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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삼대(三代)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장정아

제199호

2021.04.29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1년 5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 구구: 할아버지 비둘기, 연한 회색과 흰색이 섞인 종
- 두두: 엄마 비둘기, 진한 회색과 연한 회색이 섞인 종
- 우우: 아빠 비둘기, 갈색과 흰색이 섞인 종
- 루루: 딸 비둘기, 온 몸이 흰색인 종

1. 아침

도시의 번화가.
두두와 우우가 작은 앉은뱅이 테이블을 들고 바닥을 살피며 돌아다닌다.
둘은 마침내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 테이블을 내려놓는다.
테이블을 내려놓자, 원형의 조명이 테이블 위를 비춘다.
우우
역시 월요일 아침이야. 전봇대 몇 군데만 돌아도 메뉴를 골라 먹는다니까.
두두
것 봐. 시내가 더 낫지? 다리 밑에 살 땐 맨날 모래만 씹었잖아. 그런데 신기해. 어 떻게 세 끼 다 챙겨먹으니까 바로 성공하냐?
우우
이럴 때일수록 맛있는 거 먹게 해 줘야 되는데...
두두
질보단 양이지. (테이블 위의 원형에 손을 가까이 대 보며) 이거 따뜻한데?
우우
건더기가 살아 있네. 탱글한 맛에 먹자고.
두두
근데 인간들은 말이야, 왜 매일 이런 걸 만들어 놓는 거야?
우우
모르겠는데.
두두
먹고 살기도 힘들다면서 기껏 먹은 건 다 뱉어놓고. 이해가 안 돼.
우우
그래야 속이 편한가보지.
두두
근데 또 자기가 뱉어 놓고 손에 닿기만 해도 더럽다고 질색을 하더라.
우우
무슨 상관이야. 그 덕에 우리는 배부르잖아.
두두
하긴, 그래서 우리 아가들도 이만큼 컸고.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다.)
우우
(두두의 배를 같이 쓰다듬는다.) 이제 나올 때 됐나?
두두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려고. 여보, 나 어제 이상한 꿈 꿨다?
우우
무슨?
두두
꿈속에서 한참 졸다가 바람이 차서 깼는데, 거의 태풍 수준인거야. 겨우 눈을 떴더니 새카만 밤하늘에 하얗고 큰 날개 두 짝이 펄럭이는데... 매인가? 황조롱인가? 빨리 튀어야겠다 싶어서 자세히 봤더니 세상에, 우리 큰 애잖아.
우우
우리 중에서 제일 안 날아다니는 앤데...
두두
오늘은 뭔가 촉이 좋아. 아침부터 뜨뜻한 밥을 다 먹질 않나. 아버지! 아버지!
구구가 천천히 등장한다. 구구는 한 쪽 다리가 불편하다.
우우
장인어른, 안녕히 주무셨어요?
구구
난 진작 일어나서 산책 한 바퀴 돌았다. 여긴 밤에는 휘황찬란하더니 아침 되니까 세상 끝난 듯이 조용해. 노아가 방주에서 날린 내 삼천 구백 번째 할아버지가 물빠진 땅에 처음 앉았을 때 이렇게 고요했을까?
두두
아버지도 여기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
구구
(테이블을 보며) 라면에, 고기에...... 오랜만에 진수성찬 아니냐. 속에 넣은 그대로 게 워 놓고 갔으니 우리한텐 은인이 따로 없네. 그런데... 큰애는?
두두
아직 자나 봐요. 먼저 드세요.
구구
밥 먹을 때 얼굴 안 보면 남이랑 뭐가 달라? 불러!
두두, 마지못해 루루를 부른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루루를 깨우러 간다.
구구
항시 남보다 먼저 깨야 하나라도 건지지.
우우
밖에 다닌 게 이제 겨우 한 달인데요.
구구
젖 떼고 혼자 날면 다 큰 거야. 언제까지 싸고 돌 건가?
우우
요즘 세상이 너무 위험해요.
