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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손님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이은용

제200호

2021.05.13

“음성/자막 영상보기”
(편집 : 김지성, 녹음 : 윤비원, 음향 믹싱 : 임나윤)
음성낭독_이리,전박찬
등장인물
사람과 유령

배경

어느 가정집. 주인공이 제사상을 차리고 있다.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제사상, 까만 향초와 담배, 과일과 먹을거리가 차려져 있다. 창문은 활짝 열렸다. 주인공이 향을 피우면 유령이 느릿느릿 걸어 들어온다.
사람
안녕하세요? 제가 찾던 분이 아닌데, 어쩌다 오셨나요.
유령
향 냄새가 좋아서 타고 올라왔어요.
사람
어쩌다 이렇게 먼 길을 찾아오셨을까요. 저희 집은 심지어 옥탑방인데.
유령
심심해서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다른 제사상들은 어떤 느낌인가 싶어서. 저 말고 다른 분을 찾으셨나 봐요.
사람
네.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최근에 죽은 친구예요.
유령
저는 이천십사 년에 죽었어요. 무서우니까 어떻게 죽었는지는 말하지 않을게요.
사람
왜 죽었는지는요? 그건 더 무서운 이야기라 안 되나요?.
유령
그건 좀 더 친해진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해요.
사람
제가 찾던 친구는 친한 친구였어요. 몇 년은 알았어요. 인생의 삼분의 일은 바쳐서 친구였는데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죠.
유령
친구분의 죽음에 조의를 표해요. 안된 일이네요.
사람
고마워요. 몇 달은 지났는데 아직도 요즘 일 같아요. 그래서 한번 불러보려 했죠. 추석이니까, 잘 부르면 오지 않을까 싶어서.
유령
제가 빨리 떠나야 찾던 분이 오시니까 이제 가야 할까요?
사람
글쎄요. 제사상 한 번에 한 분밖에 부를 수 없는 건가요?
유령
그런 규칙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사람
그럼 조금 있다 가세요. 추석에 이렇게 오신 걸 보니 그쪽도 별다른 할 일이 없었나 본데, 좀 앉아있다 가세요.
둘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향 타는 냄새만 퍼진다.
유령
그쪽도 추석을 혼자 보내고 있었나요?
사람
네. 가족도 친구도 멀리 있어요. 연휴는 오직 혼자 보내는 날이랍니다.
유령
저런. 안됐네요.
사람
저는 우울증을 앓고 있답니다. 의사가 만약 지금 절 봤다면 환각도 우울증의 징후이니 더 이상 대화하지 말라고 했을 거예요.
유령
저는 환각일까요? 아니면 추석날을 맞아 정말 지상으로 내려온 유령일까요.
사람
글쎄요. 그런 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확실한 건 제가 추석을 혼자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고, 지독하게 외롭고 슬펐다는 사실이죠.
유령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니 지독하게 외로울 테고. 슬픈 건 왜 슬펐나요?
사람
코로나 있잖아요. 자가격리를 해야 하니까 사람들을 못 만나서 슬프죠.
유령
사람들은 오래 혼자 있으면 이상한 생각들을 하곤 하죠. 뭔가 바깥 이야기라도 들려주시겠어요.
사람
카페에 앉아있던 어느 날이었어요. 왜, 가만히 있다가 뒷사람 이야기가 귀에 콕 박힐 때가 있지요? 그 사람 이야기는 그런 것처럼 콕 들려오더라고요. 삼십 대 정도의 젊은 여자들이었어요. “엄마가 시집에 가져가는 모든 물건은 최고급으로 하라고 했단 말야. 그래서 내가 제삿상에 양키 캔들을 올렸어.”
유령
맙소사.
사람
"그랬더니 우리 시엄마가 난리가 난 거야. 아니 어떻게 제사상에 양키 캔들을 올리냐고. 나는 너무 억울했지. 난 내가 아는 최고급을 제사상에 올린 건데.”
유령
그 사람 말이 맞네요. 자기는 최선을 다해서 알고 있는 가장 좋은 걸 대접한 건데. 퍽 억울하겠어요.
사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니 제사상에 희고 긴 초를 올리든, 양키 캔들을 올리든, 중요한 건 마음 아닐까요. 그래서 슬펐어요. 누군가는 진심을 다해서 애도를 위해 가장 좋은 걸 준비했는데 누군가는 그걸 보고 화낸다는 사실이.
유령
웃기고 슬픈 이야기군요. 누가 내 제사상을 차린다면, 글쎄, 나는 차려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했을 것 같은데.
사람
나도요. 그래서 이 제사상에도 양키 캔들을 올렸답니다.
유령
무슨 향인가요?
사람
미드 서머 나잇츠 드림이요. 번역하자면 한여름 밤의 꿈이죠.
