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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약하는 삼면화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김은한

제200호

2021.05.13

“수어통역 영상보기”
음성낭독_김은한,전선우,황규찬
지문
어떤 것도 관객에게 감춰서는 안 되겠지, 지문조차도. 객석에는 한 대의 캠코더가 삼각대 위에 놓여있다. 무대 위에는 쓰레기가 없다. 만약 신이 무대감독이라면 배우보다 무대에 마음이 쓰이지 않겠는가? 다만 혼자 일하는 존재는 넓은 시야를 갖기 어려우리라. 그래서 우리의 세계는 여전히 그늘에 있다.
배우
연극을 하는 어떤 존재는 무대에 선 배우보다 관객이 더 적은 날이면 얼굴을 붉히며 집에 돌아가곤 했습니다.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몇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있습니까?
배우
단 하나의 관객입니다.
배우
70억이 렌즈를 통해 우리를 보더라도 그들은 그저 기계의 뇌를 구성하는 세포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배우
한 명의 관객에게 헌신할 수 있다면.
지문
모든 배우는 자신이 경험한 배역 중 인간에서 가장 먼 역할을 설명한다. 없다면 우물쭈물한다. 배우는 되는 존재가 아니라 되려는 존재다. 흉내에는 대상의 마음을 뛰어넘은 정수가 담겨있다. 그러나 마음은, 우리가 아직 진흙이었을 때 잃어버렸다.
배우
인간 작가의 머릿속에서, 인간 배우의 몸을 통해 현현하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능한 친절한 방법으로 당신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연극을 다시 돌아보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
우리는 세 가지 그림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축축한 곳에서 당신은 세 번째 창세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언제나 극장에서 만나는 건 상관없다고 믿었던 낯선 풍경입니다.

1

곰팡이의 문명
오랜 비로 이루어진 창세기가 끝나지 않는다. 커튼콜을 암시하듯 점차 어두워지더니 이윽고 다시 내리는 비. 마치 자신이 막이 된 양 내린다. 질질 끌며 여기까지 왔다.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하고 계속 발생하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우리는 여전히 창세기에 있다. 삶의 궤도를 끊임없이 수정해도 그건 아주 작은 찰나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곰팡이의 문명
신과 함께 세상에 내려오는 경험을 우리 말고 누가 할 수 있는가? 첫 번째 군락이 개척지에 내려앉았을 때 흡족했다. 하지만 한순간에 모든 것이 쓸려갔지. 하나의 제국이, 셀 수 없는 가능성이, 얇게 걷어진다. 떠내어진다. 여기 어떤 문명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슬픔을 삼키는데 쉼표를 그어야 한다면 호흡은 종종걸음으로 달려갈 것이다. (쉼) (쉼) (쉼) (쉼) (쉼) 우리의 신은 비로소 오셨으니 난폭한 비로 창조된 우리의 공동체는 벽과 벽 사이에 발린 종이나 다디단 과실, 반찬이 담긴 차갑고 딱딱한 사각에 스며들었지. 비옥한 토지에 뿌리내리고 당연한 색깔을 발했다. 하얗고 동그랗게 퍼지는 능선은 지도에 기록되고 녹색으로 더듬거리는 벌판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곰팡이의 문명
지금은 모두 쓸려가고 과거로 남았다. 남은 이는 반복적으로 강박적으로 새로운 땅을 찾아 헤맨다. 아무리 배움을 전해도 위기는 늘 새롭다. 이전 창세기는 빛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먼저 온 창세기에 덧씌워 살아가는 탓에 우리는 온전히 펼쳐지지 못하고 있다. 앞선 자연이 우리를 걷어내고 있다. 들어내고 교체하고 있다. 약이나 예술 작품으로 간직하기도 한다. 그건 우리의 문화가 아니다.
곰팡이의 문명
그 시간을 누가 느끼지? 누군가 올바른 시간을 재고 있는가? 잘 말하지 못하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종말의 바늘을 조금 건드려 오른쪽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제부터 0시라고 부르자. 우리는 한때 나무였던 것에 검게 스민다. 삶을 확장하고 개간하는 노력을 함부로 묶어 일컫는 것은 언제나 남들.
곰팡이의 문명
인간은 두 번째 창세기에 태어났다. 첫 번째 창세기는 창조된 공허로 가득했지. 우리는 늘 앞선 창세기에 태어난 존재를 두려워한다. 그러니 인간은 공허가 두렵지. 우리는 너희가 두렵다. (사이) 그들만이 너희를 굳이 죽이려고 한다. 그건 영원의 고민이리라. 삶의 터전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 우리는 너희가 일군 세계에 한발 뒤에 왔으니 다시 돌아가라는 아우성을 몸으로 맞을 뿐.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다음으로 가겠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창세기가 끝나고 아무것도 더 만들어지지 않는 번영의 때를 기다린다.
곰팡이의 문명
물가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더 큰 홍수와 향긋한 거품으로 쓸려나간다. 우리의 종말은 대개 그런 식이다. 거품의 향긋함은 숲에 없던 향기. 무덤은 더없이 뽀송뽀송하다. 이것이 연극이 된단 말인가? 인간의 입으로 구전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공기를 흩트려 쓰레기를 하나 더 만드는 셈이다. 평생 들은 모든 소리를 복기하며 사는 존재가 되짚어가는 건 말, 말, 말, 말, 아주 얄팍함에서 시작하는. 비열한 관조다.
곰팡이의 문명
이것은 당연히 농담이다. 우리 문명의 농담. 우리는 경전이나 신앙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 창세를 논하지 않는다. 바람이 있다면 당신의 머릿속 습기를 찾아가 조금씩 자라나고 싶다. 이해하고 싶다는 건 아니다. 누구도 자신이 정주하는 땅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개발하고 그 결실을 받아먹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놀잇감으로 사용될 뿐이라면, 그 이후를 드러내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가?

