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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마, 야옹이가 돌아오며는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강동훈

207호

2021.10.14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머시
장소
삐걱대는 통나무집. 집 안에는 고장난 라디오와 안락의자,
집 밖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야옹이 밥이 놓여있다.
머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을 흥얼거려본다.
머시
그랜-마, 일어나! 일어나 보라고. 이게 무슨 곡이지?
이것도 그랜-마가 가르쳐준 곡이잖아, 분명히 기억하는데.
여기 마지막 카덴차, 분명히 내가 연주했잖아!
그래, 그날 오케스트라가 마지막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그랜-마가 혼자 벌떡 일어나서 박수를 쳐버렸지.
맞아! 그날 밤 에비스홀에서 말이야.
처음으로 나를 칭찬해준 날인데- 우리가 야옹이를 처음 만난 그날.
그날 집에 가는 길에 만난 게 바로 야옹이었잖아.
옆에 놓인 안락의자를 흔들며 웃는 머시.
머시
둘이서 처음 싸구려 레드 와인 두 병 사 들고서
처음으로 취해서 비틀거리다가 그때.
아- 이 곡, 정말 이름이 뭐더라?
… 그랜-마, 좀 일어나 보라고. 벌써 또 새벽이야.
아직도 야옹이가 돌아오지 않았다니까.
이러다 야옹이 밥이 전부 상해버리면 어쩌지?
흘러나오던 카덴차가 끝나자 라디오에선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래된 뉴스가
재생된다. “D-7 D-7 , 지구에 바이러스가 꽃처럼 퍼집니다.”
라디오를 흘깃 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물을 끓이는 머시.
머시
음- 뭐라고? 옥수수? 그랜-마도 참.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옆집 옥수수 밭은 불타버린 지 3년이 다 돼간다고.
그래, 여기 봐. 여기 분명히 적어 뒀어.
“D-7 D-7, 강물이 여기까지, 디트로이트 고래가 지금 눈앞에서……”
머시
옆집 해밀턴 아저씨는 그날 밤에 바로 이사를 가버렸어.
우주로 간다고 했던가? 그래 맞아!
떠나면서 아저씨가 괴상한 행성 이름들을 나열했잖아.
(바닥을 살펴보며) Rf-7d? Hbo-110?
아내도 없이 평생 옥수수 밭만 바라보던 아저씨가 우주라니
그랜-마 말처럼 이 동네 사람들, 참 믿고 싶은 걸 멋대로 믿어버린다니까.
정말, 바그너 오페라 속 여주인공보다도 바보 같다고.
그때 물이 끓고 라디오가 운다. 서로 번갈아서 칙칙-거리는 두 개의 신음소리가
기차의 출발을 재촉하는 듯하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머시, 급하게 커피를 내리다
손을 덴다.
머시
아 뜨거! 크게 좀 말해봐 그랜-마.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뭐라고?
(계속 치직-대는 라디오를 힘껏 내리치며)
시끄러, 시끄러워 이 지긋지긋한 고물단지야!
라디오 안테나가 꼭 혼이 난 아이처럼 쭈그러들고,
쫑알대듯 작은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머시
하여튼 이게 전부 다 그랜-마 때문이라니까.
그랜-마가 매일같이 네 녀석을 틀어달라고 부탁하지만 않았어도,
진작 너 같은 구식 라디오는 내다 버렸을 텐데.
하루 종일 똑같은 신음만 내뱉는 네 옆에 있는 건 고문이야.
세상에서 제일 시시한 섹스를 하는 기분이라고!
이내 라디오가 완전히 반항을 포기한다.
머시는 소리가 멈추자 그제야 라디오를 쓰다듬어 준다.
머시
근데 아까 뭐라고 했어?
뭐? 그럴 리가 없는데?
(창가로 가 냄새를 맡아보며) 크림 무스에 구운 감자, 아보카도 샌드위치.
이 냄새는 정말이잖아-
(창가에 적힌 글귀를 보며) 아니지. 아니야.
여기를 봐 그랜-마, 지난번에도 우리가 착각을 한 모양이야.
스미스 아줌마도 2년 전에 바이러스에 감염돼 버렸대.
그래, 그 집 화장실에서 죽은 쥐가 삼천오십 마리나 나왔다나.
그 극성맞던 아줌마도 결국은 좀비가 된 거야.
사이. 끓인 물로 커피를 한 잔 내리는 머시.
머시
스미스 아줌마야 그랜-마에 비하면 여러모로 흔해 빠진 여자였지.
