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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미노타우로스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김주희

제206호

2021.09.30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인간
짐승
새끼
*새끼는 인간과 소의 교잡으로 태어난 종이다.

다시, 대멸종 후

무너진 어느 집의
반쯤 갈라진 바닥,
그 밑의 벙커.
낡은 벙커 안.
천장의 좁은 창으로 미미한 빛이 들어온다.
밖에선 간간이 초소형 드론이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인간과 짐승, 새끼, 빨간 천 주위로 모여 있다.
천에는 사체가 담겨있다.
인간, 냄새를 깊이 들이마신다.
무어라 짧게 기도문을 읊는다.
짐승, 눈물을 흘린다.
새끼, 사체를 낯설게 바라본다.
새끼의 배는 불러 있다.
새끼
어디로 갈까요.
짐승
세상의 처음으로 갈 거다. 광활한 초원을 달리게 될 거야.
새끼
왜 우세요…?
짐승
점점 마음이 약해지는구나.
인간
여긴 죽은 자를 두고 울지 않아.
짐승
이 애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실컷 울어주는 거야.
(사체를 핥으며) 하긴, 당신은 슬픔을 모르니까.
짐승, 울음에 숨이 잘 쉬어지질 않는다.
방독면을 급히 뒤집어쓰고, 쇠진한 몸을 짐처럼 끌며 벽으로 간다.
설치된 공기 필터의 손잡이를 돌린다.

