한 데이터는 서버에 계속 남아있습니다.
정호
서버가 천국이네.
이레
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정호
그럼 죽으면 어디로 가지?
이레
사후 세계가 있다는 것은 오직 상상 속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믿음에 의해 존재합니다.
정호
믿음, 중요하지. 이걸 먹으면서 갈비라고 믿어야 하니까.
이레
상상은 인간이 가진 특권입니다.
정호
난 고기가 먹고 싶어. 고기가 먹고 싶다고!
이레
이제 더 이상 고기를 팔지 않습니다.
사이.
정호
이곳에선 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모두 상상으로만 존재하지.
많은 것들이 나의 감각들을 자극하지만 실제로 만져볼 수 없지.
난 이런 것을 꿈꾸며 그 차가운 냉각기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야.
이러려고 그렇게 긴 추위를 견딘 게 아니란 말이야.
사이.
정호
뭐라고 좀 해줄래? 그런 표정으로 보고만 있지 말고. 비극의 주인공이 된 거 같잖아.
이레
해드릴 말이 없습니다.
정호
부모님이 보고 싶어.
이레
부모님의 성함을 말씀해주시면 찾아보겠습니다.
정호
없어. 나만 냉각기로 들어갔거든.
아마 부모님은 내가 실종된 줄 알았을 걸?
이레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냉각기에 들어가셔서 몸이 전부 얼면, 가족들에게 소재를 알리도록 되어있습니다.
정호
그래?
이레
냉각기 제도가 그렇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것도 초기에는 실험목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고객님 경우에는 연구소에서 가족들에게 연금과 같이 소정의 보상금도 제공했을 것입니다.
정호
그렇구나.
사이.
정호
가족들은 다 알았다는 거지?
이레
87퍼센트 확률로 그렇습니다.
사이.
정호
알려줘서 고마워.
이레
도움이 되어 저도 기쁩니다.
정호
진짜 기쁜 거야?
이레
입력된 값입니다.
정호
그럴 줄 알았어.
긴 사이.
정호
얼마나 남았어? 폐기까지.
이레
앞으로 30초 남았습니다.
정호
인사할까?
이레
고객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정호
현정호
이레
반갑습니다. 현정호님.
정호, 이레 악수한다.
정호, 이레를 안아준다.
정호
꼭 인간 같다.
이레, 힘이 빠진다.
정호, 무거워서 넘어진다.
한없이 무거운 이레를 밀쳐내기 위해, 한참동안 발버둥 친다.
그러다 정호, 화가 난다. 힘을 내 이레를 던져버린다.
정호, 씩씩거리며 내동댕이쳐진 이레를 남겨두고 퇴장한다.
막.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홍기황

홍기황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마음을 시간으로 구조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실패하고, 자주 어긋나고, 미끄러집니다. 더 나아지고 있는 지, ‘나아진다’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계속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egoo135@naver.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