구구
나 이 다리 가지고도 못 하는 거 하나 없어. 어떤 상황에서도 쫄지 않는 거, 그게 바 로 비둘기 정신이야! 큰 애는 내가 가르칠 테니 자네는 지켜보기나 해.
두두가 루루와 등장한다.
두두가 앞장서고 루루가 하품을 하며 어기적어기적 따라온다.
구구
어떻게 넌 매일같이 깨워야만 일어나냐.
루루
밤에 너무 밝아서 잠이 안 와요.
구구
잠이란 건 피곤해야 오는 건데 하루 종일 동상처럼 앉아있기만 하니... 너 오늘부터 나 따라다녀라.
두두
안 돼요, 아버지. 얘는 나중에 마술쇼에 나갈 거라 지금부터 관리해야 돼요.
구구
뭐?
두두
이렇게 새하얗고 눈도 빨갛고 영리한데, 길거리에서 평생 살게 할 순 없잖아요.
구구
겨우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날아다니기만 하는 그런 일을 시킨다고?
우우
장인어른, 그건 전문직입니다. 요즘은 서로 하겠다고 난리에요.
구구
내가 공원에서 들었는데, 저기 옆 나라에서는 전쟁 나면 쓴다고 비둘기 만 마리를 훈련시켰다더라. 그런 일은 어떠냐? 참으로 비둘기다운 일이 아니니?
두두
그런 일 하면 몸 축나요. 마술사 눈에 들면 밥도 안 굶고, 평생을 이쁨 받고 산대. (루루에게) 엄마가 요 근처에 마술 학원 알아놨어. 싹 씻고 머리 빗고 가서 문 앞에 가만히 앉아 있어.
루루
그거 소용없었잖아.
두두
어제 밤 꿈이 예사롭지가 않아서 그래. 좀 있으면 동생들 나오는데, 네가 얼른 자리 잡아야...
구구
오늘은 나랑 가자. 세상 구경 시켜줄게.
두두
아버지는 공원에 하루 종일 앉아있기만 하잖아.
구구
거기서 세상 모든 얘기가 다 오간다니까?
두두
그런 거 사는 데 하나도 도움 안 돼요.
구구
다 지나고 봐라. 누구 말이 옳았는지.
루루
... 그냥 학원 갈게요.
두두
날갯짓 연습했지? 그런 거 몇 번 해. 우아하게.
구구
하여튼, 난 우리 집 비둘기가 인간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그런 꼴은 못 봐.
두두
...... 아버지, 진짜 웃음거리는 바로 이런 삶이에요. 모르시겠어요?
사이.
구구, 힘없이 날아가 버린다.
우우
당신 심했어.
두두
말이 안 통해.
멀리서 비둘기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깃털 몇 개가 흩뿌려진다.
우우, 깃털에 새겨진 내용을 읽어본다.
우우
‘가짜 매 소리에 속지 마세요.’ 최근 비둘기를 쫓기 위해 가짜 매 소리를 틀어 놓은 곳이 많다. 하지만 이는 비둘기의 수준을 얕잡아 본 처사로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갑자기 매 소리가 들릴 경우 놀라거나 숨지 말고 당당하게 가던 길을 가면 된다. ‘충격, 비둘기 7마리 하천 근방의 풀숲에서 숨진 채 발견’ 사건 현장과 약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콩과 조, 의문의 가루가 다량 발견됨에 따라 비둘기에 앙심을 품은 누군가 먹이에 독을 탔을 것으로 추정하고 수사 중에 있다...
두두
또 그런 일이 있었네?
우우
왜 이런 일이 있을까?
루루
(테이블의 원형을 빤히 바라보며) ...먹을 거 이거밖에 없어? 술 냄새 나. 역겨워.
두두
그러니까 넌 꼭 마술 비둘기 돼야 돼.
루루
무슨 말이야?
두두
이런 걸 진수성찬이라고 부르기 싫으면.
우우
저녁엔 꼭 맛있는 거 찾아올게.
두두
(테이블 위의 원형에 손을 가까이 대 보며) 완전히 식었어.
우우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 날기라도 하지.
