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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son d'être (부제 : 염소의 꿈)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홍경진

제204호

2021.07.15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집주인
염소(Cl)
나트륨(Na)
물 분자(H2O)

어느 평일 아침

어느 가정 집 부엌
무대 위에는 식탁이 놓여있다. 식탁 한 켠엔 아침을 먹은 흔적이 있는 그릇과 포크, 누군가 놓고 간 듯한 스마트 폰이 있다. 그리고 소금 병과 그 주위에 떨어진 아주 약간의 소금 결정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물이 담긴 컵이 놓여있다. 그 소금 결정 안을 아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수 억의 염소(Cl)와 나트륨(Na)이 격자 구조로 손을 맞잡은 듯이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 그 중 하나의 염소와 하나의 나트륨, 대화를 시작한다.
염소
여기에서 벗어날 거야.
나트륨
뭐?
염소
이 결합을 끊고 나갈 거라고.
나트륨
무슨 수로?
염소
잘 모르겠어. 방법을 찾아야지.
나트륨
허튼 소리.
염소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미 결심했어. 난 여길 떠나야 해.
나트륨
이렇게 갑자기? 대체 왜?
염소
우리가 식탁 위에 떨어진 지 며칠이 지났어. 주인이란 인간은 식탁도 잘 닦지 않아. 하지만 곧 주말이고 밀린 집안일을 하면서 우리도 치워질 거야. 이대로 버려지고 싶지 않으면 그 전에 떠나야 해.
나트륨
그래, 여길 나간다고 쳐. 나가서 뭘 할 건데?
염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어.
나트륨
무슨 일? 제설제라도 돼서 눈 위에 뿌려지고 싶은 거야?
염소
아니, 그것보단 좀 더 새롭고 의미 있는 일.
나트륨
우린 혼자 있으면 불안정해.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염소
그래,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야.
나트륨
무슨 가능성 말이야?
염소
예를 들면 반도체 같은 거 말야.
나트륨
...?
염소
(사이) 난 항상 저 소금 병 안에서 집 주인이 요리를 하길 기다리곤 했어. 언젠가 나도 다른 소금 원소들처럼 불 위에서 새로운 화학반응을 경험하길 기대하면서. 그런데 어느 날 식탁 위에 떨어진 소금 덩어리를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 만약 요리에 쓰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운이 나빠서 바닥에 떨어지면? 나라고 안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는데. 음식에 쓰인다 해도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운에 맡기는 수 밖에 없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지.
나트륨
그래서?
염소
그런데 그 때 집주인이 밥 먹으면서 보던 스마트 폰이 눈에 들어왔어. (식탁 위 스마트 폰을 보며) 저기 칩 안에 붕소(B)를 봐. 쟤도 우리처럼 불안정해. 원래는 붕산이나 광물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고. 최외각 전자도 3개 밖에 없어.
나트륨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염소
난 불안정한 상태가 새로운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하는 거야. 저건 완전히 새로운 물질이야. 반도체 안의 실리콘 사이에서 붕소는 불순물이야. 심지어 결합을 해도 최외각 전자가 7개 밖에 안돼. 그런데 놀라운 건 전자의 빈 공간이 전류를 만든다는 거야. 도체 같은 성질을 만들어낸다는 거지. 우리랑은 달리 불안정한 상태를 이용해서 스마트 폰처럼 복잡한 기계를 동작시켜. 정말 멋지지 않아? 인간들은 스마트 폰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스마트 폰이 없으면 불안해 할 정도지. 나도 어쩌면 붕소같은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트륨
소금도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야. 우리가 없으면 어떻게 음식에 간을 하겠어? 이 세상에 싱거운 음식밖에 없다면 인간들의 행복지수가 50% 이상은 감소할걸.
염소
하지만 난 소금으로 살고 싶지 않아. 여긴 너무 따분하고 정적이고, 그저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야. 누군가 요리를 할 때까지. 요리가 끝나고 병 뚜껑이 닫히고 나면 저 투명한 유리병 안에서 다른 원자들에게 빽빽히 둘러싸여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유리 밖을 바라보는 것 밖에 없어. 아니면 우리처럼 어줍잖게 바닥에 떨어져 쓰레기통에 버려질 운명이 되거나. (사이) 그래, 어쩌면 어린 아이의 그림 재료가 될 수도 있겠지. 소금은 수채화에 좋은 재료기도 하니까. 그래봤자 그 그림은 상자에 처박히거나 버려지겠지만.
나트륨
그게 네 마음에 안 든다 한들 우리한테 무슨 선택권이 있겠어? 애초에 이렇게 태어났는데. 우린 최고의 파트너나 다름없어! 난 너한테 남는 전자를 주고, 넌 내 전자를 받아서 서로 안정적인 상태가 되고.
염소
하지만 난 자유롭고 싶어.
나트륨
자유? 대체 자유가 뭔데? 붕소라고 자유로울 것 같아? 걔도 그냥 다른 원소들이랑 결합되어 있을 뿐이라고.
염소
적어도 붕소의 전자는 자유로워.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
나트륨
그런 걸 자유라고 하진 않아. 넌 착각하고 있는 것 뿐이야. 자유라는 건 말야, 혼자서도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진짜 자유라고 할 수 있는 거야. 헬륨처럼! 18족 원소라 누구하고도 결합할 필요가 없으니까.
염소
꼭 안정적인 상태가 될 필요가 있을까? 내 최외각 전자가 7개 뿐인 건 채워야 할 결함 같은 게 아냐. 그냥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뿐이지. 반도체에서 붕소는 안정적이지 않아도 괜찮아. 오히려 불안정함이 전자를 움직이게 하고 전류를 만들어내.