인간, 기침하며 손잡이를 뺏는다. 방독면을 벗겨 짐승을 타박한다.
새끼, 출력이 원활하지 않은 모니터로 밖을 확인한다.
새끼
(인간에게) 괜찮아요.
인간
숨소리 하나, 발소리 하나, 뭐든 새어나가지 않게 꼭꼭 틀어막으랬지. 저것들이 돌아다니는 건 저걸 조종하는 놈들이 남아있단 뜻이야. 이 망할 세상에 우리만 있는 줄 알아? 대체 언제까지 가르쳐줘야 하지?
짐승
문이나 열어. 불을 구해 올 거야. 늦지 않게 보내야 해.
새끼
엄마. 제가,
인간
지금은 안 돼.
새끼
다녀올게요.
인간
거긴 너무 멀어.
새끼
갈 수 있어요.
인간
알잖니.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새끼
...
인간, 칼을 꺼내 사체의 몸을 가른다.
능숙한 솜씨로 살점을 분리한다.
짐승
뭐하는 짓이야?
인간
…먹어. 썩기 전에.
새끼
언니는, 음식이에요?
인간
살고 싶지 않니? (배를 보며) 네 애를 살리고 싶지 않아?
나라고 다를 거 없어.
짐승, 인간을 친다. 다리에 힘이 없어 절뚝거린다.
숨을 몰아쉰다.
짐승, 사체를 품에 안는다.
인간, 짐승에게 칼을 들어 위협한다.
새끼,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본다.
짐승
차라리 날 먹어.
인간
소란 피우지 마. 장례 중이야.
짐승
보내줘. 조금이라도 편히 갈 수 있게.
인간
아비 노릇은 조금 후에 하는 게 어때. (새끼의 배를 보며) 멀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이게 필요해. 더 굶을 순 없어.
짐승
부탁이야.
인간
(새끼에게 칼을 향하며) 이걸 원하는 거야?
사이.
짐승, 물러난다.
새끼, 칼끝을 멍하니 바라본다.
짐승
세상이 주저앉은 건 다 이것들 때문이지. 잊지 마라.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게 어떤 괴물인지.
인간
당신네들을 끝까지 지킨 게 누군데.
짐승
너에겐 수천만 년이 넘는 대지의 피가 흐른다. 용맹함을 잃어선 안 돼. 네 조상은 세계를 다스린 신이었다. 모든 산 것들은 네 발밑에 있어. 누구에게도 엎드리지 마라. …나처럼 약해져선 안 돼.
인간
넌 이 행성을 통치해온 위대한 인간이야. 빈손으로 태어나 낯선 땅에 발을 디디고 수많은 세계를 건축해냈지. 그 어떤 종보다 영리하고, 성찰할 줄 알 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목숨을 내거는 용기를 발휘해. 때론 매혹적인 이야기까지 지어내면서 세상을 이해해나가지. 잊지 마. 자신을 잊으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야.
인간, 살점을 입에 넣고 씹는다.
마저 가르고 갈라, 짐승과 새끼 몫으로 던진다.
인간, 뼈 하나를 만지작거리다 품에 넣는다.
인간
한참 기다려야 할지 몰라. 어서 먹어. …네 언니의 뜻이다.
짐승
기가 막히는군. 누구 때문에 이 지경이 됐는데. 이리 오렴. 슬픔을 달래줘야지.
짐승, 사체의 뼈를 핥고 핥는다.
다리를 긁는다. 두드러기가 잔뜩 올라와 있다.
새끼, 그런 짐승을 본다.
인간
뭐하니? 니 몸에 언니를 들여야지? 언니를 외롭게 할 생각이야?
짐승
이리 와. 어서 머리를 맞대야지.
새끼
… 언니는 왜 죽었을까요. 인간이라 죽은 걸까요, 짐승이라 죽은 걸까요? 인간으로 죽은 걸까요. 짐승으로 죽은 걸까요? 죽을 땐 무슨 기분이었을까….
인간
너를 살게 하는 것만 상상해. 비틀거리고 쓰러지려 해도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 지나간 건 붙들지 마. 니 언니가 죽던 순간만 물고 늘어지면, 넌 고장날 거야. 내가 사는 세상에선 그랬어. …모두들 조금씩, 천천히 미쳐갔지.
새끼
전 아직 미쳐본 적도 없어요. 한 번쯤은…
인간
널 봐. 살기 위해 네 부모가 선택한 방법을!
휩쓸려 죽고, 무너져 죽고, 타 죽고, 굶어 죽고, 앓다 죽고, 스스로 죽고, 함께 죽고. 그 질기고 지겨운 아수라장에서 니 아빠와 난 살아남았고, 함께하기로 했다. 넌 그 증표야. 배 속 니 애한테도 그래주어야지? (새끼의 배를 쓰다듬으며) 넌 내가 처음 이곳으로 여행을 왔을 때 기대로 부푼 내 눈을 닮았어. 이 아이 역시 그렇겠지? 어서 보고 싶구나. 어여쁜 인간의 아기를.
짐승
지키거라. 빼앗겨선 안 돼.
새끼
(배를 감싸며) 절 쿡쿡 찔러요. 이쪽, 저쪽. 이것도 고통일까요…?
고통이 뭘까요? 알고 싶어요.
인간
뱉어버리면 그만이지.
짐승
…기억해야 해. 우리의 울분을. 먼 곳의 형제자매들이 어떤 생을 살았는지를. 그걸 생이라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구나. 탄생도 죽음도 온전히 우리의 것이 아니었지. 평생을 철창에 갇히고, 갇힌 채 강제로 새끼를 배고, 낳자마자 뺏기고, 종일 아프도록 젖을 짜지. 꼬리가 잘리고, 생식기가 잘리고, 뿔과 눈과 혀가 뽑히고, 피부가 벗겨지고, 총에 맞고, 몸이 토막 나고, 숨이 붙은 채 기계에서 잘려 나가거나 파묻힌단다. 아주… 아주 오랫동안 반복됐지. 인간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그럼에도 우린 자비를 베풀었어. 식성, 외형, 신체, 생각, 모든 게 훼손된 후에도 말이야. (인간을 바라본다) 난 실패했다. 이젠 증오만 가득하지. …한때 이곳의 인간들은 내 발밑에 엎드려 경외를 표하곤 했다. 뒷발로 한 번쯤 걷어찰 법한 일도 있었지만, 우린 미움을 첫째로 배우지 않았어. 자연은 우리에게 그런 걸 물려주지 않았단다. 거리 에서 걸음을 멈추고 내 발밑에 엎드린 인간들을 위해 나 역시 그가 누구든, 무슨 죄를 지었든 눈을 감고 기도했단다. 그러니 얘야. 오랫동안 받은 고통을 잊지 않되, 살아있는 만물에 자비를 보이렴. 그건 아주 어렵지만,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이란다. 신의 위엄이란 그런 거야. 그걸 잃으면, 우린 저 괴물과 다름없어진단다. 넌 우리 종족의 마지막 희망이야. 네 목숨의 의미를 잊지 말거라. …네 목구멍에 붙은 신음 하나까지 말이야. 이 아비의 유언이다.
새끼
아버지, 난 실컷 웃어보고 싶은데요.
짐승
……
새끼
두 분의 말씀은 늘 달라요. 저도 제 새끼한테 무언가 확실한 걸 가르쳐야 할 텐데…. 이걸 먹으면 알 수 있을까요?
