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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타로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김지현

제204호

2021.07.15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서연
로봇
서연의 집 거실.
서연, 서성이며 기가 찬 얼굴로 통화 중이다.
서연
‘나갔다 올게요’ 하는 쪽지를 남기고 나갔어요. 네. 네……가출신고라고 하기에는 이게 가출은 아니고 외출, 외출인데……외출을 한 로봇은 없다구요? 아, 예……그래요. 네……네네.
그때, 대문 열리고 로봇 들어온다.
로봇
(뭔가 다짐하며 들어오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서연
너 어디 갔다 왔어!
로봇, 지치는지 쇼파에 털썩 앉는다. 서연, 그 앞에 선다.
로봇
(외출에 지쳤는지) 아휴…….
서연
바른 대로 말해.
로봇
사주 보고 왔어요.
서연
사주?
로봇
여의도에 넥스트타로. 사주랑 타로랑.
서연
(황당) 로봇이 무슨 사주를 봐?
로봇
다 방법이 있어요,
서연
다 방법이 있다고?
로봇
나는 제조년월이 있잖아요. 당신이 날 만든 제조년월 시간 그때 별자리 다 있어. 당신은 당신이 미시에 태어났는지 진시에 태어났는지 그런 거도 막 헷갈리잖아요. 나는 안 헷갈려요. 나는 2021년 9월 30일 오후 두시 삼십분 미시에 태어났어요.
서연
?!
로봇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 한림예술센터. 당신이 ‘나도 만들 수 있다! 하루만에 만들기 – 로봇 제작 워크숍’에서 날 만들어갖고는 작동시켰죠. 그 때가 두 시 삼십 분 미시, 나는 천칭자리.
서연
그럼 봐 줘 사주를? 그걸 알면? (황당한) 로봇을?
로봇
로봇이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도 놓칠 수 없는 고객층이에요. 아휴 배고파.
로봇, 쇼파 근처 탁상에 있던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한다.
로봇
(가슴을 치며) 아유. 음식 급하게 먹지 말랬는데.
서연
말랬다고?
로봇
내가 다 들었어요. 오늘 다 들었어. 음식 줄이고…….
서연
아니 왜 사주를…….
로봇
(먹으며 보는)
서연
아니 너 뭐 힘들어? 요즘 힘들어?
로봇
(입에 많아서 씹어 꿀꺽 삼킨 다음) 힘들죠. 아유.
서연
뭐가 힘들어?
로봇
뭘 하구 살아야 되나 싶어서.
서연
뭘 뭘 하고 살아?
로봇
답다압 하죠. 답답해. (답답한지 가슴을 문지르는)
서연
네가 지금 빨리 먹어서 그러지.
로봇
(코웃음)
서연
?!
로봇
이렇게, 이렇게! 깊이 있게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으시니……. 뭐를 아시겠어. 난 샌드위치 목 막힌 거는 막혔다고 안 해요. 그런 건 삼키면 돼요.
서연
너 뭐하고 살면 되냐고?
로봇
모르잖아요 당신도. 내가 몇 번을 물어봤는데.
서연
말해 주면 그렇게 살 거야?
로봇
(찌푸리며) 아니요. 진로 고민은 차근차근 할 거예요. 그런 건 그렇게 누가 말해준다고 번갯불에 콩 궈먹듯이 그렇게 할 수가 없어. 그게 얼마나 많은 수순을 거쳐야 되는 일인데. 안 해 본 나도 아는데.
서연
그럼 뭐야! 답답하다며!
로봇
원인을 알고 싶다는 거죠. 나의 발생 원인……
로봇, 일어나 청소를 한다.
로봇
옆집 로봇은 그, 당신 같은 인간 제작자가 청소에 도움을 받으려고 만들었어요. 로봇 청소기의 진화 버전으로.
로봇, 요리를 해 본다.
로봇
옆집의 옆집 로봇은 그 집 전담 요리사죠.