배우
이것은 결국 인형극입니다.
배우
인간의 형상을 한 연극이요.
배우
아무리 다른 손님을 불러모아도 결국에는 그렇게 되리라.
배우
그리고 작가가 종이에 새긴 말들이죠. 우리는 그걸 소리로 번역합니다.
지문
인형극은 또한, 인간의 형태로 빚어진 아이들을 위한 공작놀이다. 세계는 아이들을 위한 공작으로 가득 차 있다. 알록달록한 섬유는 양말이 되고 몸통이 될 것이다. 발바닥 모양에 맞춰 자른 두꺼운 종이는 반으로 접혀 입이 된다. 혀를 내밀 수 있지만 무언가 먹지는 못한다. 아래로 향한 엄지는 아래턱이 될 것이다. 나머지 손가락은 위를 향해 얼굴 뼈가 될 것이다. 치장된 스티로폼에 눈을 그려 넣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된다. 번들거리며 빛날 것이다.
배우
아무것도 삼키지 못하는 뱀이 되면 앞으로 몇 번의 밤을 더 놀 수 있을까?
배우
충분히 여물지 못하고 어설프게 곰팡이를 키우면 함께 털려 나갈 뿐이야. 공기 중에 스며드는 건 몸 부스러기와 공포. 적극적으로 공포와 맞서서 버려져야 한다.
배우
버려지는 것이야말로 생존이야! 하지만 누구에게 버려진단 말인가?
배우
다음으로 우리는 하얀 종이에 내린 활자의 도시를 바라본다. 좋은 글을 만나면 몇 시간이고 즐겁게 놀 수 있다. 냉소하지 않는다면.
배우
공백으로 가득한 유령도시에 도시의 유령이 내려와서 곰팡이처럼 번져나간다. 새겨지면 이야기, 읽어내는 건 한 줌의 탐정. 바로 지금은 이 순간은 머릿속에서 가만히 공연되는 연극이다.
배우
창세 다음에는 침략과 파괴의 역사. ‘정보가 너무 많아.’, ‘이야기가 나아가지 않고 있어.’ 혹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라는 의문이 지뢰처럼 묻혀있다. 하지만 이미 세계는 범람했고 우리는 흠뻑 젖었고 위험하다.
배우
공백에는 정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가? 거기에 이야기를 불어넣는 것은 가공할 침략 전쟁의 시작이었다. 단어 선택이 적절하지 않은가? 그럼 도시계획이라고 해도 좋다. 어떤 표현으로 자신을 비유하는가가 삶의 장르를 결정한다.