새끼, 살점을 집는다.
짐승, 새끼를 발로 찬다.
짐승
… 이건 음식이 아니라 병에 걸려 죽은 네 자매야!
새끼, 넘어진다.
인간
제정신이야?
새끼
… 알고 싶어요.
짐승
보낼 거야. 죽어서까지 이 애를 가둬둘 순 없어.
짐승, 사체를 입에 물고, 문으로 향한다.
인간, 족쇄를 가져온다.
짐승의 발에 채운다.
인간
도움은 바라지도 않아. 제발 숨 좀 쉴 수 있게 얌전히 있으란 말이야!
이제까지 당신이 살아있는 이유가 뭔데? 내가 살려뒀기 때문이잖아. 이날까지 당신을 참고 또 참으면서 지켜낸, 내 덕분이라고. 당신을 대신해 죽음을 무릅쓰고 당신 입에 뭐라도 넣으려는 내 노력의 시간을, 어떻게 매번 배신할 수가 있어?
짐승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게 하는 걸, 덕분에라고 하나? 당신에게 난 그저 썩지 않아야 할 음식에 불과하지. 그만 가야 한단 걸 알면서도, 당신 입구멍으로부터 저 앨 지키기 위해 버티고 있단 걸 모르나보군!
새끼
…전 왜 살아있는 걸까요? 아빠의 종족이라서, 엄마의 먹이어서? 아직 이 애한테 왜 태어나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나와 무슨 관계인지 말해주지 못했어요. 절 먹이기 위해 살라고 해야 할까요?
인간
사는 데 방해가 되는 인간의 가장 큰 단점이 뭔지 아니?
새끼
뭔데요?
인간
… 외로움이란다. 그 하잘것없는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넌 본능적으로 낳고 기를 거야. 그러니 쓸데없는 고민은 집어치우렴. 내가 왜 사람도 아닌 가축과 그 짓을 했겠니? 그날… 그 마지막 날 이후 아무리 주위를 찾아봐도 사람이라곤 죽었거나 썩었거나 둘 중 하나였거든. 당장에 배를 채우고 싶어도 꾹 참았단다. 그런 상황에선 마음이 더 허기가 지지…. 인간만의 단점은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짐승
달라질 줄 알았다. … 잘못된 선택이었어.
인간과 짐승,
침묵한다.
새끼
그럼 전… 잘못된 존재일까요?
사이.
새끼
언니가 있었을 때가 떠올라요. 함께 두 발로도 네 발로도 달렸죠. 뜻 모를 울음소릴 내고, 무엇이든 번쩍 들 수 있을 만큼 힘이 셌어요. 가끔씩 아빠를 보면 우리도 모르게 침이 고였고, 엄마를 보면 달려들 것처럼 몸이 앞섰죠. 무엇이 슬프고 기쁜지 알고 싶었지만, 알 수 없었어요. 그래도 우리가 세상에 없던 존재란 건 알았어요. 두 분이 가끔 우릴 너무 낯설어했거든요.
사이.
새끼
우리 중 누군가는 이 문을 열고 나가게 될까요?
누군가는, 나갈 수 있겠죠?
사이.
새끼
이 아이는 누구일까……. 먹이일까요.
사이.
새끼, 사체를 앞에 두고 절을 올린다.
인간
뭐 하는 짓이니?
짐승
우린 누구에게도 머릴 조아리지 않아! 니 엄마 같은 인간이나,
새끼
… 정말 알고 싶어요. 저한테 이게 뭔지.
새끼, 문득 눈물이 나오려 한다.
그걸 본 인간, 다가가 새끼의 입에 살점을 쑤셔 넣는다.
새끼, 거듭 뱉는다.
인간, 다시 입속에 쑤셔 넣는다.
인간
먹어. 인간이라면 환장하지! 이날까지 우리가 그토록 찬양한 게 바로 이 살점이야! 우릴 끝까지 살렸지.
짐승
울어라! 죽은 자매를 대신해서, 홀로 살아남은 고통을 위해 울어!
말했지. 울분을 기억하라고!
인간
더 나은 생각을 할 순 없어? 우린 살아가야 해…. 당신과는 다르다고!
애한테 혼란스러운 감정 주지 마! 죽고 싶거든 곱게 죽으란 말이야!
짐승
당신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기도를 한 적이 없어. 그래서일까….
날로 악해질 뿐이지. 당신네들, 끝까지 참 불쌍하군.
인간
… 애를 낳은 것도 나, 죽어가는 애를 보살핀 것도 나, 보내는 것도 나!
난 최선을 다했어. 당신은 뭘 하는데? 뭘 할 수 있는데…?
짐승
우린 결국 실패야. 용서를 구하지도, 받지도 못했어.
…그날, 당신과 난 비명도 들리지 않는 화염 속을 보고 있었어.
그리고 약속했지. 그 모든 시간을 뒤로 하고, 함께 살아가기로.
인간
외로워. …인간이 없는 삶은, 역시.
짐승
가끔 꿈을 꿔. 형제들, 자매들과 세찬 빗속을 마구 달리지. 모든 피부가 젖고 젖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실컷, 오래. 깨고 나면 그런 생각을 해. 우리의 집은 어디일까. 무덤은 어디일까. 길을 잃은 지 너무 오래됐어. 꿈속에서 우린 웃고 있어. 하지만 어디에도 마음 편히 도착하지 못해.
인간
그보다 더 외로운 건 언제 죽게 될지 모른다는 거야. 내 불안은 음식이 달랠 수 있어. 음식…! 그것만큼 따뜻한 게 있을까…. 그러니 먹는 게 나아. 나를 죽이는 것보단 남을 죽여서 사는 게 나아. 그러니 이 족쇄는 누군가의 목에 채워져야 해. 어쩔 수 없잖아. 우린 누구랄 것 없이 누군가의 피와 살을 파먹는 존재들이니까. …그간의 정을 봐서, 기도쯤은 해줄 수 있을 거야.
짐승
… 한 번이라도 내 혼을 들여다보긴 했을까.
끝까지 우릴 속이는군. 마지막으로 본 인간까지. 당신들한테 우린 뭐였을까.
새끼, 사체를 우걱우걱 씹는다.
짐승
……얘야.
새끼
씹고, 또 씹어 삼킨다.
짐승
……내 마지막 믿음을 깨트린 만큼, 난 죽어서도 당신들을 저주할 거야.
신에게 대적한 인간은 모조리 파멸을 맞이했지.
…용서를 구할 생각은 마.
인간
… 신께서 그리 야박한 마음을 가져서 되겠어? 제 몸과 살을 떼어 먹이는 신도 있다는데, 박애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신이라니. 당신은 우리에 갇혀 싸고 먹는 가축에 불과해! 살기 위해 내 배 아파 낳은 새끼를 다시 배 속으로 삼킨 마당에, 당신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진짜 신은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해. 세상이 왜 이 지경이 됐냐고? 인간은 못 할 게 없어. …악마가 되어서라도 말이야. 나와 내 자식을 죽게 둘 순 없어. 살기 위해 필요하다면, 피는 감수해야지. 용서하지 마. 동정은, 내가 해줄게.
인간, 칼로 짐승의 정수리를 찌른다.
얼굴에 비처럼 피가 떨어진다.
짐승, 소스라치게 울며 몸부림친다.
인간
… 고통은 덜 줄게. 신께 예의는 갖춰야지.
인간, 찌른다.
수차례
배를 찌른다.

