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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가 저기 있다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전서아

제205호

2021.07.29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미이. 지구인.
시내. 외계인.

미래
장소
지구가 보이는 행성.
언덕의 경사면.

471일.

파도 소리가 들린다.

시내, 뒤돌아 바닥에서 뭔가를 뽑고 있다.
미이, 앞을 보고 앉아있다.

둘은 멀리 있다. 가끔 고개 들어 서로의 위치를 확인한다.
미이
파란색이야?
시내
응.
미이
파란색 아닌 건?
시내
없어.
미이
좀 더 찾아봐.
시내
파란색뿐이야.
미이
아닌 게 있을 것 같아.
시내
있겠지.
미이
이젠 보기만 해도 현기증 난단 말이야.
시내
안 보고 있잖아.
미이
진짜야. 막 울렁거리고, 눈도 시렵고.
시내
어!
시내, 급하게 뭔가를 뽑는다.
미이, 잠시 뒤돌아보다가 다시 앞을 본다.
시내
아…
미이
파란색.
시내
(던진다) 현기증 난다.
미이, 벌러덩 눕는다.
미이
다 죽었을까…?
시내
(고개 들어 지구를 본다) …어?!
미이
몇 명은 그래도 살았겠지…?
시내
저기!
미이
(시내에게) 안 봐도 파란색일걸.
시내
연기 난다!
시내, 미이에게 달려온다.
둘은 나란히 서서 연기를 본다.

한참을, 본다.
미이
… 시시하다.
시내
(미이 본다)
미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미이, 다시 뭔가를 뽑기 시작한다.
미이
맨날 똑같아.
시내
이상하지. 여기에 너랑 나랑 둘만.
미이
풀이 파란색인 게 제일 이상해.
시내
외계인 하나, 지구인 하나.
미이
… 아냐. 풀이 파란색인 게 제일 이상해.
미이, 몇 개 뜯더니 현기증.
시내
아, 내가 할게.
미이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먼저야. (토하려한다)
시내, 미이 눕힌다.
미이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시내
우주선 지나갈 때 됐는데. 근처에서 막히나 봐. 궤도 잘못 타면 정체가 심해. 며칠만 더 참아봐, 미이야…
미이
넌?
시내
(미이 배 쓸어주며) 나 뭐?
미이
넌 여기 있을 거야?
시내
… 그런 거 생각해본 적 없는데.
미이, 시내 빤히 올려다본다.
시내
왜?
미이
… 아이스크림에 과자 얹어 먹으면 맛있는데.
시내
다음 별에 가면 있을 지도 몰라. 그럼 많이 먹어.
미이
그럴 일 없어.
시내
모를 일이야. 네가 여기에 올 줄 몰랐던 것처럼.
미이
(지구 보며) 아이스크림도 다 사라졌을 거야.
시내
미이
펑!
이상하진 않았어.
시내, 지구를 본다.
지구는 1/3 만 남기고, 나머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이
구슬 알아?
시내
(고개 젓는다)
미이
구슬 아이스크림이란 것도 있는데.
파도 소리가 들린다.
미이
