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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눈에 까만 작은 코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김영빛

제206호

2021.09.30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주인
왕곰
배경
화장실 안.
작은 창, 거울, 세면대, 세면대 아래에 쭈그리고 앉은 왕곰.
주인, 잠옷 차림으로 눈 감은 채 발을 직직 끌며 등장.
세면대 아래에 쭈그리고 들어가려는데, 왕곰과 부딪친다.
주인
으악!
왕곰
안녕하세요.
정적.
주인, 눈 비비고 왕곰을 본다.
주인, 자기 머리 퍽 치고 왕곰을 다시 본다.
주인
뭐, 뭐야. 누구… 아니 어떻게 들어온 거야?
왕곰
놀라셨죠.
주인
잠깐만 너….
왕곰
놀래키려고 일부러 이런 건 아니고, 저기(손가락으로 창 가리키며) 네모나게 공간이 열려있길래 숨어 있으려다.
주인
내가 분명히 의류수거함에 갖다 버린 것 같은데?
왕곰
네?
주인
김왕곰 너 내가 이사 올 때 분명히 버렸는데? 똑같이 생긴 게 이렇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말을 하는 거지?
왕곰
저도 놀라워요. 지구는 처음 와보는데 이렇게 바로 지구의 말을 할 수 있다니.
주인
어릴 때 갖고 놀다가 버린 인형이 다시 보이고 심지어 막 사람 말도 하는데… 그러면 이건 내가 이상한 거야, 그치. 내가 하다하다 이제 드디어 환각을 보고 심지어 환청도 들리는 거네. 맙소사.
왕곰
아니에요. 외계인을 처음 보면 안 믿기는 게 당연하죠. 사실 이런 상황은 전혀 계획에 없었어요.
주인
잠시만 잠시만요, 외계인? 지금 당신이 외계인이라고요?
왕곰
지구에서는 다른 존재를 그렇게 부른다면서요. 아마 그 단어가 제일 정확하지 싶은데….
주인
외계인이 이렇게 생겼다고?
왕곰
아, 제 생김새 때문에… 저도 처음엔 깜짝 놀랐어요.
왕곰, 세면대 아래에서 꾸물꾸물 나와 거울 앞에 선다.
왕곰
지구에 떨어졌더니 이렇게 털이 생겼더라고요. 따뜻하고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도 이 눈이랑 코는 원래 모습 그대로니까 당신이 상상력을 발휘하면 대충 그게 맞을 겁니다.
주인
그러니까 지금 당신 말은 당신이 외계인이라 원래 살던 행성, 집, 뭐 그런 곳이 있고… 거기서는 털이 없이 민둥맨둥한 몸을 가졌었고, 모종의 이유로 지구에 떨어져서 정신 차려보니 왕곰인형이 되어있었다, 이거지.
왕곰
와 정확해요! 이런 털옷을 입은 존재는 왕곰인형이라고 부르는군요.
주인
당신 말이 사실이면 지구에는 왜 온 건데요?
왕곰
어… 그게….
주인
뭐야. 이야기를 지어낼 거면서 이유도 생각 안 해뒀네. 그런 마음가짐으로 무슨 사기를 치겠다고 여기서 이러세요.
왕곰
저는 원래 살던 행성에서 영원히 사라지려고 시도했어요.
주인
아, 불시착으로 노선을 잡으시겠다?
왕곰
지구 말로 하면… 죽는다, 이게 비슷한 말이겠다. 저는 죽으려고 했어요. 더 이상 바랄 것도, 생각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없어서 행동으로 옮기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그렇게 무언가 크게 일어났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지구였어요. 쩌어기, 네모난 틀 바깥이었다고요.
주인, 슬금슬금 뒷걸음질 친다.
주인
저주 들린 인형… 같은 건가? 근데 그건 서양 얘긴데? 아시아 구석의 낡은 인형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왕곰
제 말을 믿지 않아도 좋으니, 도와주세요.
주인
뭐… 뭘요?
왕곰
다시 사라질 수 있게, 방법을 알려줘요.
주인
당신 말대로면 원래 살던 행성에서 했던 거 다시 하면 되겠네. 뭐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뭐든 시도할 거면 여기 말고 밖에 나가서 해요.
왕곰
그게… 좀 복잡해요. 지구인 눈에 너무 많이 목격되어서 좋을 것도 없고.
주인
눈에 안 띄게 새벽에 의류수거함에 갖다 놔줄 수는 있는데.
왕곰
거기로 들어가면 지구에서 완전히 사라지나요?