짐승, 잠잠해지며,
숨을 거둔다. 눈을 뜬 채.
새끼, 피가 솟구치는 짐승의 배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인간
… 오늘은 정말 제대로 된 장례식이야! 뭐든 위대한 것이 살아남지.
그건 세상이 선택한단다. 봐. 너랑 나만 남았잖니. 우린 앞으로도 선택하고, 선택받을 거야.
새끼
왜 웃으세요…? 행복하세요?
인간
…그래. 마음이 가볍구나! 기뻐….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아서. (인간, 냄새를 맡는다) 이제 제대로 배를 채워야지? 이 정도 신선한 살이라니, 대체 얼마만이지? 넌 처음 맛보겠구나.
새끼
아빠는, 행복하게 죽었을까요.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까요?
인간, 짐승의 살점을 도려낸다.
새끼, 제 배를 감싸 쥔다.
인간, 건넨다.
인간
어서 먹으렴.
새끼
…… 나올 것 같아요. 전과 달라요.
인간
다리를 벌려. 숨을 고르게 들이마시고 내쉬어. (시범을 보인다.)
새끼
(따라 하며) 낳는 게 맞을까요? 전 아직 이 애가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요. 저 역시 들어보지 못했어요. 말해주실 수 있어요……?
인간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은 뭔지 아니?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지도 모른 채, 자신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거야. 나처럼. 그리고 너처럼.
인간, 애써 웃으며, 살점을 먹는다.
새끼, 인간의 웃는 얼굴을 살핀다.