두두, 우우 머리를 움직이며 테이블 위에 달처럼 뜬 토사물을 먹는다.
루루, 두두와 우우를 바라본다.

2. 점심

구구, 공원에 가만히 앉아 햇빛을 받고 있다.
그가 못마땅한 듯 구구를 쫓으려는 인간의 발소리에 급히 날갯짓을 한다.
구구
저런, 까치보다 못한 놈!
갑자기 인간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인간은 비둘기 똥을 맞았다.
구구
혹시... 자네가 일부러? 고마워요. 젊어서 그런가 조준이 잘 되는군 그래. 내가 줄 건 없고 보답으로 좋은 얘기를 좀 들려주고 싶은데 시간 있나? 여기 앉아 봐. 자네 나이가 어떻게 되나? 딱 우리 손녀뻘이네. 그럼 그건 잘 모르지? 1988년엔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있었던 일 말이야. 평화의 상징인 우리 비둘기 3,000마리가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는데, 그때, 잠실에서 날아오른 3,000마리 중 1마리가 바로 내 408번째 할아버지라고. 그런데 국가에서 우리 비둘기를 소중히 생각한 그 취지는 좋았으나 성화 불구덩이에 우리 조상들이 희생되는 장면을 전 세계 사람들이 테레비로 봤지 뭐야. 세상에 그런 비극이 또 없지... 아마 그 사건이 타임지가 선정한 역대 최악의 올림픽 개막식 중 하나로 선정됐을 걸? 그런데 우리가 왜 평화의 상징인지 그건 알고 있나?
구구가 있는 곳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허름한 자루를 든 우우가 땅바닥에 떨어진 모이를 주우며 등장한다.
우우
아니오. 몰랐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건데 가져가면 안 되나요? 죄송합니다. 넣은 것도 꺼내라고요? 별로 없는데. (사이) 예, 예. 그렇게 다들 자기 주머니만 불리면 다른 새들은 굶어야 되죠. 그리고 그게 제가 될 수도 있죠. 근데 이번만 봐주세요.집에 아픈 마누라랑 어린 애가 있거든요. 마누라가 며칠 전에 비닐봉지를 삼켜서 꼼짝을 못하고 있어요... (사이) 그런데 선생님은 여기 계시면서 많은 얘기를 들으시겠어요. 제가 뭐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이거 드세요. 노른자 조각이에요. 옛날부터 궁금하 던 게 있는데, 마술사를 돕는 비둘기들은 어떻게 뽑는 겁니까?
우우가 있던 곳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두두가 나뭇가지 여러 개를 등에 지고 등장한다.
두두
글쎄, 그걸 알았으면 무거운 몸 이끌고 이 고생 안 해도 됐을 텐데. 그렇게 잘 해주는 데가 몇 동 몇 호래요? 에어컨 실외기 뜨뜻하고 경치 좋은 거 누가 모르나, 몇 번 갔다가 크게 당했어요. 잠깐 나갔다 오면 알 없어지고, 그물 치고, 뾰족한 거 세워 놓고. 멀쩡하게 큰 건 겨우 한 놈 뿐이라니까... 시간 조금만 줘요. 낳고, 품고, 멕여서 데리고 나갈게요. 내가 계속 죽치고 살겠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머, 왜 갑자기 험한 말을 하고 난리야? 한 번 해보자는 거야?
두두가 있던 곳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건물 안의 유리문에 대고 루루가 날개짓을 하며 싸우고 있다.
루루
그 안에서 약 올리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나와. 너도 비둘기면서 난 왜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건데? 너도 하얗고 나도 하얗잖아. 네 눈도 빨갛고 내 눈도 빨갛고. 네가 하는 건 나도 다 할 수 있어. 야,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나 매일 씻어. 엄마 아빠가 밥 먹을 때 빼고는 길에 나가지도 못하게 해, 때 탄다고. 흰 색이라고 다 같은 흰 색 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네가 뭔데? ... 러시안 백비둘기. 그럼 나는 뭔데? 닭둘기? 쥐둘기? 그 예쁜 주둥이로 다신 밥 못 먹게 해 줘? 야, 나와! 빨리!