주인
모르죠. 버린 인형이 어떻게 되는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왕곰
확실한 방법이 아니면 안 하느니만 못해요.
주인
저기요, 그런 걸 남한테 묻는 건 굉장히 무례한 일이라고요. 조용히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누구에게 말을 꺼내는 순간 그건 이미 조용하지 않아.
왕곰
듣고 보니 그러네요. 미안해요. 그럼 당신에게 몇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궁금한 게 많아요.
주인, 세면대 아래로 꾸물꾸물 웅크리고 들어간다.
주인
몰라. 알아서 하시고. 뭐가 궁금하죠? 빨리 물어봐요. 지금 좀 졸리니까 자기 전까지.
왕곰
그럼 저도 여기서 자도 될까요?
주인
마음대로 하라니까.
왕곰
(주인 옆으로 쭈그리고 들어간다) 고맙습니다.
주인
(흘긋 보고) 눈만 동그랗고 눈꺼풀도 없으니 잠도 제대로 못 자겠구만.
왕곰
사전적 의미의 ‘잠’이 아니어도 휴식은 좋은 거죠. 모든 걸 목격하는 눈은 쉽게 피로해지거든요.
주인
저런. 그렇겠다.
왕곰
당신은 왜 여기서 자는 거죠? 여기는 아무리 봐도 침실이 아닌 것 같은데.
주인
그게 궁금했구나.
왕곰
허리와 척추와 목뼈에 해로워 보여요.
주인
침대에서 자면 머리가 아파서. 차라리 여기가 편해.
왕곰
불편해 보이는데….
주인
익숙해지면 그게 편한 거고 내가 여기서 자면 여기가 침실인 거지.
왕곰
나도 만약에, 아주 만약에 지구에서 사라지지 못하고 오래 머물게 되면, 지구가 원래 살던 곳처럼 편안해질까요? 여기서 다시 살면 나도 지구인이 되는 걸까요?
주인
빨리 물어보는 건 좋지만, 하나씩.
왕곰
사실 제일 궁금한 건 따로 있어요.
주인
뭔데?
왕곰
나는 왜 여기서 눈을 뜬 걸까요?
주인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하면서 저승 문턱에서 쫓겨났거나… 스스로 삶의 스위치를 내리는 사람들을 구하는 구백 가지 방법 이런 책을 쓰려고 신들이 연구 중이거나… 이런 이유는 나 말고 저승사자가 대답해야 할 것 같은데.
왕곰
그런 거라면 원래 살던 곳에서 깨어나야 맞는데… 이렇게 낯선 곳에서, 낯선 모습으로 다시 살라는 건 대체 뭘 위해서일까요?
주인
제2의 기회?
왕곰
어우….
주인
정말 끔찍하긴 하다. 견디다 못해서 사라지는 길을 선택한 건데 생판 모르는 세계에서 다시 처음부터 살아야 하는 거. 여기서 죽으면 이젠 또 어떤 이상한 곳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거잖아? 어디 무서워서 함부로 죽겠냐고…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무간지옥도 아니고 말이야.
왕곰
맞아요, 딱 그거. 그러니까 여기서 뭐라도 하라고 등 떠밀린 기분, 뭔지 알 것 같죠?
주인
음… 지금 외형이 왕곰인형이니까… 인형이 하는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
왕곰
일리 있어요. 인형은 어떤 일을 하죠?
주인
어디 한구석에 그냥 앉아 있어. 풍경처럼. 사람들은 보통 인형을 싫어하지 않아서 자주 껴안거나 쓰다듬어. 짜부라질 만큼 세게, 아니면 그냥 자기가 포옹 받고 싶은 정도로 부드럽게. 종종 던지거나 퍽퍽 때릴 때도 있지만 아무튼 인형은 가만히 있어. 그게 인형의 일이야. 그리고 거의 언제나 따뜻하고 푹신해.
왕곰
어렵네요.
주인
물론 주인도 일을 하지. 인형이 더러워졌다 싶으면 빨아야 하고, 솜까지 잘 마르게 햇빛도 쬐어 줘야 하고, 고심해서 이름도 지어주고, 인형이 말을 하진 못하지만 이야기도 들려주고… 물론 상황이 애매해지면 버리기도 하지만.
왕곰, 한참 가만히 있다가 불쑥 양팔을 벌린다.
왕곰
나를 인형으로 써요. 당신이 예전에 의류수거함에 버린 친구가 나랑 똑같이 생겼다면서요? 나를 그 친구처럼 생각하면 되겠네요!