유령
멋진 이름이네요. 심지어 까만색 향초고요. 내 제사상은 아니지만, 평가하라면 백 점 만점에 백 점이라고 할 거예요.
사람
고마워요. 향초를 좋아해요?
유령
향 나는 건 다 좋아해요. 초, 향수, 아로마, 인센스... 꽃다발. 커피. 농익은 과일, 과일 차, 홍차. 녹차. 오래된 책, 입욕제를 풀어넣은 따뜻한 목욕물.
사람
담배는 어때요?
유령
담배, 싫어하지 않아요.
사람은 유령에게 담배를 건네주고 불을 붙여준다. 둘은 잠시 말없이 담배를 피운다.
사람
친구는 담배를 좋아했어요. (사이) 저도 흡연자라서, 담배 냄새가 신경 쓰일까 걱정했답니다. 혼자 사는데 나쁜 냄새까지 나면 좀 그렇잖아요.
유령
외로운 사람들한테도 냄새가 난답니다.
사람
나쁜 냄새?
유령
슬픈 냄새가 나요. 향초를 피우면 같이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를 떠돌아요.
사람
당신한테서는 슬픈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은데요.
유령
그야 저는 유령이니까요. (사이) 오래 앉아 있었는데, 제가 일어나야 친구분이 오시지 않을까요?
사람
제 친구는 아마 안 올 거예요. 제가 연락을 안 받았으니까.
유령
무슨 일이 있었나요, 둘 사이에?
사람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아닌가?
짧은 사이, 주인공은 향을 새로 피워올린다.
사람
친구는 우울해서 자주 연락이 안 됐어요. 가끔은 우울해서 자주 연락이 됐답니다. 우리는 서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걸 알았고 그래서 드문드문 서로에게 연락하곤 했어요.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켜놓고 서로 할 일을 하는 거예요. 창문을 열어서 환기를 시키고, 설거지를 하고, 뭐 그런 것들.
유령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었나요?
사람
서로 할 일을 열심히 해야 살아갈 수 있다, 뭐 그런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아요. 친구는 일주일째 대학 수업에 나가지 않았다는 말을 했고, 그럼 저는 나도 일주일째 아르바이트에 나가지 않아서 잘렸다고 답했죠.
유령
그럼 친구는 뭐라고 말했어요?
사람
그래도 지난주에는 꾸준하게 일을 나갔던 것 같으니 잘했다고 말했죠. 그럼 나도 친구한테, 너도 지난 주에는 수업에 나갔던 것 같으니 잘했다고 답했어요. 그리고 힘을 조금만 더 내서 다음 주에는 나도 너도 바깥에 나가보자고 이야기했죠.
유령
바깥에 자주 나가서 햇살을 쬐는 건 우울증 치료에 좋다더군요. 비타민 디가 합성된다고. 바깥에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대화도 하고, 일도 하고.
사람
내 의사가 했던 말과 똑같네요. 당신도 정신과를 열심히 다녔나 봐요.
유령
그랬다고 볼 수 있죠. 그보단 친구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사람
우리 둘 다 햇살 쬐는 걸 좋아했어요. 전화를 켜 놓고 대화하며 햇살을 쬔다고 나가서 담배를 피우곤 했죠. 스피커폰 너머로 소리가 들려요. 문을 여닫는 소리나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소리 같은 것. 그러면 서로 뭘 하고 있는지 알았죠.
유령
통화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나요?
사람
별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일상 얘기, 사람들 얘기. 내가 농담처럼 죽고 싶다, 고 말하면 친구는 아직 사막의 별을 못 봤으니까 죽으면 안 된다고 말했어요.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도, 인도도, 노르웨이의 오로라도 못 봤으니까.
유령
나도 모로코도 인도도 노르웨이도 못 가봤어요. 가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제는 모두 옛날 꿈이 되었군요.
사람
비관적이긴.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다시 갈 수 있겠죠. 친구가 없을 뿐이지.
유령
당신도 가고 싶은 곳이 많았어요?
사람
사하라 사막과 오스트레일리아의 대자연을 보고 싶었어요. 여행을 갈 때마다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별을 보면 좀 더 오래 살고 싶어졌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은 별을 봐도 힘이 나지 않아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유령
저도 우울할 때는 종종 그러곤 했죠. 우울할 때는 침대만 한 벗이 없으니까요.