난 여기가 좋아. 맨날 파란색 풀만 뜯어도 좋아. 너랑 나랑 함께인 게 좋아.
시내
거짓말.
미이
저기서도 초대 받은 적 없었어.
그저 언젠가 지구를 떠나게 되면… 그 때는 무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자주 상상 해보곤 했는데… 나한텐 그게 더 초대에 가깝게 느껴졌거든. 게다가 별로 먼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지구나 인간의 운명과는 상관 없이.
시내
무루.
미이
내 사랑.
지구에서는 여기 있는 줄 알았는데… 없네. 여긴 너만 산다고…
시내
지금은 둘.
미이
그러다 또 하나가 되면?
시내
그래도 나를 시내라고 부르면서 살겠지.
미이, 일어선다.
시내
왜 날 시내라고 불러?
미이
내가 좋아하는 단어야.
시내
무슨 뜻인데?
미이
얕고 잔잔하게 흐르는 물이야.
시내
여기엔 그런 게 없는데.
미이
없는 것도 이름이 될 수 있어. 뭐 이름이 기쁨이면 기뻐서 기쁨이니?
시내
무루는?
미이
시내
왜 무루였어?
미이
몰라. 그냥 무루처럼 생겼어.
시내, 벌러덩 눕는다.
미이, 누운 시내를 빤히 본다.
미이
너는 좀 쓸쓸해보여.
시내
혼자 오래 살아서 그래.
미이
무루 있잖아. 다리가 하나 없었거든. 창문에 앉아서 사람들이 오가는 걸 보는 걸 좋아했어. 그래서 매일 울었어. 야옹야옹. 창문에 올려달라고, 아주 당당하게. 야옹야옹. 나는 무루가 그래서 좋았어. 갖고, 가지지 못하고. 그런 걸 전혀 구분하지 않았거든. 자기가 창문에 올라가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내가 창문에 올려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무루는 자기 다리가 하나 없다는 걸 잘 알았는데. 그게 무루한테 뭔가를 의 미하진 않는 것 같았어. 그냥 다리가 하나 없는 고양이였어. 그리고 늘 야옹야옹…
어떤 멋짐이 있달까. 그 태도에.
그래서 무루를 사랑했어.
시내
네가 꼭 무루를 만났으면 좋겠어.
미이
그럼 좋겠지만… 만날 수 없어도 괜찮아.
사랑은 쓸쓸한 게 아니야. 무루가 떠나도 야옹야옹 소리가 내 안에 있어.
시내, 손 닿는 곳의 파란 풀을 뽑아 던진다.
시내
여긴 잔잔한 물이 없잖아.
네가 떠난 후에 내가 시내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궁금하면 어떡하지?
미이
시내는 졸졸졸, 이야.
시내
졸졸졸?
미이
응. 졸졸졸.
시내, 졸졸졸. 졸졸졸. 작게 웅얼거린다.
미이
손님끼린 안쓰러움이 있는 것 같아.
시내
네가 무루를 안쓰러워 하고, 무루가 너를 안쓰러워 하듯이.
미이
(웃는다) 무루가 날 좀 더 안쓰러워했지.
시내
손님과 손님이었네.
미이
늘…
미이, 파란 풀을 같이 뽑는다.
시내
멸망이 또 오면 넌 어떡할래?
미이
안 죽을래.
시내
진짜?
미이
응. 안 죽고 살래.
시내
살 수 있어?
미이
(끄덕인다)
시내
지구가 그립지는 않아?
미이
(고개 젓는다)
시내
(웃는다)
미이
그리운 건 무루 뿐이야.
시내
우리 내일은 파란 풀 다 뽑자.
미이
그만 뽑아?
시내
돌아가자.
미이, 신나서 일어선다.
시내, 미이 등에 묻은 흙을 턴다.