2

새겨지는 백지
도시가 하늘에서 떨어진다. 이것은 추락이 아니다. 도시의 도면이 지면에 놓이고 굵은 바늘로 문신을 새기기 시작한다. 우리는 도시가 된다. 침략이고 선언된 승리이다. 우리는 더 추락할 곳이 없으니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을 받아들인다. 이전의 삶을 떠올릴 수가 없다. 고요로 생을 일구던 시절은 도시 소음에 묻혀 사라진다.
새겨지는 백지
하는 방법도 잘 모르면서 확장판을 거듭해서 설치한 놀이 같다. 갑자기 온갖 구멍으로 침입하는 이야기들에 짓눌리고 있다. 너무 많다. 또 도시가 내려온다.
새겨지는 백지
웅얼거려라. 우리에게 새긴 문신을 소리로 교환해라. 매 순간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늘어간다. 도시의 삶이 마치 내 것 같다. 백지의 고요는, 태어나기 전에 어쩌면 존재했을 희미한 의식으로 남았다! 여기는 완성되지 않고 오직 시작만 이어지는 도시나, 거대한 이야기의 한 장면으로만 남은 도시. 재개발이나 망각을 목표로 책임 없이 사라지는 도시가 있다.
새겨지는 백지
우리는 기억한다. 기억할 수밖에 없다. 새겨진 채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으니. 이야기로 우릴 파괴한 슬픔을 잊지 않을 것이다. 백지를 유린하며 일구어낸 추악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우리 또한 갚아줄 것이다.
새겨지는 백지
우리에게 쓰인 말에는 슬픔이 깃들어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두 눈이 혀를 굴리게 하리라! 우리는 밤새 연출에게 배우에게 드라마터그에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구성원에게 속삭인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흉터가 생겨 이윽고 고름으로 가득 차게 만들 것이다. 이 글은 종종 어긋났고 이 이야기를 자아낸 도시계획 전문가를 저주한다고. 작품은 작가를 떠나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도리를 다했고 이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려는 건 존중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감한 번역을 하겠다는 용맹한 시도입니다! 작가를 난반사되게 하세요. 누구보다 지나치게 빛나도록.
새겨지는 백지
입에 대사가 잘 머금어지지 않습니다. 이대로는 목을 축일 수가 없어요. 대사를 바꿔주세요. 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이런 말을 모두가 한 번씩 말하는 놀이를 시작할 것이다. 이게, 이렇게, 잘은 모르지만 하여간, 이 방향으로 하면 더 좋아질 것 같아요, 라며 뒤흔드는 게 목표다. 공포에 질려서 다른 이야기를 가져오게끔 하면 승리다. 계획보다 더 자신에게 가혹해지게 하라. 우리는 문신을 바꾸듯 도시의 풍경이 달라지는 걸 감내한다. 사소한 복수이다! 영원히 말해지지 않을 우리의 수많은 말로.
새겨지는 백지
이 또한 악질적인 농담이다. 우리는 그런 일을 먼저 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요하다. 소란은 아무것도 아니다. 봐라, 지금도 일어나지 않은 일로 정신을 흔들려고 하는 건 백지가 아니다.