그래도 비 오는 저녁이면 해주던 요리만큼은 정말 황홀했는데.
“세 봉 머시, 세 봉 머시”
블랙커피를 살짝 입술에 적신다. 쌉쌀하다.
머시
아무튼 아줌마는 떠나지 않으려 했는데,
아들놈이 억지로 아줌마를 우주선으로 데리고 간 것 같아.
그래, 그랜-마. 아줌마 품에서 나올 줄 모르던 그 철부지 말이야.
(바닥에 새겨진 글씨를 알아보려 애를 쓰며)
어디보자- 캐러멜 사탕?
캐러멜 사탕이라고만 적어두면 어쩌자는 거야 이 바보.
사탕을 두고 간다는 건지, 먹고 싶다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잖아.
떠나기 전에 그 녀석, 우리 야옹이를 찾아와서는
옆에서 뭐라고 온종일을 중얼거렸던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그날만큼은 그렇게 까칠하던 야옹이도 그 녀석을 잘 따랐어.
아니다, 그 녀석이 우리 야옹이를 잘 따랐다고 해야 하나?
바닥에 적힌 수많은 글씨들. 알아보기를 포기한 머시는 벌떡 일어난다.
추운 듯 두 팔로 자신을 끌어안는다.
머시
으으, 그나저나 지독하게 춥다.
온기를 가진 건 다 떠나버린 것 같아.
아무리 창문 밖을 살펴봐도, 이제 이 동네에는 아무도 없어.
(안락의자에 덮여있던 담요를 단단히 싸매주며)
그러니까 그랜-마. 야옹이가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도 여기를 떠나볼까?
제법 괜찮은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말이야.
그랜-마는 항상 내 연주를 듣다 눈을 감고 싶어 했으니까.
그때 뭔가 창문에 달려들어 박는 소리가 들려온다.
철창에 갇힌 새가 날아가려다 머리를 박는 소리라기보다는 추락하는 소리다.
머시, 소리에 놀라 뒤로 물러서다 라디오를 밞자 덜컥거리며 채널이 돌아간다.
“쓰리, 투, 지구에 바이러스가 꽃처럼 퍼집니다.”
“지구는 이제 탐스러운 시체들의 것입니다.”
머시
야옹이, 야옹이니? 그랜-마, 게으름 피지 말고 좀 일어나봐.
야옹이가 돌아왔나 봐!
내가 내린 커피 향을 맡고서 드디어!
… 아니잖아. 그랜-마, 또 그 녀석이야.
문 밖에서는 계속 소리가 들려온다.
머시
그래, 어제도 찾아왔던 시체가 오늘도 왔어.
돌아온 탕아가 또 집을 잘못 찾아온 모양이지.
그래봤자 소용없어 좀비아저씨. 오늘은 들여보내 주지 않을 거야.
여기서 이래봤자 아무런 소용없다고! 당신이 찾는 건 여기에 없으니까.
당신은 이제 걸어 다니는 시체일 뿐이라고!
머시는 문을 확 열고 자신의 얼굴을 직면시킨다.
머시
똑똑히 봐. 아니지? 단단히 살펴보고 다시 당신 집을 찾아가라고.
야옹 야옹- 그렇게 연기해봐도 소용없어.
당신은 내가 찾는 야옹이가 아니고! 나도 아저씨가 찾는 누군가는 아니니까.
그럼 안녕! 아저씨에게도 언젠가 끝이 찾아오길 바라!
문을 다시 닫는 머시. 그러나 문 밖의 그것은 계속해서 머리를 들이박는다.
머시는 그 소리에 치를 떨며 커피를 한 잔 더 내린다.
머시
정말 사람들은 못 말려. 좀비가 돼서도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니까.
마지막 우주선이 출발한 건 벌써 오래전 일인데-
여기 남은 건 이제 만년을 내버려 둬도 썩지 않을 인스턴트커피랑
길고 기다란 기다림뿐인데.
라디오 채널을 돌려보는 머시. 과거의 방송들만 계속 송신되고 있을 뿐이다.
“옥수수 밭 만 아치, 전부 불에 탑니다.”
머시
지겨워, 알고 있어
덜컥, 또다시 라디오가 넘어간다. “디트로이트 강이 거리를 덮고 온통 생쥐 떼가”
머시
알고 있다고.
“쓰리, 투, 첫 번째 우주선이 광활한 우주를 향해 출발합니다.”