둘이 사라지고 나서, 언덕 너머에서 아주 작은 야옹야옹 소리 들린다.

472일.

시내, 혼자 쪼그려 앉아 뭔가에 열중하고 있다.
이윽고 들어올리는 것은 파란 얼음 덩어리.
시내
(살짝 혀를 댄다) 음…
시내, 지구를 본다.
그리고 파란 얼음 덩어리를 본다.
시내
모자란가… (파란 풀을 더 으깬다)
미이, 걸어온다.
미이
뭐 해?
시내
일어났어?
미이
아이스크림이야?
시내
(가린다)
미이, 신나서 시내를 끌어안는다.
미이
소다맛?
시내
그게 뭔지는 몰라.
미이
시내가 최고야.
미이, 파란 얼음 덩어리를 맛있게 먹는다.
시내
… 아이스크림 맛이야?
미이
맛있어!
시내
지구에서 먹던 맛이야?
미이
(먹는다)
시내
그건 아니지…?
미이
그렇지만 맛있어!
미이, 남김없이 먹는다.
미이
진짜 먹고 싶었거든.
시내
나도 아이스크림 먹어보고 싶다.
미이
시내
그럼 똑같이 만들었을 거야.
미이
(쓰다듬는다) 똑같지 않아도 괜찮아.
시내
다른 별에 가면 있으려나?
미이
모를 일이지!
왜! 같이 떠날거야?
시내
모를 일이지.
미이
그럼 이 별에 아무도 없어지나?
시내
그것도 모를 일이지. 누가 불시착할지.
누가 먼저 오고, 먼저 떠나고.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냐…
미이
…중요한 게 아냐.
시내
응.
미이
왔고, 머물렀던 게 중요한 거지.
시내
그러니까 떠나는 것도 별 일 아닐 거야.
미이
(안아준다)
시내
그치.
미이, 시내에게 가만히 안겨 있는다.
미이
하루는 무루가 창문 구경을 안 한 날이 있어. 날씨가 얼마나 멋진지 보여주고 싶었는데, 종일 잠만 잤어. 살짝 흔들어 깨워도 눈을 떴다가 다시 감고.
해가 질 때쯤 되니까 조바심이 나는 거야.
그래서 억지로 무루를 안아 올렸어. 자는 애를 번쩍. (웃는다) 그랬더니 눈도 안 뜨고 야옹야옹 해줬어.
이상하지. 올려달라는 생각도 없었을텐데, 당연하다는 듯이 야옹야옹…
미이, 파란 풀을 툭 뜯는다.
미이
그게 내 고양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걸, 다음날 무루가 죽고나서 알았어.
떠나는 존재도 사랑을 할 수 있어.
그치?
시내
… 그럼.
시내, 미이 배를 쓰다듬는다.
미이
불시착해서 다행이야.
시내
무루가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미이
이젠 알아.
시내
미이한테 도착해서 다행이었을 거야.
미이
응. 이젠 알아. 정말…
시내
예전에, 이 별에 처음 왔을 때. 그 땐 바다가 없었어.
미이
정말?
시내
어느 날부터 천천히 바다가 차오르기 시작했는데, 한동안 파란색은 보지도 못했어.
보고 있으면 내가 딛고 선 땅이 울렁거리면서 어어어… 하는 기분이 들고…
그대로 날 집어삼킬 것 같고…
미이
두려웠어?
시내
지금도 두려워.
미이
이 별엔 바다밖에 없는데.
시내
이상하지. 난 두려움이랑 같이 살고 있는 거야.
미이
엄청 거대한 두려움.
시내
응, 엄청 거대한.
미이
바다가 계속 차오를까?
시내
지금까지론.
미이
언제?
시내
꽤 남았을 거야.
미이
멸망이네.
시내
멸망이지.
미이
어떤 게 더 무서울까. (지구를 가리키며) 펑 터지는 일?
아님 서서히 가라앉는 일…?
시내
계속 떠나야 하는 일.
미이
응. 그것도 무섭지.
시내
떠나보내야 하는 일.
미이
맞아.
시내
멸망은 장난 같은 거야. 어차피 다들 불시착 한거면서.
미이
(웃는다) 지구에서도 아이스크림 먹어본 적 없었다… 사실.
너무 비싸서.
사람들이 먹는 거, 광고에 나오는 거… 맨날 구경만 했어.
시내
미이
그래서 네가 만들어준 게 나한테는 진짜 아이스크림이야.
미이, 파란 풀을 하나 더 뽑으려다 눈 질끈 감는다.
시내
뽑지 마.
미이
오늘 다 뽑기로 했잖아.
시내
내일 다 뽑자.
미이
내일?
시내
응. 내일은 꼭 다 뽑자.
미이
(박수 친다)
시내
아이스크림도 또 만들어 줄게.
미이
고마워.
시내
우주선도 곧 올거야.
미이
(시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시내
안쓰러워 하는 거야?
미이
그럴지도.
시내, 미이를 업는다.
미이, 힘은 없어도 신나서 다리를 달랑거린다.

자리를 뜨려는데 갑자기,
미이
무루?
시내
?
미이, 시내 등에서 내려 언덕 너머로 달려간다.
미이
무루 소리 들렸는데!
시내
위험해!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미이.
풍덩, 소리.

시내, 언덕 꼭대기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시내
어어….
그대로 눈 가리고 주저앉는 시내.

473일.