루루, 날개로 유리문을 마구 두드린다.
요란한 날갯짓 소리와 비둘기 울음소리 들린다.

3. 저녁

두두와 우우가 작은 앉은뱅이 테이블을 들고 바닥을 살피며 돌아다닌다.
둘은 마침내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 테이블을 내려놓는다.
테이블을 내려놓자, 원형의 조명이 테이블 위를 비춘다.
우우
역시 월요일 저녁이야. 말라비틀어진 것밖엔 먹을 게 없어.
두두
거리가 썰렁해.
우우
인간보다 비둘기가 더 많아.
두두
(테이블 위의 원형에 손을 가까이 대 보며) 이거 차가운데?
우우
건더기는 남아 있네. 꼬들한 맛에 먹자고.
두두
반찬 못 구했어?
우우
먹을 만한 게 없었어. 둥지는 어떻게 됐어?
두두
마땅한 데가 없었어.
구구가 급하게 등장한다.
구구
루루! 루루!
두두
늦나 봐요. 저녁엔 안 불러도 알아서 오는데.
구구
오늘 중대 발표가 있어.
두두
그게 뭔데요?
구구
다 오면 말할련다. 우리 집안이 걸린 중요한 일이야.
우우
사실... 나도 다 모이면 할 말이 있어.
두두
복권사서 쌀 포대라도 당첨 되셨나? 루루! 루루!
두두, 루루를 부르러 간다.
우우
어제 밤에 애 엄마가 꿈을 꿨는데, 글쎄 새카만 밤하늘에 하얀 날개 두 짝이 펄럭이 더래요. 근데 그게 알고 보니 우리 큰 애였던 거예요. 보통 꿈이 아닌 것 같죠?
구구
길몽이 확실하구나.
멀리서 두두가 날개를 다친 루루를 부축하여 데려온다.
우우
무슨 일이야? 날개는 왜 그래?
두두
차 다니는 길에 멍 때리고 서 있는 거 있지.
구구
(루루에게 다가가 눈을 뒤집어 보는 등 몸을 살핀다) 이 정도면 괜찮아. 다행이다.
두두
애 상태가 이런데 뭐가 다행이에요?
구구
오늘 손녀사위 될 녀석을 구했다. 내가 요새 애들 치고 비둘기 자랑스러워 하는 놈을 못 봤는데, 이 젊은이는 생각이 바로 박혔어. 내일 점심에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어.
우우
내일은 저랑 나갑니다. 이게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에요.
두두
그게 뭔데?
우우
나 오늘 엄청난 걸 알아냈어. 그 대신 당신 주려고 주운 노른자에 개미.. 다 갖다 바쳤지만,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어.
두두
그래서 저녁 메뉴가 이 모양이었구나?
우우
어제 밤 꿈하고 관련 있는 것 같아.
두두
들어서 별로기만 해 봐.
우우
여기서 한 30분 날아가면 마술용 비둘기를 분양하는 농장이 있대. 거기 사는 것들은 영양 밥상에, 비도 안 맞고, 귀한 대접 받고 산다는 거야. 인간들이 모셔가기까지 한 다니 말 다했지. 우리는 거기 있으면 딱 봐도 티 나서 안 되지만 얘는 머리부터 꼬리 까지 새하야니까 섞여 있어도 모른다는 거야.
두두
... 그런 델 아무나 들어가게 해 놨을까?
우우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성공해야지. (루루에게) 내일 아빠랑 같이 가는 거다?
구구
안 돼! 그렇게 사는 건 반대라고 내가 말했지? (루루에게) 할애비랑 가는 거다?
루루
...... 둘 다 안 가요.
구구
너도 이제 다 컸어. 짝을 찾아서 독립해야지, 언제까지 우리들 쫓아다니면서 살거냐?
루루
혼자 살 건데요?
구구
그런 소리 마라.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자손이 끊기면 내가 조상님 얼굴을 어떻게 보니.