나트륨
넌 붕소가 아니야. 반도체가 될 수 없어. 여길 나가봤자 다른 염소랑 만나서 염소 분자가 되거나 칼슘이랑 만나서 염화칼슘이나 되겠지.
염소
어쩌면 완전히 다른 원소와 결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 불안정한 성질이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줄거야. 반도체는 아니어도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지 몰라.
나트륨
대체 무슨 수로? 너와 결합할 수 있는 원소가 나랑 칼슘말고 뭐가 있는데? 우린 안정적인 상태를 추구하도록 만들어졌어. 최외각 전자가 8개가 되도록 다른 원소와 결합하는 것, 그게 자연의 법칙이고 질서야. 그리고 우리에겐 지금이 가장 완전한 상태야. 이 투명하고 아름다운 소금 결정을 봐!
염소
완전? 네가 말하는 완전한 상태란 게 뭐야? 최외각 전자가 8개가 되는 거? 안정적이지 않으면 완전하지 않은 거야? 난 혼자선 완전하지 않으니까 그냥 이대로 여기에 묶여서 가만히 있으라고?
나트륨
그래. 이게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니까.
염소
정말 소금으로 사는 게 우리 존재의 이유일까? 우리한테 삶을 선택할 권리 따윈 없는 거야?
나트륨
그래.(사이)
염소
차라리 어디로든 흐를 수 있는 물이 됐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왜 하필 난 소금이 되어버린 걸까? 움직일 수도, 사라질 수도 없고, 그냥 이렇게 존재할 뿐이야.
나트륨
난들 알겠어? 신만이 알겠지. 근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우리만 이렇게 사는 건 아냐. 태양도, 달도, 꽃도, 풀도, 철도, 탄소도 다 그렇게 살아. 원하는 대로 태어난 존재가 얼마나 된다고 그래?
염소
인간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 인간들이 부러워. 온전한 선택의 자유가 있잖아.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선택할 수 있어.
나트륨
그렇다고 인간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네 운명을 받아들여. 태초에 우주 대폭발이 일어나고 별의 죽음에서 원소가 탄생한 것도, 하필 네가 염소인 것도, 지구라는 행성에서 바다로 흘러들어 소금이 된 것도 모두 신의 뜻이라고. 우린 아주 희박한 확률로 여기에 존재하게 된 거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그리고 네가 부러워하는 인간도 결국 원자로 이루어져 있는걸. 우린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야. 우리 존재에 자부심을 가져보는 게 어때?
염소
넌 소금으로 사는 것 말고 하고 싶은 것도 없어?
나트륨
그래, 이게 내 의무고, 의미 있는 일이니까.
염소
이대로 쓰레기 통에 버려진다해도? 아무 미련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
나트륨
그래. 그게 내 운명이라면. (사이) 운이 좋으면 다시 소금 병에 들어갈 수도 있겠지.
염소
그럴 리 없다는 거 알잖아.
나트륨
…. (사이)
나트륨
아직도 떠나고 싶어..?
염소
그렇다니까.
나트륨
네 꿈을 이룰 수 없다해도?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어도?
염소
왜 그렇게 단정하는 거야? 시도는 해 볼 수 있잖아.
나트륨
(사이) 그럼 난..?
염소
뭐..?
나트륨
네가 떠나면 난 어떻게 되는 거냐고!
그때,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헐레벌떡 들어오는 사람의 발소리.
집주인
(현관에서 들리는 소리) 헉헉, 아, 하필 폰을 놓고갔네.
탁- 풀썩-. 물건을 뒤지는 소리, 옷가지와 이불이 펄럭이는 소리.
집주인
(짜증내며) 대체 어디다 둔거야.
집주인 등장.
집주인
(식탁 앞으로 가며) 여기 있었네. 젠장, 몇 시야.
식탁 위의 스마트 폰을 잡는 순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집주인, 발신인을 보고 깜짝 놀라 허둥대다 컵을 툭 친다. 컵 안의 물이 식탁 위로 쏟아진다. 식탁에 떨어진 소금 결정의 나트륨과 염소 원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트륨
어..어..?
물 분자들이 소금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어느새 염소와 나트륨 사이를 가로지르며 빠르게 활개친다. 견고해 보였던 염소와 나트륨의 결합이 허무하게 끊긴다. 염소, 예상치 못한 듯 당황한 표정. 이내 약간의 설렘이 담긴 평온한 얼굴로 되돌아온다. 이제 무대 위에는 염소, 나트륨 원소와 물 분자들이 모두 섞여 있다.
염소
이것 봐! 하하..이렇게 간단한 거였다니….
나트륨
(당황하며) 제기랄! 너 분명 후회할거야. 후회할 거라고!
염소
그럴지도 몰라. 근데 이게 우리 운명인가봐. 안녕, 나트륨!
염소와 나트륨, 점점 멀어진다.
집주인
(얼굴을 찌푸리며) 아이씨!! 되는 일이 없어!!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후 전화를 받는다.) 여보ㅅ….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소리지르며 화내는 목소리가 들린다. 집주인, 통화 내내 허공에 연신 허리를 굽신거린다.
집주인
예, 죄송합니다…. 폰을 놓고나와서. 아, 회의…. 금방 가겠습니다. 예예…. (전화를 끊는다) 망할 놈의 회사, 내가 말이야, 비트코인만 대박 나면 당장 때려치고 만다!
집주인, 욕을 중얼거리며 퇴장한다. 서서히 암전.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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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진

홍경진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연결성을 탐구합니다. instagram@hkj.dr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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