미이, 뒤돌아 바닥에서 파란 풀을 뽑고 있다.
한참 뽑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1/3만 남은 지구를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풀을 뽑으려는데,
미이
어! (녹색 풀을 뽑는다) 시내야! 시내야!
미이, 급하게 일어나 뛰다가 멈춘다.
울컥 토한다.
시내
(멀리서 목소리만 들린다) 왜!
미이
… 아니야!
시내
미이
녹색인 줄 알았는데 파란색이야!
미이, 급하게 녹색 풀을 언덕 너머로 던진다.
시내
새삼스럽게.
미이
(입 닦는다)
시내
… 녹색이 있을 리가 없잖아.
미이
있을지도 몰라!
하나쯤은 있을 수도 있어.
시내
여긴 지긋지긋해.
미이
시내
멸망했으면 좋겠어.
미이
바다가 그렇게 바로 있을 줄은 몰랐어!
시내
말했잖아! 바다밖에 없다고!
미이
… 미안해. 놀랐지.
시내
빠지면 구해줄 수 없단 말이야.
나는… 나는 보지도 못하니까.
미이
나 수영할 줄 알아… 구해주지 않아도 돼.
시내
그러고 싶은데.
미이
그럴 수는 없어.
나도 무루한테 뭔가를 해주고 싶었어. 그렇지만… 그럴 수 없어.
시내
그럼 우린 왜 만났어?
이 이상한 곳에 왜 내렸어?
미이
불시착이라니까. 불시착에 이유가 어디 있어.
시내
여기가 널 죽이잖아.
미이
(지구를 본다)
시내
떠나는 게 나아.
미이
너도 마찬가지야.
시내
난 왜.
미이
여기도 멸망 중이니까.
시내
아주 나중의 일이야.
미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시내를 바라보며 쪼그려 앉는다.
시내
아주 아주 아주 나중에. 네가 다른 별로 가서 여기를 다 잊어버릴 때쯤 멸망할거야. 지구처럼 이상하지도 않을 거고. 지나가다 우연히 이 별을 보게 된다면. 그냥 처음부터 바다만 있던 별인 것처럼.
아주 조용히. 슬프지도 않을 거야.
어떤 멸망은 하나도 슬프지 않아. 거기에 누가 있었는지 모르는 죽음이잖아.
미이
왜 떠나지 않아?
나랑 같이 떠나면 되잖아.
시내
지구 사람들은 100살도 못 산다며.
미이
100살 넘게 사는 사람도 있어!
시내
미이
가끔은…
시내
그래서 같이 떠나기 싫어.
미이
내가 먼저 죽으니까?
시내
응.
난 너보다 훨씬 더 오래, 네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오래 살 거야.
미이
그게 왜.
시내
싫어.
미이
넌 두려운 거야.
시내
미이
(소리 지른다) 두려운 거야!
하지만 죽는 게 왜. 죽는다는 게 지금의 뭘 바꾼다는건데!
시내
너도 두려웠잖아!
시내, 비척비척 걸어나온다. 눈이 퉁퉁 부어있다.
시내
알잖아! 너도 네 고양이가 죽어갈 때 두려웠잖아.
미이
… 그래.
시내
그런데 왜 나한텐 계속 똑바로 보라 그래.
미이
네가 날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맞아, 두려웠어. 어쩌면 네가 두려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두려워했어.
우린 서로를 안쓰러워할 뿐이야.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곳곳에서 멸망 중이니까.
그러니까 기억해.
시내
더 오래 사는 쪽이라서 기억해?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미이
내가 여기 왔어.
네가 나를 안쓰러워했고, 나도 너를 안쓰러워 한 거야.
시내
(운다) 미워…
미이
나는 너를 좋아해.
시내
네가 없었으면 울지 않았을 거야.
미이
손님들끼리는 뭔가를 빌려주기도 하는 거야. 다시 돌려받지 못해도.
무루가 내게 가르쳐준 사랑은 그래.
시내
나는 가르쳐줄 사랑이 없어.
미이
아니야.
이미 다 가르쳐줬어.
시내
내가 언제.
미이
(웃는다) 옛날옛날에.
시내
…?
미이
내가 지구에 있었을 때.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도 먹을 돈이 없었을 때.
그 때 다 가르쳐줬어.
시내
(눈물 닦는다)
미이, 시내에게 다가가 눈물 같이 닦아준다.
미이
바다 있잖아. 엄청 시원하고 기분 좋았어.
시내
… 정말?
미이
응. 조용하고 어둡고. 천국이 여기인가, 했어.
나랑 같이 가보자.
시내
미이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또 여기 올 거란 보장이 어디 있어.
시내
무서운데.
미이
나 수영할 줄 안다니까.
시내, 망설인다.
미이, 시내 손을 잡는다.
미이
오늘은 돌아갈까.
시내, 못 이기는 척. 하지만 이미 기분 풀려 일어난다.

474일.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언덕 뒤편에서 간간히 웃음소리.
시내
(목소리만) 차가워!
미이
(목소리만) 이렇게 돌면 회오리 생긴다!
시내
(웃는다)
미이
나는 지구보다 여기가 더 좋아.
여긴 모든 게 다 있잖아.
시내
행복해?
미이
그럼.
시내
나도 행복해.
미이
멸망 별 거 없어.
시내
별 거 없어.
미이
같이 떠나자!
시내
떠나면?
미이
우주 구경 하는 거지.
시내
(키득키득) … 재미있겠다.
미이
내가 매일매일 재미있게 해줄게.
시내
생각해보지.
미이
내일 또 수영하자 그럼 할래?
시내
그건 좋아.
미이
새침해.
네가 새침해서 좋아.
시내
(웃는다)
미이
나 말고 불시착한 사람은 없었어?
시내
지구인은 없었어.
미이
외계인은?
시내
나.
미이
끝?
시내
기억엔.
미이
기억하지 못할 때는?
시내
있었을 지도 몰라.
가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거든.
미이
… 이상해. 그런 건 말로 잘 표현이 안 돼.
그런데 느껴져. 그렇지.
시내
처음부터 혼자였다면 우린 쓸쓸하지 않았을 거야.
미이
손님들은 원래 쓸쓸한 거야.
시내
그러니까 기억하진 못해도,
우리 안에는 떠나온 곳이 있는 것 같아.
어딘가, 혹은 누군가.
미이
(물장구 소리)
시내
있었겠지.
미이
이제 우리도 여기에, (물장구 소리) 있지.
시내
(물장구 소리)
미이
잠수할래?
시내
시작!
풍덩, 소리.
한참동안 정적. 따뜻한 햇살, 바람.