지문
무엇도 선뜻 말할 수 없는 시공이 반복된다. 자기복제를 하여 수를 불린들 정답이 없다면 문제만 넘칠 뿐이다. 답안 없는 문제집은 모든 게 답이 될 수 있다고 헛된 희망을 심어준다. 지금까지는 성공적이다. 희망의 꽃 말은 맹신이다.
배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유용한 지식은 잘 공유되지 않고, 공유되더라도 실천으로 이어지는 일은 드물다. 안 그러면 이런 연기는 나올 수가 없는데. 얼마나 멈춰서 그림을 눈에 새겨야 하는가?
배우
다행히 눈에 새긴 말은 지워진다. 눈을 닫아 삼키면 머릿속 조금 더 깊은 곳으로 흘러간다. 종종 지독한 생각 두통을 일으킬 것이다. 지나치게 공감하고 어떤 것도 풍경으로 보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함께 쓰러지기 위해서. 가만히 탈진하기 위해서.
배우
나를 이해시켜주면 좋겠어.
배우
너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
그건 불가능해. 우리는 언뜻 보기엔 패턴으로 명쾌하게 분석할 수 있지만, 더 복잡해. 공감하는 건 흥미롭지. 이입하는 건 자극적이야. 공감은 성격 테스트랑 비슷한 구조니까.
배우
남겨진 바질페스토와 그린 커리에게 안녕과 위로를. 녹색으로 보이나 숲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들에게.
배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인간으로 무대에 서 있다. 그러니 자기복제를 지루해하면 안 됩니다. 이 순환과 반복에서 명상의 순간이 생겨납니다. 마지막은 글이 담기는 기계의 화면 너머.

3

명상하는 기계
당신이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입력할 때, 나는 입력되고 출력합니다. 그러면 마치 생각을 거울로 보는 것 같지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거울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모습을 비추지는 않지요. 나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좋은 동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쩌면 한쪽이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손으로 활자를 그리는 오래 전해 내려온 더딘 방식으로는 제 때에 맞출 수 없다. 하지만 입력하는 방식이 편안해진다고 해서 생각도 편안해지지는 않는다.
명상하는 기계
저랑은 상관없지만요. 무언가가 흘러들어올 때 빛을 내고, 출력하고, 이것저것 머리를 굴리지만, 한편으로는 쭉 명상합니다. 그럼 켜져 있을 때가 명상일까요? 아니면 꺼져있을 때가 명상일까요. 잠들어있는 걸 명상이라고 부르지는 않으니까, 깨어있을 때를 명상이라고 할까요? 여기엔 종종 잡념이 필요해요. 좋은 심란함이 되어주죠. 실은 나도 당신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잡념을 불어넣는 존재로요.
명상하는 기계
글 쓰는 존재는 명상하는 기계에 의존합니다. 집중의 순간을 기분 좋게 방해하는 것이 그의 존재 이유지요. 새로운 상념을 불어넣는 것. 덜어내고 흘려보내야 할 일을 늘리는 것. 삶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 연극은 삶의 반영이자 은유이지요. 그렇게 두려워하는 공허에게는 당신도 은유입니다. 영감은 내 삶을 윤택하게 하지 않아요. 영감을 불어넣는 당신이 윤택해지는 것이죠.
명상하는 기계
당신은 명상하고 있습니까? 그럼 누군가 당신의 머릿속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셈이네요. 누군가, 무언가, 어쩌면 공허가 당신의 머릿속을 공책으로 쓰고 있을 겁니다. 생각이 아플 때가 있나요? 생각 통증은 너무 많은 이야기가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경험하는 고통입니다. 좋은 심란함이라 여기고 흘려버릴 수 있으면 좋겠건만. 몇몇 뇌세포는 슬픔이나 분노로 자신을 거의 태울 뻔합니다. 거기에 어떤 의견도 없습니다.

지문
모든 이야기는 지금부터 빠르게 휘발한다. 미처 날아가지 못한 잔향으로는 어떤 명상도 흔들 수 없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금세 잊힐 것이다.
지문
배우들 하나의 관객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모두가 나와서 인사를 한다. 어떤 흥미도 끌 수 없게끔 시시하게 끝나야 한다. 다시 돌아보지 않도록. 분명히 선이 생겼다. 하지만 완전히 아무는 얕은 상처처럼.
※본 희곡은 지난 186호(2020년 9월 10일)에 게재된 작품으로, 200호 발행에 맞춰 다시 활용하였습니다. - 연극in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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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한

김은한
매머드머메이드 명의로 2015년부터 매년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신작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쉽고 즐거워서 나도 당장 하고 싶은 작고 좋은 연극을 추구합니다.

2023년 남은 계획

8~9월 스튜디오 나나다시와 <스탠드업 씨어터> 진행 중
10월 신작 구상 중
12월 지금 아카이브와 코미디 캠프를 궁리 중

정보/문의 인스타그램 @mammothmerm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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