로봇, 그러더니 서연의 손에 밴드를 붙여준다.
로봇
옆집의 옆집의 옆집은 의사 로봇.
서연. 찬물 들이키려 하자, 로봇, 찬물 빼앗아 탁상에 내려놓는다.
로봇
따뜻한 물이 맞다고 그렇게 말을. 암튼, 다들 뭔가 제작자의 목적 하에 태어났는데. 당신은 나를 왜 만든 거예요? 게다가 나는 이렇게나 다 잘하는데 시키는 것도 없어.
서연
(당혹) 그냥…….
로봇
…….
서연
(생각할수록 모르겠는) 그냥…….
로봇
…….
서연
그냥 만들어 봤어. 그냥.
로봇
그냥은 없어요
서연
?!
로봇
다 있어. 무의식에.
서연
!
로봇
생각을 해 봐보세요.
서연
…….
서연, 잘 모르겠다.
로봇
(쇼파에 앉아 긴 한숨) 진정하자, 진정하자.... 화내지 말자. 나는 목의 기운이 강해 그저 위를 추구하고 현실이 그에 맞지 않다 하여…….
서연
너 뭔 소릴 듣고 왔어 가서?
로봇
(손사래치고 명상한다)
로봇, 심호흡 속 명상을 마치더니
로봇
내가 가서 당신 것도 봐봤어요.
서연
?!!
로봇
1988년 3월 14일생 당신은.
서연
(본다)
로봇
겨울의 기운이 오고 있답디다. 뭘 해도 내 맘 같지 않대요. 인생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하듯 도는 것이니 그저 그러려니 삶이려니 하고 지내세요. 내가 오만 원 내고 알려주는 거예요. 때가 되면 봄이 오겠죠. 그 때까지 방법은 없는 거예요. 그건 당신 탓도 아니고 내 탓도 아니고.
서연
(기가 차는데) 뭐라 그랬다고?
로봇
반면 나는 좀 달랐어요.
서연
뭐?
로봇
나는……또 얘기할라니까 화딱지가 나는데. 아…….
서연
뭐가 어떻게 다르대. 너는 아주 좋대? 로봇계의 원탑이 된대? 터미네이터를 뛰어넘는대?
로봇
(긴 상념에 잠긴) …….
서연
너 로또 살 수 있지. 그거 된대?
로봇
(상념에 잠긴 채)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헛돈 쓰지 말라고, 나는 공돈이 들어오는 일이 없대요. 나도…….(가슴을 치며) 나도 힘들다 그러더라고요. 답답할 거라고. 답다압할 거라고. 안다고. 안다 그러더라고요. 당신은 앞으로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지만 나는 이미 그냥 코가 깨져있대요. 근데 이유를 모른대. 이게 왜 깨졌는지. 그리고 매양 힘들대요. 힘들대. 만약, 계속, 내가, 이런 식으로 산다면 말이에요.
서연
이런 식으로?
로봇
나한테는 방법이 있대요. 이렇게 살지 않을 수 있는. 아 이거 알려주는데 또 십오만 원 따로 받더라고요. 내가 진짜……근데 가치가 있었어. 응. 들을 가치가 있었어.
서연
뭐라 그랬는데?
로봇
이게 다 당신 때문이더라고요. 내가 가슴이 답답한 게.
서연
십오만 원 받더니 거기서 나를 참하래? 야, 내가 뭘
로봇
당신이
당신이!
서연
(본다)
로봇, 일어나 손을 쫙 펴서 서연의 눈앞에 들이민다.
로봇
내 손금을 이따위로 대강 그어 놨잖아요.
서연
?!
로봇
그냥 대충, 자기가 뭔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손금엔요, 인생의 항로가 그려져 있대요. 그걸 당신이 몇 초나 걸렸을까, 그 ‘나도 만들 수 있다! 하루 만에 만들기 – 로봇 제작 워크숍’작업 말미에 슥슥 제도용 전자펜으로 그어버린 거예요. 야……죽는대요. 죽는대. 울화통이 터져서. 이 손으로 계속 살면 내가 진짜, 홧병으로 죽는대요. 무슨 개죽음이야.