사람
친구는 그때 전화를 걸어왔어요. 안 받았죠. 별다른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어요. 아니, 나의 우울이 그날따라 무거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사실은 사람들로부터 숨어있고 싶어서.
유령
그렇게 친구 전화를 안 받은 건가요?
사람
다시 걸려올 줄 알았어요. 두 번째, 혹은 다른 날 걸어오면 꼭 받아야지 생각했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어요. 그렇게, 친구한테 전화를 못 하게 되었죠.
유령
괜찮아요?
사람
나는 괜찮아질 거예요. 그래서 오늘 친구가 왔으면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물어보려고.
유령
어쩌면 별거 아닌 사소한 일이었을지도 몰라요. 심각한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어느 쪽이든 친구분과 다시 대화하기는 힘들지도 모르는데.
사람
왜요?
유령
그거야, 친구분이 어디 계신지 모르니까요.
사람
당신 유령이잖아요. 그런 건 서로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유령
사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애도하는지 궁금해서 남들의 제사상을 떠돌고 있는 유령이에요. 오늘도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서 슬쩍 찾아왔어요.
사람
양키 캔들의 냄새가 좋아서 온 게 아니라요?
유령
한여름 밤의 꿈, 냄새가 좋아서 왔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사십구제가 지나고도 지상에 남아있고 싶어서, 아직 무언가를 더 보고 싶어서, 설거지를 미처 다 못 해서, 대학교 졸업을 못 해서.
사람
아직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애도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서, 누군가가 당신을 부르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요?
유령
내 친구들도 아직 나를 보고 싶어 할까요?
사람
나는 사람이 죽으면, 사십구제 이후에는 지상을 정말로 떠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다음에는 어디든 좋아하는 곳으로 가겠거니 생각했죠.
유령
천국, 극락, 저세상, 강 건너?
사람
네. 그렇게 건너로 가고 나면 다 끝이 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끝이 아니네요. 끝을 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끝이 나지 않아요.
유령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거쳐 애도한다고도 하죠.
사람
맞아요. 나는 어쩌면 평생을 거쳐서 애도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이미 그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고요.
유령
애도하기 위해 사는 삶도 언젠가는 건너로 함께 떠나지 않을까요? 혹은, 애도와 함께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다던가.
사람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찌 되었든 위로는 고마워요. 나는 친구를 조금 더 기다려볼게요. 혹시 모르니까.
유령
만약 친구가 오지 않아도.
사람
않아도?
유령
너무 낙담하지는 마세요. 어쩌면 친구 분은 진짜로 건너로 이미 떠났을 수도 있어요. 아니면, 부르는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한 바퀴 돌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떠난 사람은, 원래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사람
그래요. (사이) 가는 길을 배웅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유령
괜찮아요. 어쨌거나 죽은 사람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법이니까요.
유령 일어나서 나가고 사람은 자리에 앉은 채 손을 흔든다.
잠시 후 사람은 일어나서 향에 다시 불을 붙이고 앉는다.
암전.
※본 희곡은 지난 191호(2020년 11월 19일)에 게재된 작품으로, 200호 발행에 맞춰 다시 활용하였습니다. - 연극in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