누군지 모를 먼저 숨 내뱉는 소리.

475일.

시내, 혼자 파란 풀을 뽑고 있다.
초록 풀을 발견한다.
시내
어…?
시내, 초록 풀을 든다.
시내
미이야. 이거.
이거… 진짜 있네. (멀리) 이거 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시내
진짜 있어!
그 때 멀리서 강렬한 빛이 비친다.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우주선이 가까이 다가온다.
목소리
요 앞에서 엄청 막혔어.
지구에서 온 사람들 내리느라 목성 근처 궤도 꼬여서 엉망이에요.
태울 손님은?
시내
아…
목소리
탈 거에요?
시내
(망설이다 고개 젓는다)
목소리
이상하네.
시내
… 다음에요.
목소리
그래요, 그럼.
이윽고 빛이 희미해진다.
우주선이 멀어진다.

시내, 언덕 위로 올라가 바다를 본다.
눈을 가렸다가 다시 눈에 힘을 주고 꾹 서 있는다.

그 때, 선명하게 들리는 고양이 울음 소리. 야옹야옹.
시내
무루?!
언덕 꼭대기에 낯선 고양이 실루엣.
시내, 넘어질 듯 달려간다.
고양이의 다리를 세어본다. 하나. 둘. 셋… 넷.
시내
아니야…?
시내, 고양이를 소중히 안아올린다.
시내
(볼에 댄다) 와 따뜻해…
무루 아니지..? 넌 무루가 아니지?
시내, 고양이에게 파란 풀 구경 시켜준다.
시내
여기는 파란 풀이랑 바다밖에 없어.
… 어…. 초록 풀도 있긴 해.
아주 열심히 찾으면 있어. 나도 몰랐어. 오늘 알았어…
시내, 고양이에게 바다 구경 시켜준다.
시내
이게 바다야.
와. 아직도 조금 무서워. 그런데 예전엔 보지도 못했어. 지금은… 볼 수 있어.
가끔 보러 올 것 같아.
(고양이 쓰다듬는다) 나는 시내야.
시내는… 바다랑 다른 물이래. 얕고 잔잔하게 흐르는 물.
본 적은 없지만, 소리는 알아. 소리는… 졸졸졸.
야옹야옹.
시내
어…. 이게 다야.
아까 우주선에서 내린 거야?
왜 여기 내렸어?
시내, 고양이를 안고 천천히 걸어간다.
시내
여기엔 손님이 자주 오진 않아. 뭐… 별 거 없거든.
우주선이 400일인가 500일에 한 번씩 지나가서... 좀 외딴 별이긴 해… 그래서 아무도 우연히 불시착하지 않아.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별에. 그래서 그 말을 한 번도 믿은적 없지만, 왜 여기에 왔는지 묻지도 않았어. ‘우리’가 손님이라고 말했거든. 아마 도 처음부터 도착하고 싶은 곳에 제대로 도착할 수 없다는 걸 알았던 것 같아. 난 그말이 이상하게 좋았어. 맞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묻지 않았어.
이상한 애였어. 어… 맞다. 걔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했어.
덕분에 수영도 하고.
… 재미있었어. 잘못 도착해줘서 고마웠어…
야옹야옹.
시내와 고양이, 사라진다.

서서히 작아지는 목소리만 들린다.
시내
어떻게 불러줄까.
내 이름도 그 애가 지어준건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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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아

전서아
연극 <오르막길의 평화맨션>, <인어>, <240 245>를 썼습니다. 커튼콜을 좋아합니다. 현실에서 주인공이 되기 어려운 사람들이 당연히 주인공인 이야기를 씁니다. 아직 우리에겐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jeonseo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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