“궤도를 이탈한 행성은 영원히 우주를 떠돌아 다닙니……”
머시
그만!
머시, 라디오를 꺼버린다. 덜컥. 정적이 찾아온다.
머시
나는 저런 바보 같은 시체가 되지는 않을 거야
아무리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자기 집이 어디였는지를 잊어버린다니.
그건 정말 슬픈 일이잖아! 넌더리 나게!
… 슬픈 일이라고. 내가 설마 그랜-마를 잊어버리겠어?
아니, 절대 그럴 일은 없지. 당신같이 지독한 여자는 잊어버릴 수가 없어.
슬픈 건 견딜 수가 없지. 여길 봐, 그랜-마.
(피아노 연주하는 시늉하며)
그랜-마가 연주해주던 선율을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는 걸.
그치?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이 선율만 까먹지 않는다면-
좀비가 된다는 건 생각보다 나쁜 일이 아닌지도 몰라.
시체들의 시간에는 끝이 없으니까!
오늘 야옹이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조급해질 필요 없지.
내일 오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상상해봐 그랜-마
영원이라는 걸 말이야.
우리는 야옹이를 기다리면서 함께 온 우주를 떠도는 거야.
축복받은 사제처럼, 여기서 나란히 야옹이를 기다리면서-
물이 끓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운다.
머시
아무리 짓궂은 축복이라도 말이지.
참나, 그새 또 잠이 오는 거야?
집에는 안락의자가 간헐적으로 삐거덕-거리는 소리만이 맴돈다. 한참을 앉아 있던
머시는 불현듯, 방금 잠에서 깬 사람처럼 다시 커피를 내린다.
머시
하루가 점점 짧아지는 걸까? 벌써 해가 지네.
여기, 노을빛이 벌써 새어 들어오잖아!
아이참, 눈을 좀 떠보라니까 그랜-마. 벌써 잠에 든 거야?
뭐? 쫑알쫑알 시끄럽다고?
알았어, 쉿. 그랜-마가 잘 수 있게 라디오를 틀어줄게.
제대로 된 피아노만 있었다면-
그랬다면 내가 멋들어진 녹턴을 연주해 줄 수 있을 텐데…
라디오를 튼다. 덜컥, 덜컥 한참 채널을 돌리는 머시.
익숙한 카덴차가 흘러나오자 드디어 멈춰 선다.
여전히 같은 곡이 재생되고 있다. 머시는 그 선율을 따라 흥얼거린다.
머시
쌔근-쌔근. 꼭 아기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얼굴이다.
이렇게 배에 손을 대고 있으면- 기억하지?
예전에는 그랜-마가 꼭 이렇게 해줬는데.
맞지 그랜-마? 이렇게 해줬던가?
오래되고 익숙한 정적.
머시에게 망각이 찾아오듯 밤이 통나무집에 어둠을 드리운다.
느리게, 하지만 아주 분명하게 머시의 통나무집은 어두워지고 있다.
해가 지는 방향을 한참 동안 응시하는 머시.
머시
야옹이는 돌아올 거야. 그럼!
언제 자기가 떠나 있었냐는 듯, 뻔뻔하게 꼬리를 쳐들고서 돌아오겠지.
그랜-마, 야옹이가 돌아오며는-
우리도 멋진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집으로 가자.
거기에 가서 난, 쉬지 않고 피아노를 연주해야지.
무슨 곡을 연주할 거냐고?
음… 지금 흘러나오는 이 곡은 어때?
그래, 여기 마지막 카덴차. 분명히 내가 연주했잖아.
그때 그랜-마가 에비스홀에서 힘껏 박수를 쳐줬지!
안락의자를 밀치며 머시는 어린애처럼 까르르 웃는다.
머시
그래, 그래. 나도 이 곡이 마음에 들어
이름이 뭐냐고? 그러니까 그랜-마, 우리 야옹이가 돌아오며는…
머시는 여전히 말을 하지만 그 소리는 웅얼거릴 뿐이다.
고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카덴차가 풍성하게 울려 퍼진다.
이제 통나무집은 머시의 얼굴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워졌지만,
완전한 어둠은 아니다. 여명이 사라지지 않은 어딘가에서-
야옹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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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훈

강동훈
1996년생.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글을 쓰고 연출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2020 국립극단 희곡우체통 <그게 다예요>로 데뷔했고, 공연/음악/패션계의 글로벌 창작브랜드를 꾸려보자는 오늘의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whereismytouch, rkdgns7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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