루루
그럼 좀 어때요. 누가 비둘기 새끼를 반긴다고.
구구
비둘기는 세상에 꼭 필요한 거야!
우우
(루루에게) 결혼은 급할 거 없어. 농장에 가서 연애부터 해. 요샌 다 그렇게 늦는대. 거긴 전부 새하얀 백비둘기만 있다더라. 너도 흰 색, 네 짝도 흰색이면 네 아기도...
루루
... 흰 색이라고 다 같은 흰 색인 줄 알아?
두두
흰 색이 흰 색이지 뭐가 다른데?
루루
나는 백비둘기가 아냐. 어딜 가도 결국 쥐둘기, 닭둘기지. 매일 씻고 연습해도 난 걔네가 될 순 없어... 내가 왜 걸어 다니기만 하는 줄 알아? 둥지에서 처음 나온 날, 나도 날았어. 시원한 바람 맞으면서 숨 찰 때까지. 근데 그 때마다 인간들이 소리 지르면서 멀리 도망가는 거야. 그래서 집에 올 땐 천천히 걸어와 봤거든. 그랬더니 아무도 날 안 쳐다보더라?
두두
...똑똑한 내 딸, 너무 빨리 알아버렸네.
루루
뭘?
두두
우린 안 보이는 데 있어야 오래 살 수 있단 거.
루루
근데 그렇게 할 수 없잖아.
두두
그건 사는 게 아니니까.
그 때, 요란한 비둘기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비둘기 삼대,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에서 깃털이 우수수 떨어진다.
우우, 깃털을 주워 새겨진 내용을 읽어본다.
우우
‘긴급! 모든 비둘기 지금부터 가급적 먼 곳으로 피하시오.’ 오늘 아침 출근길, 머리에 비둘기 똥을 맞은 인간 1명이 거리에 대자보를 걸었다. 비둘기가 선량한 인간에게 시도 때도 없이 배설물 테러를 자행하고 있으며 비둘기 분변에 있는 곰팡이와 세균들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므로 유해조류인 비둘기의 박멸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에 하루 사이에 20만명이 넘는 인간들이 거리에 몰려나와 대자보 내용에 찬성의 뜻을 밝혔으며 관계 부처에서는 오후 6시를 기해 이번 한 달을 비둘기 박멸의 달로 선포한다고 발표하였다.
구구
뭐가 어째? 비둘기 박멸의 달? 이런 배은망덕한 종족을 봤나?
두두
올 것이 왔구나...
구구
(우우에게) 자네, 얼른 나가서 인원을 모아.
우우
어쩌시게요?
구구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본때를 보여줘야지. 비둘기 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비둘기 없다!
두두
진정하세요. 인간들이 총을 쏠지도 몰라요.
우우
그건 우리 날개보다도 빠르대요.
구구
(주저앉아 통곡한다) 분하고 원통하다. 분하고 원통해. 추켜세울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뭐? 유해조류?
우우
그냥 말 뿐 아닐까?
두두
말이 시작이잖아. 이제부턴 우릴 훨씬 더 미워할 거야.
비둘기 삼대, 침묵 속에서 각자의 생각에 빠져든다.
우우
어디로 가야 되지?
루루
그냥 우리 다 죽으면 안 돼?
구구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두두
너, 날 수 있겠어?
루루, 천천히 다친 날개를 움직여 보고는 끄덕인다.
두두
(모두에게) 우선 먹자. 그래야 싸워.
두두, 우우 머리를 움직이며 테이블 위에 달처럼 뜬 토사물을 천천히 먹는다.
루루, 테이블로 다가가 천천히 토사물을 먹기 시작한다.
세 비둘기, 점점 격렬하게 토사물을 먹어댄다.
구구, 눈을 감고 무언가 중얼대기 시작한다.
구구
(들릴 듯 말 듯 작게)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어두운 가운데 구구가 읊조리는 창세기 구절 소리만 들린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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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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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기를 잃지 않는, 정답만을 좇지 않는, 아침에 잘 일어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positivej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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