주인
아냐, 이건 좀 다른 일이야. 많이 달라.
왕곰
어떤 점이 다르죠? 외계에서 왔고 말이 조금 많다는 것 빼고는 똑같잖아요. 동그란 눈, 까맣고 말랑한 코, 북실북실한 이 털들… 그 친구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왕곰인형은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아요.
주인
(버럭) 그게 아니라고!
왕곰
….
주인
난 이제 더 이상 인형이 필요하지 않아.
왕곰
왜요?
주인
당신이 그랬지, 모든 걸 목격하는 눈이라 쉽게 피곤해진다고. 그래서 싫은 거야. 인형은 눈을 감지 않아. 전부 다 보고 있는 것 같다고. 그러고는 가만히 있어. 뭘 봤어도 눈빛 하나 안 변하고 그냥 가만히. 이게 얼마나 끔찍하고 날 괴롭게 만드는지 알아?
왕곰
나는 다르잖아요.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본 걸 이야기해주거나, 당신이 원하지 않는 보지 말았으면 하는 것에선 고개를 돌리거나…
주인
그것도 싫어. 당신이 보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을 내 입으로 말하는 순간, 그건 이미 눈앞에 훤히 펼쳐진 거나 마찬가지야.
왕곰
… 어렵네요.
주인
지금도 봐. 당신은 여기 마음대로 들어와서 나를 봤잖아. 내가 여기서 자는 걸 오히려 더 편하게 느낀다는 사실까지 전부 목격해버렸어.
왕곰
당신의 어둠 속을 봤다는 이유로 당신을 비난하지 않아요.
주인
상관없어. 누군가가 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괴롭게 해. 저기 창문으로 햇빛이 들잖아? 태양이 밤새 나를 지켜보다가 아는 체하는 것 같아. 왕곰인형을 껴안고 잠들면 내가 악몽 꾸는 얼굴을 왕곰의 까만 콧구멍이 다 쳐다보는 것 같다고. 이게 얼마나 죽고 싶은 일인지 알아? 아무 흔적도 소리도 없이 스르르 사라지고 싶어.
잠시 침묵.
왕곰
당신도 나처럼… 사라지고 싶었나요?
주인
그러고 싶었어. 그런데 당신 때문에 다 무너졌지. 혹시나 눈 떴는데 내가 난데없이 당신 고향에 떨어져 있으면 어떡해?
왕곰
당신도 거기 가면 몸에 털이 싹 밀리고 매끈매끈하게 몸이 바뀌겠죠, 뭐.
주인
(작게 웃는다) 팔 한쪽만 빌려줘.
왕곰
물론이죠.
주인
(팔 한쪽을 품에 껴안고) 야, 너….
왕곰
푹신한가요?
주인
조금 흐물흐물하네. 인형이 나랑 같이 나이 먹은 느낌이야. 그래도 좋다.
왕곰
좋으면… 좋은 거죠.
주인
와, 신기하다.
왕곰
뭐가요?
주인
그거 내가 되게 싫어하는 말이거든.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런데 아까 네가 말하니까 그렇게 듣기 싫지 않았어.
왕곰
말하는 인형의 역할은 이런 거군요.
주인, 왕곰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
왕곰
창문 바깥이 파래진 것 같아요.
주인
아, 망했다. 도대체 몇 시야.
왕곰
곧 해가 뜰까요?
주인
몰라. 태양이 영원히 잠들면 안 뜨는 거고 그렇지. 해 뜨는 거 보고 싶어?
왕곰
아뇨, 좀 추운 것 같아서.
주인
(팔 벌리며) 이리 와.
왕곰
별로 따뜻할 것 같진 않은데….
주인
혼자 있는 것보다는 따뜻하겠지.
왕곰
(애매한 자세로 주인에게 기대고) 여기 밖으로 나가도 춥나요?
주인
바닥은 따뜻한 편인데 언제 바람이 불어 닥칠지는 몰라.
왕곰
해가 뜨면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줄래요?
주인
음… 그래.
왕곰
당신이 사는 곳에 나를 놓아줘요.
주인
생각해 보고, 마땅한 자리가 생기면. 일단 지금은 여기서 자자.
왕곰
잘 자요.
주인
너도.
주인은 눈을 감고, 왕곰은 주인을 바라본다.
서서히 창밖에서 창백한 빛이 밝아온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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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빛

김영빛
상처에 가 닿는 빛의 존재를 등불처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보겠다는 선택을 응원하기 위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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