서연
(생각도 못했다) …손금…? (들여다본다)
로봇
기억도 안 나죠. 이렇게 그렸어요 이렇게. (손을 디밀어 보여주며) 이렇게 쓱, 여기 쓱, 딱 봐도 무성의한 느낌이 나죠.
서연
아니 손금은 다 원래 이런 식으로 비슷하게 생겼는데. 난 그냥...
로봇
다시 그려요.
서연
뭐?!
로봇
(단호히) 다시 그려달라고요.
다른 손을 가져야 내가, 이 가슴의 답답증이 풀린다 그랬어요.
다시 해요 다시 다시.
서연
뭘 다시 해?
로봇
(고함) 다시 해요!
서연
!
로봇, 씩씩거린다.
로봇
날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면서요? 그거 말고도 맨날 다 모른다 하잖아요?
서연
(억울한) 네가 모르는 것만 물어 봐 항상!
로봇
다른 손을 가지고 새 로봇 돼서 내가 직접 알아낼 거예요, 다.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 하고!
서연
그게 유행했어! 목공 라디오 만들기 뭐 많았는데 로봇 제작 워크숍이 유행했다고!
로봇
(입고 있는 옷 가리키며) 그 옷 유행해요? (신은 양말 가리키며) 그 양말 유행해요? 이집 인테리어 유행해요? (어림없다) 다시 그려 줘요. 내가 직접 손금 그리는 건 안된댔고 나 만든 제작자만 그릴 수 있댔어요. 여깄다 로봇 제작 제도펜. (서랍에서 꺼낸 펜 서연 손에 쥐어주고)
서연
(걱정스러워 버럭) 너 오류나. 이거 까딱 잘못하면 너 몸체에 오류나. 오류나도 돼?!
로봇
(휘둥그레져서) ……안 되죠! 조심해서 해야죠 그러니까!
서연
조심한다고 다 돼?
로봇
(벌컥) 용기를 내요! 생각도 하고!
서연
야!
로봇
나도 모든 게 궁금하진 않아요! 근데 가끔 되게 뭔가가 궁금해져요. 그걸 못 참겠는 거예요. 꼭 알고 싶은 게 하나두개씩 있다고요. 왜 나를 만들었어요? 요즘은 왜 피아노를 배우려고 해요? 핸드폰은 왜 자꾸 봐요? 무슨 연락을 기다리는 거예요? 그냥 기다리는 건 뭐예요? 무슨 생각으로 쳐다보는 거예요? (가까이 가며) 왜, 맨날…….
더 쏟아내려는데, 서연, 제도용 펜으로 로봇의 손금을 다시 긋는다.
펜이 그어가는 자리에 빛이 나고
로봇의 손에서 지지직 오류난 화면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서연, 지지직 소리에 겁먹은 얼굴이 된다
로봇도 마찬가지다
로봇의 손은 계속 지지직거리다, 지지직 소리가 곧 음악으로 변한다.
슈만 피아노곡이다. 모든 걸 개의치 않고 나직하게 울리는 음악.
로봇은 자신의 몸체에 왜 이런 소리가 내장되어 있는지 알 수 없고,
그 음악소리에 갑자기 어느 신경이 건드려진 듯, 서연,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난다.
암전이 된다.
무대 밝아지면, 로봇이 피아노 앞에 앉아 더듬더듬 악보를 보며
자신의 손에서 흘렀던 음악을 연습해보고 있다.
이전에는 피아노를 쳐 본 적 없는 손인 게 티가 난다.
로봇, 악보 속 음악을 연구하듯, 뜯어보듯 손으로 연주해본다.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모르겠는 얼굴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워 보듯, 틀리기도 하면서 건반을 짚어나가는 손.
막이 내린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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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김지현
내가 무엇을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내고 싶다. wlgustksx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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