천에 쌓여있던 그것과 짐승의 그것이 바닥에 마구 뒤엉켜 있다.
피 내음이 진동한다.
인간,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넣어본다.
새끼
엄마.
인간
이리 와. 함께 먹자.
새끼
한 번이라도 절 보며 웃어줄 순 없어요……?
그럼 저도 이 애한테 웃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행복하면, 웃는 거잖아요. 지금처럼.
인간
…그렇겐 못 하겠는데.
새끼
한 번, 딱 한 번인데…….
그 한 번이…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인간, 계속해서 살점을 뜯고, 씹고, 삼킨다.
새끼, 배를 움켜쥔 뒤 칼을 집는다.
비틀거리며 인간에게 향한다.
새끼
… 언니는 나랑 닮았어요. 우리와 닮은 건 우리뿐이었죠. 나머진 다 낯설었어요. 갑자기 넘치거나 폭발하는 것들, 죽은 것, 썩은 것, 가끔씩 살아있다고 말하기 뭐한 것들, … 그리고 두 분.
두 분은 언니에게 서로 다른 생존을 가르쳤어요. 어려서부터 전 늘 헷갈렸어요.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거지? 난 누구지…?
그럴 때면 언니 얼굴을 봤어요. 언니는 두 분의 말을 그저 듣고만 있었어요.
대답도 표정도 없이요. 우린 닮았지만, 가끔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잠결에 본 언니가 그랬어요. 주먹을 쥔 채 두 분을 가만히 내려다봤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게 뭔지 몰랐어요. 그런데 언니가 시름시름 앓을 때도 죽은 뒤에도 두 분이 보인 행동은… 전과 다르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그때의 언니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어요.
사는 건 그런 건가…? 모두 어둠 속에서 매일같이 주먹을 꾹 쥐고 있는 걸까. 그리고 이젠 제가 저를 내려다봐요. 아쉽게도 저도 슬프지 않아요. 목구멍에 불이 붙은 것 같지만, 뭔지는 모르겠어요. 이건 뭘까요…? 전 정말로…… 알고 싶어요.
새끼, 인간을 껴안은 채 칼을 꽂는다.
인간, 먹던 것을 뱉는다.
새끼
그러니 슬픔이라도 알려주세요…. 한 번만 절 보며 울어주세요.
이것도 안 돼요……? 살아야 해서?
인간, 한 마디 비명도 없이,
서서히, 느릿느릿, 새끼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새끼, 한참 뒤 인간을 내려놓는다.
아픈 배를 움켜쥔 채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피로 물든 방.
새끼
오늘은 정말 제대로 된 장례식이네요. 누가 찾아오지도, 슬퍼하지도 않아요. 슬프게도, 혼자 남은 저도 슬프지가 않네요.
… 제가 지금, 슬프게도, 라고 했나요?
이런 게…… 슬픔인가 봐요.
슬프게도, 슬프지 않은 것.
살아남는 것 말고, 배운 게 있네요.
… 다행이에요.
어쩌면 이 애와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알려줄 것이 생겼으니까요.
머리 위로 햇살이 작살처럼 쏟아진다.
새끼, 서툴지만 천천히, 배를 쓰다듬어본다.

긴 시간이 지난다.
울음을 가진 것이 태어난다.

짐승의 울음 같기도, 인간의 울음 같기도,
짐승의 울음도 인간의 울음도 아닌 듯한,
짐승이기도 인간이기도 한 듯한 울음을 가진 것이.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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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희

김주희
나와 당신 안에 사는 작고 이상한 목소리들. 외롭지 않게.
「마르지 않는, 분명한, 묘연한」, 「낙원」 등을 씀.
프로젝트 1인실에서 활동. forcc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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